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세 달만 지나면 당신도 죽고 싶어질 겁니다. 여기에서는 벌써 열 명 이상이 뛰어내려 죽었어요."
"위험하니까 시도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나도 오늘은 이만 방으로 돌아갈 겁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죽을 마음이 사라졌어요."
나는 누군가와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식당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열심히 식사만 하는 풍경은 기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논리 비약은 내가 이미 정상적 사고를 못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틀림없다. 정상적이라는 자신감이 흔들린다.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하고는 다르게 만들어져 있어요, 사회는. 그러니 당신들 쪽에서 적응해야 합니다."
아직도 무인도나 야간 인구일정한 지역에 주소를 두고 늘 거주하는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는 휴대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바라키 현 안에서 그럴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점수를 얻지 못한 채 A45만 무거운 벌을 받고 끝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원한을 산 내가 A45에게 밀고 당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공모죄는 밀고의 온상임을 깨달은 나는 더욱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배반의 윤회에 가담하는 것은 허망하고 위험하다.
그래도 지루함을 면하려고 머리에 떠오른 제목을 적어보았다. ‘린가와 요니힌두교 용어로 남성기와 여성기를 뜻한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단어에 웃음이 나왔다. 지워 버리자 생각했지만 지우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선을 몇 줄 그어서 지웠다. 이 흔적도 검열되겠지 생각하니 진저리가 났다. 나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러나 소설가는 대개 특권계급은커녕 인간실격자이다. 허구를 상상하고 부풀려서 글을 쓰다 보면 실생활 쪽으로는 소홀해진다. 실생활이 허구에 흡수되어 점점 메마르고 텅 비게 되므로 주위 사람들도 질려서 떠나 버린다. 고독해진 작가는 더욱 허구로 도피한다. 자기가 만든 허구 속에 완전하게 들어가 사는 것도 나름 행복하겠지만 실생활에서는 폐인이나 다름없다.
아니,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얼음은 문명이야"라고 말한 것은 <모스키토 코스트1986년에 발표된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부친이었나?
"아뇨, 별로. 얌전히 생활해서 빨리 나가자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거야 다들 생각하지만, 그럼 왜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 거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그랬다. ‘형기’를 마친 사람들은 왜 이 요양소의 실태를 고발해 주지 않을까.
굿바이(다자이 오사무 스타일로『굿바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미완의 유작. 바람둥이 주인공이 새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연인들에게 ‘굿바이’를 고하는 과정을 그린 익살스러운 단편이다).
‘처음부터 문제아였지만 이런 지경까지 올 줄이야.’ ‘졸지에 7점이나 감점되었으니까요. 최근 들어 얌전해졌다 싶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절벽에서 뛰어내려 주는 게 제일 편하지만, 하는 수 없지. 소마 씨가 원한다면 줘버려.’ ‘이 여자, 곧 문제가 될 겁니다.’ ‘알고 있어.’ 저 목소리는 A45 아닌가? 절벽 턱밑에 숨어 있던 초로의 남자.
아무래도 A45는 나에게 절망과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결국은 자살을 부추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게 절망의 심연으로 인도하기 위해 장치된 함정이었던 것 같다. 아닐까? 내가 겪은 일들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알 수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가 망상일까. 나는 죽음으로 향하는 중환자처럼 의식이 깨어났다 사라졌다 하며 며칠을 보냈다. 어쩌면 몇 주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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