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과 관련된 전설이 살아 숨쉬다

"옛날 옛적에, 산에 약초를 캐러 간 젊은이가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는 여인의 뒤를 밟았다가 그 여인이 곰으로 변해 사슴을 때려잡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이 곰과 결혼했음을 깨닫고 도망치던 젊은이는 뒤쫓아 오는 곰에게 잡히기 직전, 금강 변에 이르러 물에 뛰어들었다. 곰도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치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고마나루(곰나루)라 불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전해지는 ‘고마나루 전설’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흑백 텔레비전에 나오던 「전설의 고향」으로 처음 접했다.

하지만 그 현장인 공주 고마나루에 가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잘하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심이 얕고 물결이 잔잔한 강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 곰은 헤엄을 잘 친다!

『택리지』는 서울을 수도로 삼은 나라라면 자연히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도가 제2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준다. 백제든,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약초 캐던 젊은이가 암곰의 품에 안기듯 이곳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날이 왔다.

두 사찰에는 공교롭게도 항일운동과 관련되어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도 있다. 먼저 갑사는 기허당 영규靈圭대사가 도를 닦던 곳인데,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을 일으키고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 한 사람은 백범 김구다. 그는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한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에 따라 감형된 뒤 1898년에 탈옥했다. 그리고 몸을 숨긴 곳이 바로 공주 마곡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받고는 1 년 동안 승려로 살았다.

김구가 공주의 품에 숨어들기 약 4년 전, 1894년 말에는 공주 땅에서 비극이 있었다. 바로 우금치전투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2만 명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무참한 학살이었다. 지금 우금치를 가보면 제법 가파른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동학군은 고개 아래에서 위로 달려 올라갔고, 일본군과 관군은 고개 위에서 그들에게 기관총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농민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지 탈취를 시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 전투로서 가장 처절하고 처참했던 나흘간의 전투는 동학군의 완전 궤멸과 동학농민운동의 종식으로 끝났다. 지금은 그런 피와 눈물, 울분, 절망과 원한은 간 곳 없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 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만이 조용히 서 있다.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커진다면 공주, 청주, 천안 등도 하나의 ‘수도권’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명을 향한 젊은이의 그리움과 사랑과 안식에 목말랐던 곰의 염원, 잃어버린 왕도의 꿈과 한이 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전근대 한반도 최고 교통의 요지

천안삼거리 흥 /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 휘늘어졌고나 흥

에루화 에루화 흥 / 성화가 났구나 흥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민요인 「천안삼거리」다. 그 첫 연에 나오는 버드나무는 오늘날 천안시의 시목이 되었다. ‘천안’ 하면 곧 버드나무를 떠올릴 정도다. 강릉의 소나무에 비해 버드나무는 유연하고 관능적인 이미지가 뚜렷하다. 나무 자체가 제멋에 겨워 휘늘어진 듯,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휘 구불거린다. 예부터 길가에 많이 심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스쳐가며 잎을 따서 짐짓 우물물 뜬 바가지에 띄워도 보고, 잎을 솜씨 있게 잘라서 버들피리도 불어보며 희롱하는 소재도 된다. 화류계, 노류장화라는 말에서 버드나무 류柳가 나오듯 깊은 산속 고고히 서서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와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있다.

조선 후기에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동도솔과 서도솔을 합쳐 천안부를 만들었다는데, 『삼국사기』에 그런 지명은 없다"며 다섯 용은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대신 지리적 장점이 천안을 만들었을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936년에 왕건은 그동안 천안에서 조련한 군사와 개경에서 끌고 내려온 군사를 합쳐,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출정하여 일리천(경북 선산)에서 신검의 후백제군과 맞붙어 이겼다. 후삼국 시대를 끝맺는 전투였다.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 김남주, 「길」 중

길.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스쳐가고, 부딪치고, 웃고 울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태적 공간이다. 한반도에서 천안만큼 길의 의미를 짙게 머금은 도시는 없다. 그 도시의 내일, 그 도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떤 영광과 아쉬움이,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깃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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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감이 익을 무렵 사랑도 익어가리라
아아 아아 우리의 서울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
- 이용, 「서울」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 한 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대여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오오오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 조용필, 「서울 서울 서울」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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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부터 강남 개발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논밭 아니면 황무지였던 곳이 닦이고, 포장되고, 파헤쳐져서, 아파트와 빌딩이 올라가는 신시가지로 바뀐다. 왜 박정희는 강남을 개발했을까? 정권 자체가 투기를 했다는 시각이 있다. 개발의 결과로 땅값이 천문학적으로 오르자(10년 사이에 약 200배가 올랐다고 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리 사둔 강남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권에 가까운 사람들은 사전 정보를 이용해 투기에 뛰어들 수 있었으므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더욱 높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직후부터 정부 고위층이나 서울시장 등과 서울을 발전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그때 이미 지금의 잠실 쪽에 대규모 체육 시설을 지어 올림픽대회를 유치한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규모를 확대하고, 앞서 본 영등포 권역의 테마별 개발처럼 강남 권역에서도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영등포보다 더 백지에 가까웠던 만큼 상업 지구와 중산층 주거 지구로서의 특화 개발이 더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강북 도심에 모조리 모여 있던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 기능들을 한강 남쪽으로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본의 아니게 대구가 보수의 본거지가 되고, 광주는 진보의 본거지가 되었다면 서울 강남은 자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한동안 김영삼 계열의 야당을 밀었다. 그러다가 1990 년 3당 합당으로 구 권위주의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보수 야당 세력이 합쳐지자, 내내 그쪽만 밀고 있다. 강남 주민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우려한다.

대대로 이어져 온 물 많은 고을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뒤바뀐 도시들이 많은데 수원은 의외로 일관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이는 이름은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며, 백제로 넘어가서 모수성이 된 다음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의 백제 땅들을 빼앗을 때 고구려로 넘어가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모수’는 ‘벌(들판)의 물’이며, ‘매홀’은 ‘물의 벌’이라 사실상 같은 뜻이다. 결국 ‘수원水原(물의 벌)’이라는 뜻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으니(신라 경덕왕은 수성水城, 왕건은 수주水州라 하여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물 많은 고을이라는 뜻은 이어진 셈이다) 한국사에서는 매우 진귀한 예다. 지금 봐도 수원 경내에는 호수가 2곳, 저수지가 5곳이라 물이 많은 도시다운데 과거에는 더했던 것일까?

1592년 6월에는 광교산 자락(용인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삼도근왕군 수만 명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불과 1600여 명의 왜군에 참패했다. 총 병력만 많았지 조율이 안 되는 여러 지방의 병력들을 엉성하게 지휘하다 빚은 참사였다. 하지만 그해 12월에는 지금의 오산시에 속하는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전라도에서 끌고 온 병력으로 맞서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1637년, 이번에는 광교산 자락에 북쪽 군대가 몰려왔다. 전라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병 3000여 명이 슈무루 양구리가 이끄는 2만 명 이상의 청나라 군대를 효과적으로 기습, 양구리를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왜란의 광교산전투가 왜란 전체의 최대 패배 중 하나였다면, 호란의 광교산전투는 최대의 승리 중 하나였다. 그처럼 명암이 갈린 이유에는 지휘관의 역량과 지형의 활용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왜란 때는 각지에서 올라온 군대가 서로 부대끼며 혼란스러웠던 반면, 호란 때는 수원 주둔군과 수원 현지 민병들이 한 몸이 되어 싸웠다는 점이 가장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정조, 화성을 꿈꾸다

1793년에 수원부를 화성華城이라 바꾸고 부사보다 등급이 높은 유수가 책임을 맡도록 했다. 초대 화성 유수에 그가 가장 신임하던 재상인 채제공을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화성 건축을 시작했다.

화성이 곧 실학이다
수원 화성은 ‘실학’이라 불리는 당시의 학술과 문화의 상징이자 집대성이다.
화성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서양에 비해 동양은 체계적이지 않다거나 뜬구름 잡는다거나 주먹구구식으로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하지만 세계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체계성과 주도면밀함이 수원 화성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사실적인 것을 중시하고, 구체적이며 정밀한 해답을 찾는 실사구시 정신이 유감없이 구현된 것이다.

화성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기도 하다. 화성은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평지성이다. 평지성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거액을 들여 수십 미터 높이의 견고한 성벽과 넓고 깊은 해자를 파지 않는 한 방어에 취약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산악이라 하는 자연의 방벽을 활용한 산성 중심으로 성을 방위해 왔다. 왜란 때 한양도성과 같은 평지성은 방어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화성은 평지성이면서도 방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했다. 치성과 돈대, 적대를 요소마다 배치해 적의 이동을 여러 각도에서 감시하고, 입체적인 사격으로 적이 성벽을 뚫지 못하게 한 점은 중국의 성곽 기술을 본뜬 것이다. 암문을 마련해 적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 병력을 이동할 수 있게 한 점은 전통 산성 기술을 쓴 것이다. 그 밖에도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쌓던 전통적 방식 대신 벽돌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적이 화포나 공성 도구를 쓸 때 더 잘 버티도록 하고,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면서 성벽의 경사나 누대의 각도 등을 치밀하게 조정해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쓸모가 있다면 중국의 기술이든 일본의 기술이든 갖다 쓰면서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꾀한 것이다. 이것이 이용후생 아닌가.

화성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왜 멀쩡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고, 매년 대대적인 능행을 하고, 도시를 새로 만들면서 평지성을 쌓는단 말인가? 오직 효심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기존의 묘소를 더 크고 화려하게 개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랬다면 그만큼 비용도 더 적게 들지 않았을까? 경기 남부의 방위를 더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면 독성산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급기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이 대단치 않은 예법 문제 따위에 얽혀 힘을 못 썼다. 힘없는 백성들은 세도가들의 착취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갔다. 세도가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누가 이들을 억누르고, 국가와 백성에게 활력을 찾아주겠는가?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나라와 온 생명의 주재자)이라 자임하며 ‘조선판 계몽 전제군주’를 꿈꾸고 있었다. 폐단이 누적된 한양에서는 그 꿈을 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듯, 루이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듯, 정조는 화성을 세웠던 것이다. 당파 싸움과 불요불급한 정치 논쟁에서 탈출해, 나라와 백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를 펴기 위해선 새롭고도 완벽한 무대가 필요했다. 그는 화성을 튼튼하고 실용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1949년 수원에 일제의 농사 시험장을 개편한 농업기술원이 들어섰다. 이는 훗날 농촌진흥청이 되었고, 2000년대에 수도권 행정기관들을 각 지방으로 분산시킬 때 전주로 내려가기 전까지 수원에 자리했다. 또한 일제 때 수원으로 옮겨진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되었다가 2000년대에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올라갔다.

20명 이상이 사망한 이 만행은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자이자 의학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가 쓴 『끌 수 없는 불』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정조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과인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중심을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오히려 혜택이 되도록 애쓰며 그리했느니라. 결국 도시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웅장한 건물의 것도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더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수원의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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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넘게 외국인들의 땅으로 한국인은 쉽게 들어가 보지도 못하며 서울 교통망의 맥을 끊어온 미군기지의 반환이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미8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 등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한미연합사와 일부 미군부대만 남아 있으며, 완전히 이전이 끝난 뒤에는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 집값의 가파른 상승이 공급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공원 대신 아파트를 짓자는 말이 나오고,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 국방부 자리에 집무실을 마련함으로써 혼란이 이는 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서울 한복판의 풍광 좋은 이 권역이 군부대와 묘지, 유흥시설 등에 오래 매여 있었던 셈이다.

서재필을 비롯한 독립협회는 360년이 지난 1897년에 이 영은문을 헐고 두 기둥만 남겼다. 그리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모화관은 독립문으로 바꾸었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김가진이 썼다고 하나,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설도 꾸준하다. 당시 이완용도 독립협회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심지어 독립 건립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독립협회와 급진 개화파 구성원들은 대체로 반청친일의 입장을 띠고 있었다. 사실 독립도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근대 주권국가로서 독립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 제1조가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 일번지를 이렇게 갈아엎은 것이다.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세워졌는데, 사실상 의병 감옥이었다. 을사조약으로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병을 붙잡아서 가두고 고문할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연창수가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근대 한국 최초의 정치범 처형이었다) 국권 상실까지 수십 명의 의병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서대문형무소 내부는 이미 대한제국의 주권이 털끝만큼도 미치지 않는, ‘먼저 온 일제강점기’였다.

일제 내내 상황은 비슷했다. 김구, 손병희, 한용운, 여운형 등이 이곳을 거쳤고 유관순, 강우규 등은 이곳에서 죽었다. 강우규는 처형, 유관순은 옥사였다. 안창호도 고난의 수감 생활로 병이 생겨 출옥 후 사망했다. 김구는 "옥사 면적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수용되어, 발 뻗을 틈조차 없었다. 자다가 몸이라도 뒤척이면 옆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라고 회상한다.

해방 뒤에도 서대문형무소는 정치범들을 억압하기 위한 공간으로 종종 활용되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이승만과 겨루기도 했던 조봉암이 1959년에 여기서 처형되었다. 이유는 ‘평화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북괴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정권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똑같은 사법 살인은 1975년에도 있었다. 유신정권은 제2 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32명을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그중 8명을 이곳에서 죽였다.

리영희, 문익환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들도 이곳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곳의 열악한 환경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지, 리영희는 "몸을 간신히 누일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관 속에 들어간 듯했다. 화장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어야 했기에, 구더기들이 음식 위로 우글거렸다"라고 썼다.

1978년 그 하중도인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하고 1993년까지 서울과 그 인근 도시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이곳에 매립함으로써 ‘피라미드의 33배 규모’라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제 못지않게, 해방 뒤에도 이 권역에 대한 대접이 험했던 셈이다.

본래는 난초와 지초가 아름답게 피어서 난지도라 불렸으며 유원지로 활용되던 난지도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섬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곳을 포장하고 치장해서 ‘월드컵공원’을 조성하기는 했다. 그래도 한동안 봄철이면 오물 냄새가 인근에 퍼졌으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이 건강을 해치니 절대 놀러 가면 안 된다는 ‘도시 괴담’이 아직도 있다.

1409년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안암동에 터를 잡았다가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 정릉貞陵이 되었다. 당시의 임금은 태종으로, 그는 계모이며 정적이었던 그녀에게 뒤끝이 있었다. 그래서 유지 보수를 전혀 하지 않았을뿐더러 청계천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고쳐 깎아서 새 돌다리를 만들도록 하는 등 파손에 앞장섰다. 이후 무슨 잡초만 만발한 언덕배기처럼 방치되었다가 1669년 이후 겨우 손질을 해서 오늘에 이른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泰陵도 여기에 있다. 두 여성 모두 성격이 강했고 정치적 센스가 뛰어났다. 신덕왕후는 태종 이방원과의 정쟁에서 패배했으나 문정왕후는 승리해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여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음이 차이랄까.

이곳은 독재정권에 맞선 학생운동의 진원지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 권역에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4월 18일에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다 동원된 폭력배들에게 피습되었다. 이 일이 서울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게끔 촉발했다. 이를 감안했는지 1962 년에 성북구 수유동에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희생자 묘지가 건립되었다. 이 권역에는 고려대 외에 국민대, 한성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등 대학교가 많으며 종로 - 중구 권역의 성균관대와도 가깝다. 서대문 권역의 신촌 같은 대학촌은 없으나 서울에서 가장 대학생들이 많은 권역 중 하나다.

지금은 재벌 1세대만이 그곳에서 계속 살며 그 후계자들은 강남 등지로 나가서 살짝 시대에 뒤져 가는 감이 있으나 아직도 최고 부촌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비슷하게 개발되어 부촌 대열에 들었으나 이후 부동산 개발 대책이 꼬이면서 철거된 집터만 잔뜩 남아 을씨년스러워진 장위동 같은 곳도 있다.

1970년,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이 이런 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동대문구청에, 나중에는 노동청에 진정을 넣고 대통령에게까지 탄원서를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결국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불사른 다음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결코 과격하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이 요구가 무시되던 현실은 그의 젊은 생명을 태움으로써 비로소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가 분신했던 청계천로 274번지에 그의 동상이 서 있으며, 기념관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동대문시장은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패션·의류·주얼리에 중점을 둔 복합 쇼핑몰들이 들어서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생겨 패션 디자인의 메카로 거듭나 있다.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며 입영 열차를 타러 가는 신병들이나, 경주 등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들의 새 출발을 수없이 많이 지켜본 청량리역이다.

고려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낙성대(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나 폐허처럼 된 것을 거의 통째로 새로 지었다)와 국립현충원은 모두 북쪽의 침략에 맞서서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호국 정신을 강조하고 현창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학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 - 통합한 것은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의 모두가 탐하는 땅

"이럴 줄 알았으면, 빚내서 강남에 집을 사두는 건데!"

현대 한국인의 흔한 푸념이다. 문제는 이 말을 10년 전에도, 20 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흔히 들었다는 것이랄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말이 아예 나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강남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아서라기보다, 빚을 져서 살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기에) 점이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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