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인천산선에서 일했던 김근태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무시당하기만 하며 살아온 노동자들로 하여금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했고, 김근태를 만나면 노동자들은 별별 얘기를 다 했다는 것이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고 언론 현실을 규탄했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기자들 중 막내인 정연주는 성명서 한 쪼가리 얻으려고 학생들이 바리케이드 쳐놓고 농성 중인 곳에 갔다가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라고 쓴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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