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무 살까지 이 세 곳의 봄 풍경에 안겨 자라났다. 그것은 나의 정서로 되었고 나의 살과 피로 되어버렸다. 봄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려 볼 때 그것은 마치 봄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감성화된 개념으로 되어 나의 가슴 속에 설레인다.
그중의 첫 사람은 내 죽은 선처(先妻)요, 또 한 사람은 오랫동안 불행한 한 방에서 나와 같이 살다가 폐를 앓아 세상을 떠난 T라는 우인이다.
나는 때때로 이들의 환영에서 괴로운 채찍을 머리와 등에 느낀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나의 머리를 구하려고 나는 이들의 환영을 부숴버리려고 안타까워 한다.
T가 내가 있는 방에 처음으로 온 것은 아직도 겨울이 겨우 한고비를 넘어서 추위는 영하 15도를 상하(上下) 하던 때이었다. 그는 관북 명천6) 태생이었으나 오랫동안 국경에 살았고 또 이곳에 오기까지는 원산7) 부두에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주로 파쟁(派爭)8)에 관한 역사. 나는 그것을 직접 몸을 가지고 경험한 그로부터 몇 달을 두고 세세히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의 화인(禍因)9)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자기네들이 무엇이라고 조금만 끄적거리면 그것이 최대의 경계와 조심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옛날의 추잡한 역사의 되풀이가 되기 쉽다는 것. 이리하여 당분간은 이러한 희생(犠牲)이 끊이지 아니하리라는 것-
꽃! 이는 오는 듯 마는 듯 남모르게 찾아오던 봄이 비로소 굳게 닫힌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굶주리었던 욕망이 분류(奔流)와 같이 용솟음칠 때처럼 우리는 젊은 가슴을 이 아름다운 꽃 밑에서 안타깝게 애태웠다. 때때로 꽃은 성적 매력까지를 발휘하는 것 같다.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내가 보석이 된 뒤 그들의 예심이 종결되었을 때 신문에 난 그의 이름 밑에서 나는 사망이란 두 자를 발견하였다.
《조광》, 1938년 4월호
얼마나 자랐을까 내 고향의 라일락 승용차의 뚜뚜 소리에 육중한 흰 대문이 좌우로 열리고 조약돌을 깨무는 소리를 내면서 차대(車臺)가 스르르 굴러 들어간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신사와 숙녀를 떨어뜨리고 그 앞을 빙 돌아 다시 낮은 고동을 뛰- 한 번 울리고는 까만 차대가 언덕진 정원의 구부러진 길을 커브 하면서 대문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지금 고향 떠나 40일, 달을 보며 산산한 바람이 볼을 스칠 때 나는 내 가슴속에 이 뜰을 그려 보며 혼자서 생각하여 보는 것이다.
‘뜰에 심고 온 라일락이 지금은 얼마나 컸는가’ 하고.
《조선일보》, 1935년 5월 15일
네가 봄이런가 나에게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구별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수면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밤마다 뒤숭숭한 몽마의 조롱을 받는 것으로 그날그날의 잠을 때운다.
오월의 산골짜기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18)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갈 때가 되면 산골에서는 노유(老幼)20)를 막론하고 무슨 명절이나처럼 공연히 기꺼웁다. 왜냐면 갈꾼을 위하여 막걸리며, 고등어, 콩나물, 두부에 이팝21) -- 이렇게 별식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여보게 이리와 한잔하게 --" "밥이 따스하니 한술 뜨게유 --" 이렇게 옆 사람을 불러서 같이 음식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예의다. 어떤 사람은 아무개 집의 갈 꺾는다 하면 일부러 찾아와 제목을 당당히 보고 가는 이도 있다.
산골의 음악으로 치면 물소리도 빼지는 못하리라. 쫄쫄 내솟는 샘물 소리도 좋고 또는 촐랑촐랑 흘러내리는 시내도 좋다. 그러나 세차게 콸콸 쏠려내리는 큰내를 대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논에 모를 내는 것도 이맘때다. 시골서는 모를 낼 적이면 새로운 희망이 가득하다. 그들은 즐거운 노래를 불러가며 가을의 수확까지 연상하고 한 포기 한 포기의 모를 심어나간다. 농군에게 있어서 모는 그야말로 그들의 자식과 같이 귀중한 물건이다. 모를 내고나면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한해의 농사를 다 진 듯싶다.
아낙네들도 일꾼에게 밥을 해내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리고 큰 함지에 처담아 이고는 일터에까지 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은 그 함지 끝에 줄레줄레 따라다니며 묵묵히 제목을 요구한다.
산가의 봄 4월 10일(금요일) 산사에서 겨울을 지내고 동구 밖에 조그만 초가를 산 후, 병에 약한 몸을 쉬게 되었다. 이 초가에 오자마자 넓은 뜰 안에 앵두꽃이 만발하였다. 꽃은 적으나 나무에 다닥다닥 붙고 정열적인 붉은 꽃 -- 그 구슬 같은 적은 꽃이 뭉치가 되어 만발한 정원은 꽃세계를 이루었다. 나는 앵두나무 사이를 거닐며 잃어버린 정열이 그리웠다.
호미를 가지고 빈터에 콩을 심고 감자 싹을 심었다.
오월의 구상 여학교 때 자수를 가르치는 선생님 말이, 수를 놓다가 가끔 눈을 들어 파란 잔디밭이나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면 그 푸른 빛이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는 것이었다.
푸른 빛이 보안상(保眼上)에 좋아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지만, 눈의 피로뿐만이 아니라 내가 생각건대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피로를 덜어 주는 편이 또한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속이 상하면 푸른 나무 꼭대기를 바라본다.
복잡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끔 눈을 들어 다른 데를 보며 쉴 필요가 있다.
푸른 오월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집집의 뜰에, 거리의 로터리에, 이 신록 물이 들게 하라! 그리하여 이 푸른 빛을 보는 시민들의 충혈된 눈을 수정처럼 말게 해주라.
1954년 5월
봄이다 봄이다 소리 높여 노래하자 봄이다 봄이다! 하는 단 한마디 말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가? 봄이다 봄이다! 하고, 자꾸 불러 보면 어째서 가슴까지 몸까지 이렇게 들먹거려질까?
봄이다 봄이다! 활개를 힘껏 펴고 소리 높여 노래하라. 그리하여 기운을 키우라. 생명을 키우라.
봄철에 가장 사랑하는 꽃 나는 이런 꽃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좋아합니다.
곱게 피는 꽃이면 모두 좋지만, 봄에 피는 꽃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히아신스와 복사꽃입니다.
흙내 나는 꽃, 시골집 울타리를 생각게 하는 꽃, 순실한 시골 소녀같이 사랑스러운 복사꽃! 나는 이 사랑스러운 꽃이 이 봄에도 어서 피어 주기를 지금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이》, 1926년 4월호
봄은 어느 곳에 벌써부터 신문에는 봄(春)자가 푸득푸득 눈이 뜨인다. 꽃송이가 통통히 불어 오른 온실 화초의 사진까지 박아내서 아직도 겨울 속에 칩거해 있는 인간들에게 인공적으로 봄의 의식(意識)을 주사하려 한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임으로써 빛깔 없이 보낸 지난날이 더욱 그립고 켜졌던 그 시간이 야속하게도 짧았기 때문에 싸늘한 잿무더기에다가 다시 한번 불을 피워 보고 싶은 것이다.
자연은 늙지 않고 내만 늙을 것, 내 늙은 뒤, 마음의 여유를 얻어 오월을 찾으면 그때는 오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며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애드벌룬, 신록 속에 널려있는 아늑한 프롬나드(promenade)가 즐거울 것인지 이는 누구나 보증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원통하기 짝 없다.
《문장》, 1940년 5월
봄과 여자와 봄 웃는 여인 노곤한 센티멘탈
꽃이 무엇에 놀라기나 한 듯이 한꺼번에 와짝 핀다.
름에서 물결치는 치마폭에서 봄의 정(精)이 남실거린다. 비로소 봄을 안 처녀의 볼은 갓 핀 복사꽃잎이다.
봄과 외투와 외투를 입고 다니자니 터분하고 벗어놓고 다니자니 허전한 게 섭섭하다.
외투 요량을 하고 내의를 얇게 입고 나온 것이 한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놈 1원으로 뱃속에 알코올을 부어서 열을 올리었다. 그 덕에 봄나물도 금년에는 꽤 일찍이 맛을 본 셈이다.《혜성》, 1931년 4월호
봄의 현미경적 검사 -조춘(早春)의 가두(街頭)에서 봄이면 전원이라야 하지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서서 춘색(春色)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만 옹색스런 노릇이 아니다. 무릇 생활이 바쁘고 땅이 새뤄 봄의 봄다움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은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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