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소설과 비평을 쓴다. 환상 문학 웹진 ⟨거울⟩의 필진이며 호러 출판 레이블 ‘괴이학회’ 소속. 《야간 자유 괴담》, 《내 유튜브 알고리즘 좀 이상해》,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하얀색 음모》 등 여러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제주도 깊은 곳, 인간은 헤아릴 수 없는 섧고 서늘한 기척들
<말해줍서>-빗물 외조모상이 끝나고 육지로 떠난 후 수연은 섬을 찾은 적이 없다. 섬이 수연을 찾은 적도 없지만.
<너희 서 있는 사람들>-WATERS 미스터리한 사건 해결을 맡길 만한 곳으로 ‘탐정‘을 찾는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드물다. 탐정 사무소만큼이나.
<청년 영매_모슬포의 적산가옥> 이작이 집이 얼마 전까지 제주도청 재산이었대. 이 근방에 적산가옥이 몇 채나 있는데, 여기만.
<구름 위에서 내려온 것>-박소해 신당은 돌담을 따라 난 올레 깊숙이 위치한 낡은 안거리 집으로, 바로 옆에 강 심방이 형석이와 같이 살던 작은 밖거리 집이 있었다.
<등대지기>-홍정기 혹시. 전임자 중에서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 있어요?
<라하밈>-사마란 아무도 없는 길가에 웬 신부님인가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죠.
<곶>-전건우 제주도에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향이었다. 고민 끝에, 수연은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뭇 스름 다 됨이니, 이제사 옴이니?"
뭍사람, 엄마는 수연을 그렇게 불렀다. 엄마의 말은 맞을지도 몰랐다. 외조모상이 끝나고 육지로 떠난 후 수연은 섬을 찾은 적이 없다. 섬이 수연을 찾은 적도 없지만.
어릴 때 말을 타고 학교에 갔건, 인터넷을 했건, 아이폰을 썼건,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수연은 섬이 싫어서 떠났고, 엄마는 뭍이 싫어 섬에 남았다. 수연이 섬에 대해 할 말은 이제 그뿐이었다.
"야, 공기부터 다르네. 같은 한국인데도 외국 같다."
노인의 뒤에서 또 한 사람이 다가와 속닥이며 곁에 쭈그려 앉았다. 수연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며 쪼그려 앉은 그 남자의 한 팔에 장총이 단단히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섬사람이 섬 말씨를 쓰는 게 뭐가 문제요?"
이 사람,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수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떤 일은 경험하지 않아도 뼈에 새겨진다. 수연에겐 ‘4·3’이 그랬다. 섬 태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럴지 모른다. 수연의 엄마도 그랬으니까.
48년에 시작돼 54년에 끝났다고 세상이 말하는, 하지만 섬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수연이 등지고 걸어온 오랜 비극을.
"그런데 애당초 뭣 땜에 우리가 이렇게 숨어 있어야 되나?"
"왜놈들 물러가고 미군이 왔으니 이제 당신들은 자유요, 그러더니 그때 순사 해먹던 놈들이 그대로니, 뭐."
"누구는 죄 서북청년단 짓이라 하고, 누구는 저 서양 군인들이 뒤에 있다 하고, 누구는 왜에 붙던 순사 짓이 여전하다 하고, 누구는 반쪽 정부 세울 욕심에 시작됐다 하고. 알려주오, 처자. 당최 이 모든 일이 왜 시작됐소?"
"요 총구로 쏘고 또 쏴도 기어 나오는 저 허연 귓것은 어디서 왔소?"
―찾았다. 그 속삭임에, 바닥을 기던 수많은 손이 수연을 바라봤다.
―찾았네, 찾았어. 섬에 아직 산 인간이 있었어.
징그러운 손마디가 꿈틀댔다. 그래, 날 죽여. 친척들을 죽였고 마을을 불태웠듯 날 죽여. 엄마의 엄마를 괴롭혔듯, 그래서 우리를, 섬에 난 우리를 영원히 괴롭혔듯 또다시 날 죽여….
"잘 숨어 있다 다치지 말고 만나자 해놓고, 엄마는 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버렸어…? 응? 나는 일흔 해가 가도 그게 궁금해."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누구도 말해주질 않아…."
―킥킥, 찾았다…. ―그때 분명 다 죽였는데, 이상하게 자꾸 다시 살아나….
‘섬’은 신비롭습니다. 신비롭고 또 외딴곳이어서 매체와 외지인은 섬을 곧잘 대상화합니다. 때로 그곳은 환상의 낙원이고, 때로는 도피처이며, 때로는 범죄의 온상입니다. 그렇다면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외지인은 어떤 의미일까요. 특히 4·3이라는 비극을 겪어낸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말입니다.
캄캄한 산속 동굴에서 단절되었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아픔을 만난 수연처럼, 저도 깊고 어두운 곳에 갇힌 순간 누군가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길 바랍니다. 저 역시 섬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영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니까요.
WATERS 웹소설, 장르 문학 작가 겸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무협, SF, 호러, 판타지를 종횡무진하며 손 닿는 대로 쓰고 있다. 특별한 소재로 엮은 도전적인 발상을 꿈꾸지만, 역시 꿈은 닿기 어려운 편. 서너 편의 웹소설을 쓰고 서너 편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대표작은 아직 못 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겪어본 바 그 어떤 회사보다도 피고용인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해 주는 고용주였다. 일이 없을 때는 볕이 쨍하게 들어오는 자리에서 엎으려 졸아도 별말을 안 할 정도로. 그게, 제주특별자치도의 몇 안 되는 탐정 사무소에 조수로 근무하는 나기은이 자기 사장에게 매긴 평가였다.
서울 토박이. 그런 전통과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댁은 집성촌이라. 아마 꽤나 적응이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상식과 전통에서 말하는 상식은 다른 점이 많으니까.
박경원은 놀랍게도 나기은 뒤에 숨었다. 노동자를 방패 삼는 고용주라니, 오소독스한 모습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상황이 웃기에는 참으로 부적절했다.
"미신은 안 두려워하셔도 되는데요." 나기은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미신 믿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셔야 해요, 사장님."
"어멍 하나, 아방 하나, 아이 하나, 이추룩 혼 가족만 바치민 되어." "그, 그게 무슨⋯." "더 들어가민, 내년부턴 머릿수를 늘려 맞추어사 헌단 말이라." 그게 전부였다.
이작 호러, 미스터리와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아주 많다. 단편 ⟨명태⟩, ⟨1940>,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 중 ⟨물뱀⟩, 《절망과 열정의 시대》 중 ⟨피와 로맨스⟩를 썼고, 장편으로는 《괘서》를 썼다.
그런 종류의 꿈을 꿀 때면 귀가 꼭 먹먹했다. 사각거리며 글씨 쓰는 소리나 창문 밖에서 벌이 윙윙대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는 있지만, 오래전 녹화한 영상처럼 뭉개져서 들렸다.
예뻤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누나는 웃어봐야 소리 없이 미소 짓는 정도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 몸을 사로잡은 존재가 누나를 흉내 내며 웃기에 모르는 척 커피를 마셨다. 가슴속은 누나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만큼 자신을 잃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으로 시시각각 타들어 갔다.
"에이, 귀신 붙었다는 말은 좀 오래된 집이다 싶으면 다 있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제주 땅 전역에 묻혀 있을 건데. 내가 보기엔 그냥 인기가 없어서 안 팔렸을 거예요. 이 근방 사람들은 거기가 뭐에 쓰던 집인지 아니까."
노인을 제대로 본 그제야 깨달았다. 노인은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 경우엔 늙은 귀신이었다.
결정적으로, 드러난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족쇄에 이어진 굵은 쇠사슬이 언덕 위까지 뻗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미카제는 뭔지 알지요? 비행기로 적함에 부딪혀서 적도 죽이고 저도 죽은 일제 비행기 조종사들 있잖아요. 배도 똑같은 게 있었지. 말 그대로 인간 어뢰. 그게 요카렌이에요. 요카렌도 배를 숨겨놓을 목적으로 해안 절벽에 동굴을 팠는데, 아시다시피 제주가 화산섬이잖아요? 땅이 다 현무암이라고. 이 돌이 단단하기가 말도 못 해서 갱도건 동굴이건 돌 파다가 죽고, 반항한다고 맞아서 죽고 했어요. 그 다케모토 중좌가 지휘해서.
"부동산 사름이 해준 말은 반만 맞아. 지지빠이지? 총각이 본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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