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천녀: 변재선녀라고도 하며, 불법을 유도하며 장수와 원적의 퇴치, 재물의 증익을 도와주는 여신을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무애(無碍)한 행동으로 불법(佛法)을 유포하여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진다. 그 때문에 민간에서는 변재(辨財)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천녀에 얽힌 설화 두 편이 있다.
사미(沙彌) 지통(智通)에게 까마귀가 와서 하는 말이 "낭지사(朗智師)에게 가서 제자가 되라"라고 하였다. 낭지사에게도 까마귀가 같은 말을 전하여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산의 주인이 변재선녀라고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사위가 어둠으로 차오르자, 오후 내내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청호산의 나무들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몸을 뒤틀었다. 굳게 문을 닫아건 집들의 불이 꺼졌다. 빛이라고는 마을에 드문드문 선 가로등 불빛이 유일했다.

연수의 안전벨트를 챙겼으나 본인은 미처 챙기지 못해 남자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귀신을 본 미주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상한 아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귀신들에게는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나날이 심해지던 괴롭힘은 어느 순간부터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용하다는 무당이나 스님을 만나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났고 영원히 이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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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여신(餘燼)이 마치 미련 질긴 인간처럼 더얼 불러감이 있어 햇살에도 올올이 사늑거리는 매운 입맛이 죄다 가시질 못한 탓이겠다.

가두에서 가장 예민하게 봄을 표현하는 것은 역시 자연보다도 사람 사람의 옷이다. 그중에도 여인의 옷과 옷맵시다.

지금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저 젊은 여인의 저고리 고름이야 참으로 좋지 않으냐!

엷은 연둣빛 저고리가 이 봄빛에 차근히 잘 조화되기도 하지만 왼편 가슴께로 드리운 두 가닥의 저고리 고름은 어쩌면 저다지도 귀엽고 보드랍게 날리는고.

옛 시인은 종일 봄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못 찾고 일모(日暮)51)에 집으로 돌아오니 빈처(貧妻)52)가 나물을 뜯어 저녁상에 올린 것을 보고서 봄이라 했다더니, 약삭빠른 가두의 봄을 현미경 검사를 하고 섰는 나를 꽃장수 일위(一位)53)가 있어 저으기 덜 무료하게 해준다.

"꽃 사시오
봄을 사시오
이 꽃이 지잖어 봄을 사시요
이 봄이 늦잖어 꽃을 사시요."
이렇게 좀 외어 준다면 살풍경스런 이 가두의 춘색이 저으기 윤기도 있고 또 당자도 흥이 나련만.

나는 봄을 대접하여 진달래 한 분 사서 들었다. 아쉬우나마 나는 손에 봄을 든 셈이다.

《조광》, 1938년 4월

봄을 보장한다
동지날 쑨 팥죽이 여태 식었을까 말까 한데(라는 내 엄살도 지독하지만) 편집자는 벌써 봄의 전주곡을 쓰라니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추풍령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만 유명할 뿐이 아니라 기상적(氣象的)으로도 조선을 갖다가 남북 두 동강에 잘라놓는 경계선이란 말야. ……터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편짝 영동(永同)과 저편 짝 황간(黃潤)이 판연히 달라! ……서울서 정월을 갓 쇠고 나서 북악산 바람이 씽씽 불고 한강에서는 한참 제군이 스케이팅을 하는데, 처억 경부선을 잡아타고 내려가다가 영동을 지나 추풍령 터널을 쑥 빠져나간다 치면 차창에 얼었던 성에가 주울줄 녹아내리고 마을에서는 촌 노파가 무릇59)을 이고 팔러 다닌단 말야! 응? 벌써 봄이거든."

하니 만약 내가 저 아라비아의 마호메트61)와 같은 두두룩한 뱃심이 있었더라면
"산아! 일러루 오라!"
하고 부르듯이
"추풍령 저편 짝의 봄아 얼른 일러루 오라!" 또는
"제주도의 봄아 당장에 서울로 오라!"

생각하면 봄이 즐겁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추위가 무섭고 걱정스러 어느 겨를에 올 봄을 미리서 즐길 경황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일변 추위가 무섭고 겨울이 아득할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간절한 법이니 역시 기다리지 않는대서야 거짓말이겠지.

봄아! 어서 오너라?
내 너를 맞이하기 위하여 닷 말 어치의 술과 일곱 말 어치의 떡과 두 마리의 도야지와 한 마리의 소와 그리고 오색 과실을 마련해 놓고 손꼽아 너를 기다리노라.

그때에 가서 만약 봄이 오지 않게 되면 세 켤레의 버선 대신 세 대의 뺨을 맞아도 군소리를 않기로 장담과 다짐을 여기에 두어둔다.

《조광》, 1940년 2월

봄을 맞는다
"봄을 맞는다."
말로만 들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봄을 맞는지 봄이 사람을 맞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다.

"봄은 단술과 같이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렇다. 봄은 우리를 취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술맛은 아니다.
우리의 뇌를 마비시키는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봄을 맞자.
봄은 우리를 맞으라. 우리는 그대를 맞으려고 한다.
‘봄--’
얼마나 좋은 소식이냐.

우리는 그를 그렸거니와 그도 우리를 그렸을 것이다. 젊은이가 젊은이를 그렸을 것이다.
그리던 그 봄이거니 그리던 그를 어찌 기쁨으로써 맞지 않으랴.

《학생》, 1929년 4월

입춘을 맞으며
소한이 지나고 대한도 지나갔다. 이제 이틀 밤만 자면 입춘이다. 대·소한을 앞에 두고는 태산 너머 아득하게 보이던 입춘도 이제는 내일모레다.

봄은 마음에 먼저 왔는가?

아침에 일어나니 책상머리의 잉크가 얼었다. 나는 몹시 추운 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그 추위에 대하는 마음은 긴장되지 않았다.

서리가 뿌옇게 지나간 앞집 초가지붕에 흐르는 맑은 별을 보라. 그 저편에 개인 하늘을 떠이고 얼크러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라. 어디라 없이 봄뜻이 흐른다. 그것은 어떻다고 부족한 나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봄뜻이다.

어디서 언제 날아왔는지 무너진 담머리에 지절거리는 두어 마리 참새 등에도 윤기가 흐른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까지도 앵두 빛 같은 어린애의 입술에 흘러드는 어머니의 젖에 젖은 것 같다.

천지는 이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만물을 키우는 어머니의 품으로 옮기고 있다. 옮기는 소리는 없어도 옮기는 자취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봄의 넋두리
옆집은 기생 초급(初級) 집이라 요즈음 와서 장구를 두드리고 목을 빼는 소리에 모처럼 안순한 시간을 얻어도 산란하여진다.

봄은 심란스럽다. 다만 우울과 권태다. 마치 술을 얼근하게 먹을 때처럼 불그데데한 절후(節候)71)다.

봄을 그리워하였으되 반가운 사람들 만난 때의 서먹거림과 푸대접하는 것처럼 대접이 성스러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그렇다고 이 봄이 분에 넘치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어도 나로서는 지는 꽃잎이 온 얼굴에 뿌려 주는 것처럼 영원한 애수(哀愁)가 떠나지 아니하리라.

1938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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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까지 이 세 곳의 봄 풍경에 안겨 자라났다. 그것은 나의 정서로 되었고 나의 살과 피로 되어버렸다. 봄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려 볼 때 그것은 마치 봄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감성화된 개념으로 되어 나의 가슴 속에 설레인다.

그중의 첫 사람은 내 죽은 선처(先妻)요, 또 한 사람은 오랫동안 불행한 한 방에서 나와 같이 살다가 폐를 앓아 세상을 떠난 T라는 우인이다.

나는 때때로 이들의 환영에서 괴로운 채찍을 머리와 등에 느낀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나의 머리를 구하려고 나는 이들의 환영을 부숴버리려고 안타까워 한다.

T가 내가 있는 방에 처음으로 온 것은 아직도 겨울이 겨우 한고비를 넘어서 추위는 영하 15도를 상하(上下) 하던 때이었다. 그는 관북 명천6) 태생이었으나 오랫동안 국경에 살았고 또 이곳에 오기까지는 원산7) 부두에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주로 파쟁(派爭)8)에 관한 역사. 나는 그것을 직접 몸을 가지고 경험한 그로부터 몇 달을 두고 세세히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의 화인(禍因)9)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자기네들이 무엇이라고 조금만 끄적거리면 그것이 최대의 경계와 조심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옛날의 추잡한 역사의 되풀이가 되기 쉽다는 것. 이리하여 당분간은 이러한 희생(犠牲)이 끊이지 아니하리라는 것-

꽃! 이는 오는 듯 마는 듯 남모르게 찾아오던 봄이 비로소 굳게 닫힌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굶주리었던 욕망이 분류(奔流)와 같이 용솟음칠 때처럼 우리는 젊은 가슴을 이 아름다운 꽃 밑에서 안타깝게 애태웠다. 때때로 꽃은 성적 매력까지를 발휘하는 것 같다.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내가 보석이 된 뒤 그들의 예심이 종결되었을 때 신문에 난 그의 이름 밑에서 나는 사망이란 두 자를 발견하였다.

《조광》, 1938년 4월호

얼마나 자랐을까 내 고향의 라일락
 승용차의 뚜뚜 소리에 육중한 흰 대문이 좌우로 열리고 조약돌을 깨무는 소리를 내면서 차대(車臺)가 스르르 굴러 들어간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신사와 숙녀를 떨어뜨리고 그 앞을 빙 돌아 다시 낮은 고동을 뛰- 한 번 울리고는 까만 차대가 언덕진 정원의 구부러진 길을 커브 하면서 대문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지금 고향 떠나 40일, 달을 보며 산산한 바람이 볼을 스칠 때 나는 내 가슴속에 이 뜰을 그려 보며 혼자서 생각하여 보는 것이다.

‘뜰에 심고 온 라일락이 지금은 얼마나 컸는가’ 하고.

《조선일보》, 1935년 5월 15일

네가 봄이런가
 나에게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구별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수면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밤마다 뒤숭숭한 몽마의 조롱을 받는 것으로 그날그날의 잠을 때운다.

오월의 산골짜기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18)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갈 때가 되면 산골에서는 노유(老幼)20)를 막론하고 무슨 명절이나처럼 공연히 기꺼웁다. 왜냐면 갈꾼을 위하여 막걸리며, 고등어, 콩나물, 두부에 이팝21) -- 이렇게 별식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여보게 이리와 한잔하게 --"
"밥이 따스하니 한술 뜨게유 --"
이렇게 옆 사람을 불러서 같이 음식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예의다. 어떤 사람은 아무개 집의 갈 꺾는다 하면 일부러 찾아와 제목을 당당히 보고 가는 이도 있다.

산골의 음악으로 치면 물소리도 빼지는 못하리라. 쫄쫄 내솟는 샘물 소리도 좋고 또는 촐랑촐랑 흘러내리는 시내도 좋다. 그러나 세차게 콸콸 쏠려내리는 큰내를 대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논에 모를 내는 것도 이맘때다. 시골서는 모를 낼 적이면 새로운 희망이 가득하다. 그들은 즐거운 노래를 불러가며 가을의 수확까지 연상하고 한 포기 한 포기의 모를 심어나간다. 농군에게 있어서 모는 그야말로 그들의 자식과 같이 귀중한 물건이다. 모를 내고나면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한해의 농사를 다 진 듯싶다.

아낙네들도 일꾼에게 밥을 해내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리고 큰 함지에 처담아 이고는 일터에까지 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은 그 함지 끝에 줄레줄레 따라다니며 묵묵히 제목을 요구한다.

산가의 봄
4월 10일(금요일)
산사에서 겨울을 지내고 동구 밖에 조그만 초가를 산 후, 병에 약한 몸을 쉬게 되었다. 이 초가에 오자마자 넓은 뜰 안에 앵두꽃이 만발하였다. 꽃은 적으나 나무에 다닥다닥 붙고 정열적인 붉은 꽃 -- 그 구슬 같은 적은 꽃이 뭉치가 되어 만발한 정원은 꽃세계를 이루었다. 나는 앵두나무 사이를 거닐며 잃어버린 정열이 그리웠다.

 호미를 가지고 빈터에 콩을 심고 감자 싹을 심었다.

오월의 구상
 여학교 때 자수를 가르치는 선생님 말이, 수를 놓다가 가끔 눈을 들어 파란 잔디밭이나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면 그 푸른 빛이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는 것이었다.

푸른 빛이 보안상(保眼上)에 좋아 눈의 피로를 덜어 준다지만, 눈의 피로뿐만이 아니라 내가 생각건대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피로를 덜어 주는 편이 또한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속이 상하면 푸른 나무 꼭대기를 바라본다.

복잡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끔 눈을 들어 다른 데를 보며 쉴 필요가 있다.

푸른 오월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집집의 뜰에, 거리의 로터리에, 이 신록 물이 들게 하라! 그리하여 이 푸른 빛을 보는 시민들의 충혈된 눈을 수정처럼 말게 해주라.

1954년 5월

봄이다 봄이다 소리 높여 노래하자
봄이다 봄이다! 하는 단 한마디 말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가? 봄이다 봄이다! 하고, 자꾸 불러 보면 어째서 가슴까지 몸까지 이렇게 들먹거려질까?

봄이다 봄이다! 활개를 힘껏 펴고 소리 높여 노래하라. 그리하여 기운을 키우라. 생명을 키우라.

봄철에 가장 사랑하는 꽃
나는 이런 꽃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좋아합니다.

곱게 피는 꽃이면 모두 좋지만, 봄에 피는 꽃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히아신스와 복사꽃입니다.

흙내 나는 꽃, 시골집 울타리를 생각게 하는 꽃, 순실한 시골 소녀같이 사랑스러운 복사꽃! 나는 이 사랑스러운 꽃이 이 봄에도 어서 피어 주기를 지금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이》, 1926년 4월호

봄은 어느 곳에
벌써부터 신문에는 봄(春)자가 푸득푸득 눈이 뜨인다. 꽃송이가 통통히 불어 오른 온실 화초의 사진까지 박아내서 아직도 겨울 속에 칩거해 있는 인간들에게 인공적으로 봄의 의식(意識)을 주사하려 한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임으로써 빛깔 없이 보낸 지난날이 더욱 그립고 켜졌던 그 시간이 야속하게도 짧았기 때문에 싸늘한 잿무더기에다가 다시 한번 불을 피워 보고 싶은 것이다.

자연은 늙지 않고 내만 늙을 것, 내 늙은 뒤, 마음의 여유를 얻어 오월을 찾으면 그때는 오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며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애드벌룬, 신록 속에 널려있는 아늑한 프롬나드(promenade)가 즐거울 것인지 이는 누구나 보증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원통하기 짝 없다.

《문장》, 1940년 5월

봄과 여자와
 봄
 웃는 여인
 노곤한 센티멘탈

꽃이 무엇에 놀라기나 한 듯이 한꺼번에 와짝 핀다.

름에서 물결치는 치마폭에서 봄의 정(精)이 남실거린다. 비로소 봄을 안 처녀의 볼은 갓 핀 복사꽃잎이다.

봄과 외투와
 외투를 입고 다니자니 터분하고 벗어놓고 다니자니 허전한 게 섭섭하다.

외투 요량을 하고 내의를 얇게 입고 나온 것이 한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놈 1원으로 뱃속에 알코올을 부어서 열을 올리었다. 그 덕에 봄나물도 금년에는 꽤 일찍이 맛을 본 셈이다.《혜성》, 1931년 4월호

봄의 현미경적 검사
-조춘(早春)의 가두(街頭)에서
 봄이면 전원이라야 하지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서서 춘색(春色)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만 옹색스런 노릇이 아니다. 무릇 생활이 바쁘고 땅이 새뤄 봄의 봄다움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은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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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긴 봄날의 소품˝을 읽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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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솔
나는 언제부터인가 솔을 좋아한다. 아마 썩 어려서부터인가 짐작된다. 봄만 되면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것은 내가 여섯 살인가 되어 어머니와 같이 뒷산 솔밭에 올라 누렇게 황금빛 나는 솔가래기를 긁던 것이다. 때인즉 봄이었던가 싶으다. 온 산에 송림이 울창하였고 흐뭇한 냄새를 피우는 솔가래기가 발이 빠질 지경쯤 푹 쌓여 있었다. 솔은 전년 겨울 난 잎을 이 봄에 죄다 떨구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 모녀는 부스럭부스럭 솔가래기를 긁어모았다.

배만 고프면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서 못 견디게 졸라대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딱하여서 나를 어르고 달래다 못해서 나의 뺨을 찰싹 때리면, 나는 죽는 듯이 울었고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나를 업으시고 소나무에 기대어서 한참씩이나 우두커니 섰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솔은 본래부터 그 근성이 결백하여서 시커먼 진흙땅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간도에서는 한 그루의 솔을 대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한다. 언제 보아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준령에 까맣게 무리를 지었고 하늘의 영기를 혼자 맛보고 있으며 또한 눈빛같이 흰 사장을 끼고 이쁘게 몸매를 가지지 않았나.

솔은 장미처럼 요염한 꽃을 피울 줄도 모르며 화려한 향취를 뿌려 오고가는 뭇 나비들을 부를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며 그만큼 그는 적적한 편이라 할 것이다.

봄을 맞는 우리집 창문
여기는 아직도 백설(白雪)이 분분(粉粉)하여 봄의 기분이란 용이히 맛볼 수가 없다. 그러나 모질게 몰아치는 그 바람에는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눈송이에도 여인의 바쁜 숨결 같은 것을 내 볼 위에 흐뭇이 느끼게 됨은 봄이 오는 자취가 아닐까.

‘이리 온, 내 쌀 한 줌 줄게.’
내 입에서는 부지중에 이런 말이 나오려고 옴씰옴씰한다. 새들은 내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지에서 가지에로 오르내리며 재재거리고 있다.

그 갸웃거리는 조그만 목에는 누가 저리도 희고 부드러운 목도리는 해주었을까. 어느 산기슭에서 포근히 잠들었을 때 그 위로 살살 감돌던 안개란 놈이 그들의 따뜻한 목에 감긴 게지.

나는 문득 창문을 보았다.
"한 푼 줍쇼."
어린 거지가 창문 밖에 서서 나를 보고 머리를 수굿거린다. 그 보기 싫게 조은 머리며 때가 끼인 얼굴, 남루한 옷 주제, 나는 무의식 간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어서 속히 쫓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 한 푼을 꺼내 내쳐 주었다.

 "고맙습니다."

진달래
꽃을 여자에게 비한다면, 진달래는 이미 춘정을 잊은 스무고개는 훨씬 넘어선 여인 같으면서도 또 정숙하여 보입니다. 그리고 확호한 인생관이 유행이라는 데는 눈도 뜰 줄 모르는, 그리하여 속세의 풍정과는 높이 담을 쌓은 점잖음이 속속들이 깃들여 있어 보입니다.

봄이면 그리운 진달래입니다. 해마다 한식절(寒食節)이면 선조의 선영(先瑩)으로 성묘를 가서 그 산속에 핀 진달래꽃을 따 먹어 보며 노닐던 어린 날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진실로 한 잔 술에다가 진달래 꽃잎을 마음껏 따 넣어 실컷 마셔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을 새빨갛게 물들여 진달래 마음이 되어 보고 싶습니다.

봄이면 생각나는 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에 걸쳐 많은 눈이 내렸다. 벌써 입춘까지 지났으니 지금을 겨울이랄 수는 없고 봄을 위하여 글쓰기고 이번이 두 번 차이니 지금은 영락없는 봄이요 나의 마음도 벌써 봄을 안은 지 오래다. 그러므로 밖에는 흰 눈이 퍼붓고 있건만 책상에 마주 앉아 ‘봄이면 생각나는 곳 혹은 사람’을 기록하고 있는데 아무런 감정의 저어(齟齬)4)도 느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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