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각을 할까 해. 소용이 없더라도 말이야.

만약 네 앞에 아몬드가 있어.
근데 이게 독이 있는 야생 아몬드인지,
독이 없는 아몬드인지 몰라.
그럼 너는 어떡할 거야?
그 아몬드를 먹어볼 거야?

노래가 들려온 건 제작실 서문 쪽에 있는 반 층짜리 계단 아래였다.

마르코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 순간 노랫소리는 멈췄고 미닫이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소녀가 있었다.

그것이 열다섯, 동갑내기인 소녀와 마르코의 첫 만남이었다.

계단 밑에 마련된, 다섯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세탁된 옷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제작된 클론이 입는 옷이라고 했다.

소녀는 마르코와 같은 용역업체에서 배정된 경비원이었다.

소녀는 마르코가 자신과 같은 업체 소속이고 심지어 입사일이 같다는 것에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고초를 토로했다. 소녀의 이름은 ‘으니’였다.

어리숙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마르코에게 ‘어렵지? 하다보면 노련해질 거야’라고 말이다. 마르코는 그 말이 참 힘이 되었는데, 으니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발바닥에 불나는 거, 아무나 할 수 있잖아."

그날 마르코는 으니의 목소리가 좋았다고, 노랫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으니’가 아니라 ‘은희’라는 건 한참 뒤에야 의주를 통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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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누마 게이코는 아픈 머리에 찬 물수건을 대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쿠부 신스케는 인생의 레이스에서 이기고 있다는, 향기로운 술 같은 승리감에 취해.
노가미 유미와 점장은 자리를 뜨더니 돌아오지 않는 슈지를 걱정하면서―.

그리고 오리구치를 태운 가미야 부자의 코롤라와 오리구치를 뒤쫓는 슈지의 해치백은 제각각 속도를 올리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리구치는 아직 슈지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슈지는 오리구치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시곗바늘은 가차 없이 움직여 갔다. 이날 밤 부쩍부쩍 늘어가는 체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할 기분이 아니야. 상관없잖아.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겐로쿠엔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에 있는 넓이 삼만 평 정도의 일본식 정원. 일본 3대 정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불쌍하게도."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간단한 말을 던진 적은 없었다. 둑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돌멩이는 이리도 소박하고, 이리도 간단한 말이었던 것이다.

게이코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과 함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제는 잡을 수가 없다. 이제는 뒤쫓을 수 없다. 결국은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오리구치 씨는 저 모습을 보여 주려 한 거야. 노리코는 마음속으로 거듭 외쳤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목청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나하고 사쿠라 씨를 위협해서 데려온 거야. 오리구치 씨의 생각이 옳았어.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해.

물은 판자처럼 평평하고 쇠처럼 강하지. 총구를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대고 쏘면, 총구를 다른 물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야.

오리구치 구니오는 6월 3일 오전에 일어난 기다 클리닉 앞에서의 총격전에서 순경이 쏜 총에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해 바로 이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같은 날 오후 두시 삼십이분에 숨을 거두었다.

같은 날, 가미야 나오유키는 오오이 요시히코가 쏜 총에 오른쪽 옆구리에서 가슴에 걸쳐 산탄 다섯 발을 맞고 부상, 이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뒤 가나자와 시내에 있는 외과병원으로 이송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아, 참. <스나크 사냥>이란 이야기 아세요? 이것도 슈지 씨가 해준 이야긴데. 루이스 캐럴이란 사람이 쓴 아주 이상한, 긴 시 같은 건데 스나크라는 것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걸 잡은 사람은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죠. 마치 그림자를 죽이면 자기도 죽는다는 그 무서운 소설처럼.

오리구치 씨는 오오이 요시히코를 죽이려고 했다. 오오이를 ‘괴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총을 들어 그의 머리를 겨누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오리구치 씨 스스로도 괴물이 되었다.

오리구치 씨만이 아니다. 게이코 언니는 부용실 밖에서 총을 들고 있을 때 괴물이 되었다. 내가 그 편지를 쓰면 언니가 와 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오빠의 결혼식이 엉망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괴물이 되었다. 오빠는, 고쿠부 신스케는 언니를 죽이려 했을 때 괴물이 되었다.

슈지 씨는―슈지 씨도 어느 순간엔가 괴물이 되었다.

그래서 괴물을 잡았을 때, 그리고 사건이 끝났을 때 우리도 모두 사라져 버렸거나,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는 피해자끼리 서로 죽이고 상처 입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하더군요.

게이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 어떻게 지내시죠?

또 만날 수 있을 날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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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네와 자네 장모 사이에 끼어 양쪽 체면을 살리면서 양쪽의 희망을 다 들어주고 싶다, 아니 다 들어줘야만 한다. 그런 책임감에 짓눌려 기진맥진한 걸세. 내과적인 문제는 전혀 없어. 몸은 아주 건강해."

남자 형제란 제각각 가정을 꾸미고 나면 이내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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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겐 돈밖에 없잖아. 그런 사람들밖에 접근하지 않아."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이 그따위 인간들 이외에는 불러 모으지 못한다는 사실, 자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기게 만든 사실이 가장 잔인했다.

-피고는 원고의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게이코의 손에 힘이 돌아왔다.
-여자의 호의를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총을 집어들 수가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말보다 행동. 아버지가 예전에 딱 한 번 교훈 삼아 해 준 말씀이었다. 잘 들어라, 슈지. 사람이란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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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지메
옷매무새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허리를 조이는, 오비 안쪽에 두르는 띠

조리
바닥이 평평하고 끈이 달려 발가락에 거는 전통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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