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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여름이 간다는 것은 아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간다는 뜻인가 보다. 개학을 이틀 앞둔 팔월 셋째 주는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매미들이 내지르던 함성의 축도 어디론가 이동했고 저 언덕 위의 음대생들은 개강을 앞두고 학교 연습실에 와서 손가락을 풀고 있다. 이런 고요에 바탕을 둔 선율은 선명하게 들려도 물속에서 듣는 듯 졸음을 데리고 오기 마련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놀러갔던 큰댁에서의 오후, 쪽마루와 방 사이의 문지방에 배를 대고 엎드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시어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것을 무슨 낮잠의 신호로 알아먹은 누렁이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옆 눈으로 나를 흘기며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였어’ 하고 추파를 던졌다.
그러곤 우리는, 아니 나와 누렁이는 지탱하고 있던 고개를 가눌 힘을 잃고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각자 배를 대고 있는 각자의 바닥으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 때 우리 주위를 맴돌았던 것은 부지런한 파리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 주위엔 언제나 나비가 날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파리만 쫓고 솜씨 좋게 잠은 붙들어 매던 오후의 공기와 무척 닮아있다.
비행운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 때에 졸면서 가졌던 혼자라는 생각, 날지 못할 거라는 생각,
아마 이 모습인 채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그 침몰의 기분을 너무나 잘 기억해내고 있다. 너무나 고요해지고 있다. 픽션이라기보다는 옆에서 일어나는 가슴 아픈 현실이라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너무나 고요함을 느꼈다.
독립된 내용을 가진 단편집이지만 젊은 작가가 속해있는 또래의 절망은 계속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어지고 있다. 제목이 오히려 별 의미 없이 느껴지고 한 집 건너 또 한 집 건너 차례대로 돌아가며 내가 더 불행해 서글픈 푸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해고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가 생활했던 노조위원, 재개발로 인해 변방으로 밀리고 밀리는 도심의 빈민들, 열심히 일해도 빚만 늘어가는 서민들, 학업이 아닌 생계가 본업이 되는 대학생들. 뉴스에서 보았음직한 기사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루의 축>
산에 놀러갔다가 실족사한 남편을 대신해 온갖 일을 마다않는 기옥은 달라붙는 빈곤을 떼어버릴 수 없다. 기옥에게는 남편이 죽었을 즈음부터 생긴 원형탈모증이 매우 부담이다. 탈모는 나날이 빠르게 진전되어 현재 말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직장에서는 두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직장은 인천공항 화장실.
수 없이 도착하고 출발하는 그 곳에서 그녀에게 비행운이란 중력을 거슬러 힘겹게 상승한 비행기의 한숨처럼 보일뿐이다.
어느 날, 호주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던 외아들이 그만 절도를 저지른다. 달려오는 택배직원을 폭행까지 해 지금 실형을 살고 있다.
추석을 앞둔 오늘, 기본적인 음식을 준비하고 나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아들의 편지를 발견한다.
일을 다 끝내고 공항 벤치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혹은 이 비루한 삶을 단번에 날려줄 시원한 위로 한 방을 기대하며 편지를 뜯는다. “엄마, 사식 좀”
편지를 뒤집어보지만 다섯 글자 외에는 아무 것도 써진 것이 없다. 모두 마다한 명절 당번을 자처하기 위해 파트장을 찾아간다. 정수리를 가려줄 두건도 잊은 채.
<서른>
이십대가 하나의 채무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삼십은 채무의 어떤 결과처럼 보인다는 그녀.
그녀는 J대 불문과에 어렵게 진학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졸업했지만 보습학원 을 전전긍긍하며 다녔다. 나름 인기 있는 선생이었던 그녀는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지만 정 많은 면목동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씁쓸하다. ‘너희들은 자라서....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어느 날,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녀를 떠났던 옛 애인이 전화를 걸어온다.
“나 이제 돈 잘 벌어.” (너만 속아준다면)
나름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그녀는 그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에 못 이겨 한 달에 삼백만원, 천만 원도 벌 수 있다는 직장에 8백만 원 입회비를 내고 합숙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맥을 고객으로 치환시켜야하는 다단계조직이었다.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 이라 이름이 바뀐 시스템은 더 악랄해져있었다.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지인들의 신상정보를 털렸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싸구려 생필품이나 사치품, 건강식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바가지 씌우는 것이었다. 인맥이 바닥날 즈음, 문자를 보내온 면목동 제자 혜미. 그녀는 제자를 인정사정없이 매뉴얼대로 끌어내 조직에 가입시키고 잠적한다. 날 좀 빼내달라는 그녀의 고통스런 문자를 씹은 채.
씩씩해서 잘 해낼 거라 믿었던 혜미는 줄어들지 않는 빚과 파탄 난 인간관계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식물인간이 되었다.
‘옛날의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했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다단계사업을 한다’
그녀는 고해성사를 하듯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서 봉한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사랑이란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정의하게 만든 선배가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부재로 존재를 알리려 했던 나를 찾으러 달려와 준 사람, 그것이 호감의 시작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에어콘을 찾아 학교과방 방문을 열었을 때 선배가 자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다.
‘그 날 고마웠어요’ 했더니 ‘아, 그거 형들이 찾으래서 간 거야’
‘대한민국 형들 다 족구하라 그래’
원한다면 함께 자주고도 싶었던 선배였는데 진실은 썼다. 그래서 훗날 입사한 후 회식자리에서 진실게임을 하자고 했을 때 <대한민국 진실 다 족구하라 그래!> 하고 외치고는 장렬하게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그것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대한민국 학교 다 좆 까라 그래‘ 라는 주인공의 대사를 응용한 것이다.)
선배는 방송국 에이디가 되어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무척 설레었지만 용건은 펑크 난 게스트 땜빵이었다. 뚱뚱한 그녀의 몸매가 드러나도록 작은 옷을 입고 닥치는 대로 핫도그를 우그적우그적 먹는 게스트. 결국 선배를 위해 뒤로 미루었던 고향 동기 병만이의 장례식에는 참석을 못했다. 어린 시절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너무 꽉 잡아 피가 맺혔던 병만이의 팔을 생각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얼마나 아팠을까.’
비행운 飛行雲과 비행운 非幸運
높은 이상을 가지고 가랑이 뜯어지게 달리는 요즘의 청소년들.
기껏 자라 학원선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아이들에게 채찍을 가하는 부모들.
점점 더 나쁜 채무자가 되어가는 대학생들,
내가 살기 위해 죄책감 없이 연인과 친구를 이용하는 어른들,
자본주의와 현대화의 그늘에 희생되는 잉여의 인간들,
서로가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되고 생존을 위해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비행운이 비행기의 힘겨운 한숨에 불과한 것처럼 아름다운 삶이란 결국 힘겨운 관념인가.
그녀의 소설은 쉽다. 대신 아프다.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의 이유들, 정말 다 족구하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