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처럼 넓은 못에는 조각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물을 어찌 건널꼬.
아내의 입속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
강아지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저 강아지만 따라가면 된다고 했거늘!
아내는 용기를 내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옛사람들의 소박한 삶 속에 깃든 꿈과 소망, 슬픔과 그리움, 열망 들은 지금 이곳, 우리들의 삶에도 웅숭깊게 배어 있다. 그것이 생로병사로 조건 지어진 우리의 삶이 부박하기만 하거나 단색 판화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는데……. 그렇게 되었다지 뭐야……. 끝없는 이야기, 이야기들.

이야기들을 교훈이나 풍자, 해학, 한恨 등의 단어로 분석하고 풀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고 그다지 의미 있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명은 유한해도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생은 저마다 고유하게 빚어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승해지는 이즈음 앞서 살아간 사람들, 그들의 시대와 세상이 한결 애틋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삶을 찬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다. 누나인 윤옥과 남동생 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새며 나이에 비해 헌칠하고 늘씬한 체격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윤호 역시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불과 세 살 위였지만 윤옥은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다. 윤옥은 일하러 나가면서 가끔 윤호에게 ‘오늘은 강가에 나가 놀지 말라’거나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군가 강물에 빠지거나 산에서 뱀에 물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너를 삼 년 동안 이대로 놓아두겠다. 삼 년 후 돌아와 다시 살려내겠다."

윤옥은 죽은 동생을 깨끗이 씻겨 잠재우듯 이불 속에 곱게 눕혔다. 그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댕기머리를 올려 무명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영락없이 총각의 모습이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간단한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죽은 자여 살아나라. 혼 입고 몸 입고 돌아오라.)"

그러자 궤가 스르르 열렸다. 궤 안에는 빨간꽃 하얀꽃 노란꽃 세 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이랍니다. 빨간꽃은 살살이꽃, 흰꽃은 뼈살이꽃, 노란꽃은 숨살이꽃입니다."

아내는 윤옥이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재빨리 궤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궤는 언제 열렸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닫혔다.

"누님, 제가 아주 오래 잠을 잤지요?"

"이제 내가 살던 대감 집으로 떠나거라. 너는 이제부터 그 집의 사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는 이렇게 똑같이 닮았으니 그 집에서도 네가 나인 줄 알 것이다. 부디 잘살거라. 그러나 내외간의 정에만 매여 혼자 남은 이 누이를 잊으면 안 된다. 내년 이날, 복숭아꽃이 필 때 꼭 날 보러 오너라. 나는 널 보듯이 네 옷을 지으면서 기다리마."

때는 봄이었다. 마당 귀퉁이, 해묵은 복숭아나무 가지에는 분홍빛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봄날, 아내와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던 윤호는 연못물에 하르르하르르 떨어져내리는 복숭아 꽃잎을 보며 문득 까닭 모르게 찌르르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애달픈 연분홍빛이 그대로 마음에 물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무렵, 절에서 새벽 예불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윤옥이, 앉은 자리에서 구렁이가 되어 방고래 속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강원도 시골 마을에 아들 삼형제를 둔 부부가 살았다. 비록 살림은 넉넉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예쁜 딸이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딸이 하나 있으면 빨강치마 노랑저고리를 입혀 매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할 텐데……."

구렁아 구렁아 혓바닥을 내놓아라.
구렁아 구렁아 네 허물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토막토막 잘라서 구워먹어버리겠다.

동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집에 돌팔매질을 하고는 잽싸게 달아났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집은 점점 외톨이로 적막해졌다.

"네가 이제 고기맛을 들였으니 목숨 가진 것들이 네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뱀의 사는 길이 서로 다르니 이제 이 집을 떠나거라. 그것만이 너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어 돌아오거라."

그런데 어쩐 일로 셋째딸이 구렁이에게 시집을 가겠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네가 미쳤구나. 구렁이와 혼사를 맺은 집 딸을 누가 데려가겠니? 너 때문에 우린 시집도 못 가게 생겼다. 제발 마음을 돌려라."

"어떻게 시집을 가든 다 제 복대로 사는 법이다. 비록 구렁이 남편일지라도 네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좋은 날을 주실 것이다."

자신의 경솔한 언행 탓에 벌어진 일인지라 주인 영감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과거를 보러 떠나려 하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뱀 허물을 잘 간직하고 있으시오. 딱히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을 할 수는 없지만 저기 서 있는 미루나무가 집 쪽으로 다가오는 듯이 보이면 내가 집으로 오고 있는 것이고 멀어지면 내가 오던 발길을 돌려 다시 떠나는 것으로 아시오."

"이젠 되었소. 내가 이제야 완전한 사람이 되었소. 뱀 허물을 태워버렸기에 사람 세상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물속 세상에 있게 되었던 거요. 이렇게 당신이 찾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소. 이제 당신의 손을 잡고 사람 세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