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하나카 양로원 주사主事·가키누마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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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쿠모 가쓰에 씨는 어떨까. 올해 2월 4일에 모로이 사장과 다노우에 군에게 "이제 죽겠어요"라는 전화를 했다. 그때 딸 사나에 씨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가쓰에 씨는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나에 씨는 갖고 있었다.

―모기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시더군요.
어머니의 ‘죽겠다’는 말을 들었다면 사나에 씨는 어떻게 했을까.

꽤 역사가 있어 보이는 가게였다.

오래되었거나 낡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담하고 품위 있는 가게다. 출입구의 자동문 위에 걸려 있는 것은 평범한 간판이 아니라 편액이었다.

"아뇨, 특별히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새 집 인테리어 때문에 미쿠모 씨와는 자주 만나요."

새 집의 인테리어.

이 품위 있는 아버지의 털털한 성격을, 나는 신께 감사했다.

나는 말했다. "가쓰에 씨, ‘파스텔 다케나카’ 분들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때 처음으로 모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미쿠모 사나에 씨와 나는 결국 그 맞은편 카페로 돌아왔다.

그녀는 공격이 최대의 방어라는 듯이 내게는 공격적이고 위압적이었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나도 몇 번이나 말했다. "당신과 어머니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 폐를 끼치고, 걱정을 끼쳤지요."

"인연을 끊고 싶었어요."

"어머님은 납득하셨나요?"
"했어요!"
사나에 씨는 날카롭게 대답하고 불쾌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커피 스푼을 컵에 꽂고 얼굴을 번쩍 들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결혼에 의해 인생의 한때에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동떨어진 유복한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부富’의 힘이 어떤지는 안다. 돈은 사람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큰돈은 사람을 의심 많게 만든다.

"어머나, 그 전화는 내가 한 거예요."

그녀가 어머니 흉내를 낸 것일까.

일단 부자연스럽게 내게서 몸을 떼었다가 다시 몸을 가까이 하며 소곤소곤 말했다. "이대로 입을 다물어 준다면 입막음비를 지불할게요. 얼마나 원해요?"

다시 한 번 가정을 갖는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집을. 앞으로 내게 그런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직, 언젠가 내가 그런 것을 바라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집은 이 사무소다. 이곳이 내가 몸을 기댈 곳, 나의 성역이다.

아줌마들로 시끌벅적하고, 그것도 좋다.

"만에 하나 당신이 지금의 미쿠모 씨와 바깥 세계의 입장에서 얼굴을 마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잊으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잊어도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죗값을 치렀어요. 마음을 정리해도 돼요."

"게다가 사람이 모여서 만든 조직은 아무래도 변화하는 법입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당신 자신도 소중히 해 주세요."

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에 내리던 비가 굵은 눈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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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 재킷은 가격이 꽤 나가죠. 중고도 비싸고."
"빈티지일 경우에는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 아가씨도 역시, 음, 그렇지."

그냥 얼굴이 닮았다는 점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다.

"죄송해요. 잘 생각해 보니까 제가 물어보면 될 일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머나, 프로한테 맡기는 편이 좋아요."

인테리어를 할 때 현관의 미닫이문은 틀부터 시작해 전부 바꿨다. 덕분에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여닫힌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고향에서도 그렇지만, 동네 아주머니는 무적이다.

그러자 다노우에 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아, 미쿠모 씨는 살아 계셨나요?"
"그게 무슨?"
"그때, 102호실을 비운 단계에서는 정말로 돌아가셨는지 어떤지 실은 확실하지 않았거든요. 잠깐만요. 날짜를 좀 확인할게요."

벨트 파우치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조작하기 시작한다.

"집을 정리할 때 다른 세입자들한테는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좋은 얘기도 아니니까요. 다케나카 부인은 그냥 돌아가셨다고 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근데 전 그게 좀 꺼림칙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쓸데없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여기에서는 말해도 괜찮아요."
"미쿠모 씨는, 도망치신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도망쳤다.

"며느리 2호예요."
차남의 부인이라는 뜻이다. 실례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편리한 호칭이었다.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고안자는 야나기 부인이다. 부인의 경우는 다 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지만.

분명히 그렇다. 쓰다 만 편지지 세트. 잉크가 다 떨어진 낡은 만년필. 텅 빈 저금통. 교통 안전 부적. 휴대용 재봉 세트. 종이 달린 네쓰케쌈지나 주머니 따위의 끈에 다는 조그만 세공품. 다리가 휜 돋보기안경. 단행본 사이즈의 천 북커버. 새것인지 얇은 비닐봉지에 들어 있다.

다케나카 며느리 2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없음, 복비 없음, 보증인 없음. 첫 방세는 연금이 들어온 후에 후불로 내도 됨. 게다가 어머님은 당장의 생활비로 쓰시라면서 2만 엔을 빌려주셨어요."

미쿠모 씨, 노숙자가 되기 직전이었거든요―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선생’인지 뭔지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네요. 애인인지 제자인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루아르 강 고성 투어. 언젠가 가고 싶다고, 헤어진 아내와 얘기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가요. 둘 다 백발이 되고 나서.

"그러니까 전화가 온 후 한 달 이상 기다렸다가 102호실을 비운 건, 계약서에 명기된 대로 행한 공정한 수속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혼자 일해서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보낸 건 대단한 일이었겠죠. 지금처럼 복지가 잘되어 있지 않은 시대니까."

‘파스텔’에서 생활이 안정되자 미쿠모 가쓰에 씨는 외로워졌을지도 모른다. 딸이 걱정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실례합니다."

문틈으로 내다본 사람은 긴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이다. 구깃구깃한 트레이닝복 상하의. 자다 일어나 눈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세 달쯤 전부터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생추어리’에도 전혀 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연결이 안 되고. 사나에 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쪽은 미쿠모 사나에 씨의 근무처를 아십니까?"
"그런 개인정보를 알려 드릴 수는 없지요."
딱히 이런 대화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현대의 부동산 관리 회사는 먼 옛날의 공동주택 관리인과는 다르다. 만사에 계약이 우선이고, 위반하면 아웃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스타차일드’는 종교 단체가 아니에요. 교의 같은 건 없어요. 더욱 고차원의 채널링을 하기 위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요, 바깥 사회에서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여기 멤버들처럼 집을 나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지만, 모두 제대로 일을 하고 있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아이도 키우고 있어요."

"고차원의 우주 정령과 교신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세에서의 사명을 가르쳐 준대요."

굉장하네, 하며 감탄한다.

"스기무라 씨는 비관론자로군. 뭐, 당신의 인생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만."

꼭 한마디가 많다.

벨, 북, 링과 캔들.

"벨은 종, 북은 그냥 책이 아니라 ‘더 북’, 즉 성서를 말하는 거고, 캔들은 양초. 이 셋은 마녀를 상징하는 아이템일 거예요."

"책에서 읽었어요. 옛날에 교황이 죄인을 파문할 때 종을 울리고, 불을 켠 양초를 하나하나 끄면서 선고했다는군."

거기에서 유래하여 이 세 단어의 조합이 마녀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부근 사람들이 특별히 차가운 것이 아니다. 숨막히는 지연地緣의 속박을 싫어하는 우리나 그 윗세대가 적극적으로 원해서 만들어 온, 현대 일본의 평범한 지역 사회의 모습이다. 대도시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거의 완성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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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빈티지
윤동주-사랑스런 추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김용의 맏아들로태어났다.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인 열일곱 살 때 최초의 시 <초 한 대>를 썼다.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광명학원 중학부로 다시 편입했다.
1938년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1941년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로 창씨개명하고,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등 훗날 한국인의  애송시가 된 5편의 시를  썼다. 
1943년7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이듬해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받았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큐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는 1871년 후쿠오카현 하카타[博多]에 건립된 근대식 감옥으로 1903년에는 후쿠오카 감옥이었다가 1922년에 후쿠오카 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43년 7월 교토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을 주도하였던 송몽규와 그의 외사촌인 윤동주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들은 각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복역 중 해방을 불과 5~6개월 앞두고 1945년 2월에는 윤동주, 3월에는 송몽규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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