[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요가를 시작했다는 지인이 말한다.

“우리 요가선생님은......... 정이 없어.”

“엥? 요가선생님한테 무슨....... 정을 바래?”

뜬금없는 정 타령에 크게 웃었더니만 덧붙이는 설명이 분명 초보인 자기가 보기에도 틀린 자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만져가며 세세하게 교정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이라....

분명 이 책에서 저자도 겨울바람에 손을 비비며 화롯불에 청어를 구워먹던 이십 년 전의 맛을 더듬어 다시 속초를 찾아와 내뱉은 말이 ‘정이 없어졌다’였다.

그 많던 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오로지 빠른 회전만을 고려한 듯했고 노동에 지친 아르바이트생들의 얼굴은 식욕의 수은주를 떨어뜨리게 했다는 것이다.

 

추억의 절반이 맛이었다면 그 맛의 절반은 음식을 함께 먹던 사람과 풍경 아닐까.

어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집 앞에 있던 감나무에서 따먹었던 감이 그렇게나 달고 맛있었다며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먹어싶다 하여 구해 와서 먹어본 결과,

“이 맛이....... 아니여~”

그 맛은 추억 속에 박제된 맛인데 어떻게 현재에 재생될 수 있겠는가.

저자가 어렸을 때 숱하게 들렀던 시장통 냉면집을 근간 엄마와 다시 찾아갔을 때, 엄마가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그때는 이 집이 참 컸는데....너희들은 참 작았고.....”

 

추억속에서 한 번 꽂힌(?) 맛은 최고의 맛으로, 배경이 되던 장소는 포샵질 무한대의 화사함으로 남나보다. 실상 추억의 맛이란 현실의 자극적이고도 강렬한 맛에 줄곧 침범당하고 공격당하기때문에 안전한 기억의 창고에 격리수용된다는 본능 아래 놓인다는 생각이다.

한 번 경험해 본 맛은 이 전의 맛과 비교되며, '지난 번이 더 맛있었어" 혹은 "지난 번 보다 더 맛있네" 하는 비교급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맛을 갈망하게 되고 자본은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신메뉴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 결과 근 50년 간이 음식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불명예스럽게도 온갖 병들도 출현하게 되었고.

 

예전에 읽은 욕망에 관한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뭐 좀 맛있는 거 없나?"

이것은 식욕이 아닌 식탐인지라, 다시 말해 욕망인지라 그것을 만족시켜줄 음식은 없다고 했다.

배부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음식은 유감스럽게도 그리 많지 않다.

배고픔을 처절하게 겪어보신 어르신들이 의외로 명쾌한 답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

"배가 안고파서 그래, 배고프면 다 먹어!!"

욕망에 바탕을 둔 음식의 개발은 앞으로 인류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말 것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 맘대로 소제목을 붙여보자면

1부는 그야말로 추억의 맛에 대한 회상

2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험한 맛에 대한 회상

3부는 문학속의 맛과 내 혀속의 맛, 그 놀라운 미팅

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동회 날이면 자존심을 세울 일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 높이 쌓아올렸던 엄마의 찬합,

시금치를 무치던 참기름 냄새에 깨어나던 소년의 새벽잠,

면발 킬러인 저자가 우위를 선점하다가 국물 들이켜는데서 무너져버린 짬뽕 먹기 내기,

못 쓰는 행주를 명주실로 꽁꽁 묶어 들기름을 두르고 한 광주리씩 부쳐내던 배추전,

냉면에 흑심을 품고 원조 평양냉면을 먹기 위해 감행한 중국여행,

식으면 굳어요, 쭉 내세요. 라는 격려와 지도 아래 사슴피를 마셨다는 선배의 무용담,

김승옥의 소설에서, 욕망의 집결지라 불리는 서울의 어느 포장마차에 앉아 공깃돌만한 참새머리를

파삭하고 씹으면 어금니에 부서지는 그 쩌릿한 식감,

그의 추억에는 한껏 치기가 있고 그 치기는 양념처럼 맛에 대한 기억을 풍성하게 한다.

 

비위가 약해 '변또'라는 말에 식욕을 잃는다는 저자가 바다에서 나오면 아가미가 붉게 변하며 죽는

성질 급한 멸치를 먹기 위해 '대변항'에 기꺼이 간다. 맛은 저자를 그렇게 끌고 다녔다.

그는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멸치축제가 열리는 4월은 사람에 치이니까

대변항에 가지 마세효~

내 고향의 지명과 함께 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가끔씩 들른다는 게국지 집이 소개된다.

얼마 전, 친정을 방문하니 모 방송을 탔다며 (분명 방송을 탄 집은 한 집일텐데) 그 일대의 음식점들이 너도나도 '게국지' 집으로 변해있었다. 꽃게장, 간장게장은 선사시대의 음식이라도 된 것인가.다른 음식들을 간판에서 쓰나미처럼 몰아낸 방송의 힘은 역시 대단하였다.

방송은 정보의 소개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의 결과가 맛의 획일화로 남은 것은 뒷맛이 쓰다.

 

다 읽고 나면 깨닫는다.

그가 먹었던 음식의 거반이 술안주였음을.

소주병을 쉬이 쓰러뜨리는 볼링공과 같은 존재였음을.

한겨레신문 기자에서 요리사로 변신한 저자의 걸쭉한 입담을 주욱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고여있던 침을 닦아야하는 부작용은 감수해야겠다.

(우럭매운탕편에서 나는 침이 새지 못하도록 막는 버튼을 누르듯 두 손을 불끈 쥐고 말았다. 우럭의 기름이 배어나와 국물 위로 동동 뜨는 매운탕 국물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고 친정에 전화를 걸어 나 이번에 내려가면 아구찜 말고 우럭매운탕을 먹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말했다.)

 

리뷰를 쓰는 고요한 식탁위에 와인 한 잔과 달달한 멸치볶음이 서로 무심한 듯 놓여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와인 한 모금에 물엿이 대롱대롱 매달린 멸치를 손으로 집어먹으며 그들을 연결시켜주었다. 이 무슨 조화인고 하며 무릎을 쳤지만 '이 맛은 후일 내게 어떤 맛을 남길까' 생각하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려본다.

참, 그리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보람.

그것은 만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에게 인천 챠이나타운의 원보라는 만두집의 발견이다.

(뭐, 발견만 하고 게서 진도를 못나가게 되는 일이 살아가면서 왕왕 있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류시화의 시여도 좋고 장정일의 소설이어도 좋다.

9월을 이미 나흘이나 넘겼으므로.

두 눈을 이렇게 부릅뜨고 있는데도 휙휙 지나가는 시간은 뻔뻔하기만 하다.

아니, 그것을 알면서도 매일을 반복하는 내가 더 뻔뻔한건가? 흠

 

1.

느림보 마음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자리매김한 문태준의 첫산문집이다. 제목들을 보니 이건 차라리 말랑말랑한 시이다. 그가 말을 길게 할 때는 어떤 단어와 호흡들을 가지게 될 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왠지 이 책은 낮은 사립문 너머로 가을이 넝쿨채 굴러들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꼭 읽어보고 싶다.

 

 

 

 

 

 

2.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문정희 지음 / 다산책방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어야한다네

라는 카프카의 인용구에 제일 눈 앞를 점령한다. 살벌한 무기가 잠자고 있는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이성과 감성을 부순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굳어진 채로 살아가기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딱딱한 걸까.

너무나 화려해서 눈부신 시인 문정희님의 언어의 백화점(?)을 나는 꼭 보고 싶다.

 

 

 

 

3.

의자놀이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공지영 작가는 "사람은 자본이나 기계, 원료같은 경영의 재료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신부님의 절규를 듣고 언론인도 아니면서 이 르뽀르타주를 쓰게 되었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순간 청각 장애인들의 울부짖음이 법정을 울렸다’라는 기사 한 줄로 도가니를 쓰게 된 공지영 작가가 아닌가.

의자놀이를 하다보면 슬금슬금 원을 작게 도는 사람이 생겨나고 찜해둔 의자에 앉으려고 걸음에 트릭을 쓰게 된다. 아닌게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공격행위였다. 어른들에게는 생존경쟁의 다른 말이 되겠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상처는 과연 어떻게 치료되어야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이 간다는 것은 아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간다는 뜻인가 보다. 개학을 이틀 앞둔 팔월 셋째 주는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매미들이 내지르던 함성의 축도 어디론가 이동했고 저 언덕 위의 음대생들은 개강을 앞두고 학교 연습실에 와서 손가락을 풀고 있다. 이런 고요에 바탕을 둔 선율은 선명하게 들려도 물속에서 듣는 듯 졸음을 데리고 오기 마련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놀러갔던 큰댁에서의 오후, 쪽마루와 방 사이의 문지방에 배를 대고 엎드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시어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것을 무슨 낮잠의 신호로 알아먹은 누렁이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옆 눈으로 나를 흘기며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였어’ 하고 추파를 던졌다.

그러곤 우리는, 아니 나와 누렁이는 지탱하고 있던 고개를 가눌 힘을 잃고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각자 배를 대고 있는 각자의 바닥으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 때 우리 주위를 맴돌았던 것은 부지런한 파리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 주위엔 언제나 나비가 날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파리만 쫓고 솜씨 좋게 잠은 붙들어 매던 오후의 공기와 무척 닮아있다.

 

비행운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 때에 졸면서 가졌던 혼자라는 생각, 날지 못할 거라는 생각,

아마 이 모습인 채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그 침몰의 기분을 너무나 잘 기억해내고 있다. 너무나 고요해지고 있다. 픽션이라기보다는 옆에서 일어나는 가슴 아픈 현실이라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너무나 고요함을 느꼈다.

 

독립된 내용을 가진 단편집이지만 젊은 작가가 속해있는 또래의 절망은 계속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어지고 있다. 제목이 오히려 별 의미 없이 느껴지고 한 집 건너 또 한 집 건너 차례대로 돌아가며 내가 더 불행해 서글픈 푸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해고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가 생활했던 노조위원, 재개발로 인해 변방으로 밀리고 밀리는 도심의 빈민들, 열심히 일해도 빚만 늘어가는 서민들, 학업이 아닌 생계가 본업이 되는 대학생들. 뉴스에서 보았음직한 기사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루의 축>

 

산에 놀러갔다가 실족사한 남편을 대신해 온갖 일을 마다않는 기옥은 달라붙는 빈곤을 떼어버릴 수 없다. 기옥에게는 남편이 죽었을 즈음부터 생긴 원형탈모증이 매우 부담이다. 탈모는 나날이 빠르게 진전되어 현재 말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직장에서는 두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직장은 인천공항 화장실.

수 없이 도착하고 출발하는 그 곳에서 그녀에게 비행운이란 중력을 거슬러 힘겹게 상승한 비행기의 한숨처럼 보일뿐이다.

어느 날, 호주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던 외아들이 그만 절도를 저지른다. 달려오는 택배직원을 폭행까지 해 지금 실형을 살고 있다.

추석을 앞둔 오늘, 기본적인 음식을 준비하고 나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아들의 편지를 발견한다.

일을 다 끝내고 공항 벤치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혹은 이 비루한 삶을 단번에 날려줄 시원한 위로 한 방을 기대하며 편지를 뜯는다. “엄마, 사식 좀”

편지를 뒤집어보지만 다섯 글자 외에는 아무 것도 써진 것이 없다. 모두 마다한 명절 당번을 자처하기 위해 파트장을 찾아간다. 정수리를 가려줄 두건도 잊은 채.

 

<서른>

 

이십대가 하나의 채무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삼십은 채무의 어떤 결과처럼 보인다는 그녀.

그녀는 J대 불문과에 어렵게 진학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졸업했지만 보습학원 을 전전긍긍하며 다녔다. 나름 인기 있는 선생이었던 그녀는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지만 정 많은 면목동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씁쓸하다. ‘너희들은 자라서....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어느 날,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녀를 떠났던 옛 애인이 전화를 걸어온다.

“나 이제 돈 잘 벌어.” (너만 속아준다면)

나름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그녀는 그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에 못 이겨 한 달에 삼백만원, 천만 원도 벌 수 있다는 직장에 8백만 원 입회비를 내고 합숙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맥을 고객으로 치환시켜야하는 다단계조직이었다.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 이라 이름이 바뀐 시스템은 더 악랄해져있었다.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지인들의 신상정보를 털렸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싸구려 생필품이나 사치품, 건강식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바가지 씌우는 것이었다. 인맥이 바닥날 즈음, 문자를 보내온 면목동 제자 혜미. 그녀는 제자를 인정사정없이 매뉴얼대로 끌어내 조직에 가입시키고 잠적한다. 날 좀 빼내달라는 그녀의 고통스런 문자를 씹은 채.

씩씩해서 잘 해낼 거라 믿었던 혜미는 줄어들지 않는 빚과 파탄 난 인간관계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식물인간이 되었다.

‘옛날의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했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다단계사업을 한다’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듯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서 봉한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사랑이란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정의하게 만든 선배가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부재로 존재를 알리려 했던 나를 찾으러 달려와 준 사람, 그것이 호감의 시작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에어콘을 찾아 학교과방 방문을 열었을 때 선배가 자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다.

‘그 날 고마웠어요’ 했더니 ‘아, 그거 형들이 찾으래서 간 거야’

‘대한민국 형들 다 족구하라 그래’

원한다면 함께 자주고도 싶었던 선배였는데 진실은 썼다. 그래서 훗날 입사한 후 회식자리에서 진실게임을 하자고 했을 때 <대한민국 진실 다 족구하라 그래!> 하고 외치고는 장렬하게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그것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대한민국 학교 다 좆 까라 그래‘ 라는 주인공의 대사를 응용한 것이다.)

선배는 방송국 에이디가 되어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무척 설레었지만 용건은 펑크 난 게스트 땜빵이었다. 뚱뚱한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도록 작은 옷을 입고 닥치는 대로 핫도그를 우그적우그적 먹는 게스트. 결국 선배를 위해 뒤로 미루었던 고향 동기 병만이의 장례식에는 참석을 못했다. 어린 시절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너무 꽉 잡아 피가 맺혔던 병만이의 팔을 생각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얼마나 아팠을까.’

 

 

 행운 行雲과 비행운 幸運

높은 이상을 가지고 가랑이 뜯어지게 달리는 요즘의 청소년들.

기껏 자라 학원선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아이들에게 채찍을 가하는 부모들.

점점 더 나쁜 채무자가 되어가는 대학생들,

내가 살기 위해 죄책감 없이 연인과 친구를 이용하는 어른들,

자본주의와 현대화의 그늘에 희생되는 잉여의 인간들,

서로가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되고 생존을 위해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비행운이 비행기의 힘겨운 한숨에 불과한 것처럼 아름다운 삶이란 결국 힘겨운 관념인가.

 

그녀의 소설은 쉽다. 대신 아프다.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의 이유들, 정말 다 족구하라 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받아들고서는 이 제목에서 두 개의 구(句)가 가지는 상관관계는 도대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이렇게 연결시켜놓으니 무척이나 시적이고 낯설지 않은가. 제목에 들어있는 쉼표는 어떤 인생의 큰 획과도 같은 큰 의미가 숨어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책을 읽어보니 이것은 두 개의 독립된 글의 제목이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에서의 대사를 끌어왔다. 그럼 어떤 채소요? 하고 묻는 소년의 질문에 뭐, 양배추쯤 될까? 하는 흐지부지한 그런 식의 대화를 하루키는 좋아한다고 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싶었다나?

바다표범의 키스란 캐나다를 여행하게 되었을 때 바다표범오일 캡슐 대신 생기름을 구입한 이야기이다. 그 비릿한 오일을 퍼먹을 때의 느낌이란 바로 바다표범과 딥키스를 하는 축축한 기분이었다는.

 

이 에세이는 너무 사사하고 소소하여서 단호함이나 비장함 같은 것은 없다. 그렇게 되는 것도 좋고 저렇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식의 마무리 일색이다. 책표지의 소개처럼 이 책을 읽고 ‘인생을 한 뼘 더 즐겁게 사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바다표범의 입술을 상상하게 됐으니 나의 픽션은 한 뼘 늘어난 셈인가.

 

이곳에 올린 글들은 <앙앙>이라는 20대 여성을 겨냥한 잡지에 실린 연재글이다.

20대를 위한 글이어서 그런지 잡문집에 가까울 정도로 사뭇 내용이 가볍고 발랄하다.

<1Q84>를 끝내고 쓴 신작에세이라는데 그다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내가 너무 그에게 높은 수준의 잣대를 들이댄 것일까. 어쨌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인데? 허약한 번역체 탓인지 나는 하루키가 중성의 독일어처럼 느껴졌다.

<양을 둘러싼 모험>, <태엽 감는 새>, <댄스 댄스 댄스>, <상실의 시대>, <1Q84>를 진지하게 읽은 나로서는 편지라든가 일기라든가 에세이에는 통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작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세이를 너무 기대하고 말았다.

 

여담이 되겠지만 나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과 닮은 사람을 잘 떠올리는 편이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용감할뻔함’을 보여주는 개그맨 정태호를 보면 자꾸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된다.

같은 코너에 출연하는 박성광은 안경만 쓰면 경기도지사 김문수인데....하며 그들의 입담을 지켜보곤 한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밝은 성격이나 유머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줄곧 침침하고 어두운 판타지를 구사해온 그였기에 생긴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자꾸 하루키의 말투를 닮아가게 된다.)

 

하루키 스타일의 에세이는

1)타인의 험담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2) 변명이나 자랑을 되도록 하지 않기

3) 시사적인 화제는 가능한 한 피하기의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같은 자신의 에세이를 ‘우롱차만 마시는 독자’를 위해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썼다한다. 어깨에 힘을 빼고 썼으니 볼 때도 힘을 빼고 보아달란다.

 

반면 <올림픽은 시시하다?>는 무척 다행이었다. 그가 세운 에세이의 규칙을 깨고 목소리를 높였으니 말이다. 요지는 올림픽개최지를 아테네로 고정하라는 것이었다. 매번 개최지를 싸고 일어나는 뇌물 스캔들과 필요이상의 개막식, 폐막식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토목공사나 공기오염을 줄여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에 취재차 시드니에 가게 될 일이 있어 참석했다가 올림픽의 생동감과 현장감에 빠져들게 된다. 일본으로 돌아와 티비로 보는 시시한 올림픽에 다시 김이 빠지는 변덕쟁이 무라카미 하루키. 그러나 올림픽의 정신은 제쳐두고 국가의 이해관계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느라 일장기가 올라갔네 올라가지 않았네 같은 꺼리로 여론 몰이하는 편협한 올림픽은 불행하다고 말한다. 다시 삼천포로 빠져 낙천주의자 하루키는 요리와 와인 때문에 시드니를 다시 방문하고 싶어한다. (그의 글 말미는 이렇게 자주 치고 빠진다.)

 

<체형에 대하여>는 러너로써 참가했던 지역의 목욕탕에 갔을 때 그 목욕탕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다부진 근육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일률적인 몸매와 체형들에 대하여 느낀 섬뜩함은 덜 고맙게도 수퍼모델대회가 열리는 지역의 여탕으로 옮아간다. 그 가운데 우연하게 속하게 된 민간인의 당혹스러움에 대하여 선행학습을 시켜준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체형의 다양함이 공존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이 영어식 표현은 한자로는 진퇴양난이나 진퇴유곡쯤이 되겠고 우리나라 말로는 ‘빼도 박도 못한다’ 정도의 속담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 바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어젯밤 내가 그랬죠.”

당신이라면 악마에게 안기겠는가, 바다로 뛰어들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아마, 나는 울다울다 지쳐서 탈수증으로 죽지 않을까요 하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하루키를 만나게 된다면 아보카도가 어려운 것은 아보카도에 관심을 덜 기울였던 탓이고, 아직 마셔보지 않았다는 캬라멜 마끼아또는 마음만 있다면 돈으로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것이고, 순무를 먹고 임신한 소녀의 이야기는 정말 건국신화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고, 주저앉은 맥주캔에 대한 불평은 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에세이를 장악하고 있는 이런 식의 어투는 뭔가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어하게 만듦으로써 관심을 끌려는.

 

책을 다 읽은 나의 느낌은 뭐랄까.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채소와의 키스>를 마친 기분이다.

아, 고추장 어딨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들의 에세이란 소설을 쓰다 남은 글들의 잔반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생선에서 살을 발라먹고 남은 뼈대처럼 상상력은 다 사라지고 생각이나 신념의 뼈대만 남은 것 같은 느낌말이다.하지만 생선뼈에 남아있는 부스러기와 단물만으로도 밥 한 공기 후딱 비우게 되는 기가 막힌 경우가 있다. 에세이의 저력이란 바로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원더보이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이다. 달리기 예찬을 하기로 작정한 책이어서 그런지 표지에는 빨간 코끼리가 운동화를 신고 달리고 있다. 이걸 간접광고로 봐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앞다리에 신겨진 운동화는 나이키와 매우 흡사하다. 달리기의 고통으로 숨이 가빠지고 무게란 고통을 배가시킨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듯 빨갛게 달아오른 코끼리의 생각 없는 눈동자는 우리들의 응원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고통의 순간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가지게 되고 살아있다는 그 감각을 늘 깨운다면 노인이 되지 않을것 같다는 필자의 삶을 따라가 본다.

 

모처럼 날아간 8월의 타이페이. 그가 그 여행에서 얻은 것은 8월의 타이페이는 두 번 다시 올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악한 여행지라 하더라도 너무 덥기 때문에 그 곳에서의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한다. 그 여행은 나흘이면 끝나기에. 죽기 전에 내가 다시 이곳을 올 수 있을까? 라고 묻게 된다면 영혼이 깨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어디에서고 반복한다면 누구의 영혼이라도 깨어있을 것이라는 것! 현명한 조언이다.

 

그가 말하는 비싼 고독.

옛날에는 혼자 있고 싶으면 뒷동산에 훌쩍 올라 사색에 잠기면 되었지만 이제는 산등성이까지 박아놓은 친절한 가로등에 의해 외로움이 숨을 곳을 잃었다. 자신의 고독을 염려하다 그의 오지랖은 ‘그렇다면 가난한 연인들은 어디에서 키스를?’ 에 미친다.

방해받고 숨어서 사색할 곳이 없어지자 결국 그는 사막에서 가장 비싼 고독을 사게 된다.

그리고 사막에서 <고독이란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감정이다.>라는 고독의 정의를 구매한다. 정말 값진 경험인 것이다.@@

 

친정집에 내려가 바닷가 쪽으로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별이 무수히 쏟아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인가가 드문 울퉁불퉁한 시골길에 차를 세우고 라이트를 모조리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 무수한 별들 아래 하늘을 쳐다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를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너무 멋모르고 날뛰며 살고 있구나 하는. 고독과 두려움 앞에 자신을 세워놓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진통제가 될 것이다.

돈이 없어 사막에 가지 못할 때는 가장 간단하게 고독을 살 수 있는 방법.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 쓰자! (좀 더운 고독이 되기는 하겠다.)

 

그가 말하는 추억 또한 별미이다.

 

누군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에 우리가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기댈 곳은 오직 추억뿐이다. 추억으로 우리는 죽음과 맞설 수도 있다. p 161

 

추억은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경험으로 나는 <그리움이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물건으로도 대체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정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추억은 포토샵처럼 턱을 깎거나 다리를 늘리거나 할 수 없다. 보정하는 즉시 그것은 상상이거나 왜곡이 되기 때문이다. 희미해지려는 피사체를 닦고 또 닦으며 우리는 시간과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을 견딜 수 밖에. 하지만 추억은 그 모든 슬픔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만들 수 있는 기억보다는 둘 이상이 만드는 추억을 많이 만들라고 필자는 목에 힘을 준다.

 

내게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p 273

 

‘달리기 전도사’의 임무를 맡은 이상 그는 달리기의 효능과 의의와 긍정적인 면을 최대화시킨다. 다음은 존 로우머라는 마라톤 애호가가 ‘마라톤을 권유하는 이유’이다.

 

달리기는 증오심과 공격 성향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자존심을 키워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자동차는 사라질 것이고 어리석은 사치와 억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다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테니 환경은 보존되고 인종차별은 없어질 것입니다.  p 260

 

글쎄. 달리기가 어리석은 사치와 억압에서 우리를 구원해주고 인종차별까지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리라는 확신은 없지만 자동차가 필수품이 아니던 시절에 우리는 훨씬 건강했었고 욕망에 덜 시달렸었던 것 같다. 두 다리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성역으로 생긴대로의 다리가 고유한 브랜드가 아니었던가. 더 큰 차, 더 좋은 차, 그것으로 인해 남들에게 보여 질 이미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버거운 나에게 필자가 이야기하는 달리기의 매력은 솔직히 멀기는 하다. 다 듣고도 다 보고도 이렇게 덤덤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그가 그렇게 침을 튀며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저렇게 건강해지고 싶은가?’ 하는 눈빛을 보낸단다. 그러나 몸이 생각을 그친 곳에서 상상력도 솟는 것이며 그 곳에서 잠언도 시도 생겨난다는 그의 주장이 솔깃하다. 도를 전하는 심정으로 달리기의 중요성과 그것이 주는 삶에의 의미를 목 놓아 이야기하는 필자의 정신세계는 참으로 착하고 순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가 달리기를 통하여 나누어주고 싶은 감정은, 신념은 이러할 것이다.

 

결승점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만은 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 누구의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적의 인간이다.

 

매일의 결승점을 끝내며 삶의 진정한 의미와 즐거움을 발견한 그의 미소가 예쁘지 않을 수 없다.

강하다, 김연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