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브라더, 소울 시스터 —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나는 조심성 많은 초식동물처럼 누구와도 단짝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네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 안에서 모두와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멀게 지내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교우 관계였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는 버스에서 연달아 같은 친구의 옆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고, 한 친구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질 조짐이 보이면 슬며시 발을 뺐다. 적어놓고 보니 뭐 이런 성격 파탄자가 다 있나 싶지만 그때의 내게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작가에게 바라는 것 — 『양을 쫓는 모험』

생각해보면 1982년에 나온 소설이잖아. ‘82년생 양쫓모’네? (웃음) 그게 진짜 신기한 거지. 어쨌거나 하루키는 운동권 시대의 작가인데, 그 시대에 이런 식의 묘사를 했다는 게 정말 센세이셔널했을 것 같아. 밥 먹고 섹스하고 그런 내용을 거리낌 없이 막 쓰고. 물론 나중에 나오는, 양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뭔가를 점령당하고 빼앗기는 얘기에서 하루키가 자신의 운동권 세대로서의 의식을 녹여서 넣긴 넣잖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하루키도 변했고 우리도 변했지

돌핀호텔에서 관찰하는 건너편 회사의 ‘가슴이 커다란 여사원’이 내가 가진 판본에는 ‘큰 유방을 가진 여직원’이라고 되어 있어. (일동 폭소)

현실적이면서 평범한 사람, 비현실적이면서 평범한 사람

전쟁이 싫어서 도망 다녔다고 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법한 사람인 것 같아. 전쟁을 피해 어딘가에 틀어박혔는데 세상이 바뀐 걸 모르고 있는 사람. 해외 토픽 같은 데서 나오잖아.

쥐도 평범했기 때문에 양을 자기 안에 가둔 채로 자살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니까.

그 말랑말랑함이 예전엔 좋았지

남성 작가들이 훨씬 안정적으로 작업을 하고, 비평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그래서 여성 작가에 비해서는 더 새로울 필요가 없는 면도 있는 것 같아.

난 휘둘리지 않아, 난 상처받지 않아

주인공 스미레가 말이 너무 많더라. (일동 폭소) 내가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수다를 다 듣는 게 힘들더라고. 스미레가 이제 나한테 언니가 아니잖아. 옛날에는 뭔가를 많이 알고 자유분방한 언니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말 많은 동생 같은 느낌이랄까.

출판사 편집자님이 그러시더라고. 하루키 팬인 아내분이 "하루키는 젊을 때 읽어야 한다. 나이 들어서 읽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고. 그러면서 편집자님이 왜 청춘일 때 하루키를 읽어야 되느냐고 나한테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때 제대로 대답을 못 했어.

『아무튼, 하루키』가 너의 대답이라고 해. (일동 폭소) 『데미안』도 그렇잖아. 나이 들어서 읽으면 어릴 때만큼 좋지가 않지.

난 연애든 섹스든 죽음을 대하는 태도든,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사물을 직접 경험하기 전인 미숙한 나이에 읽음으로써 그것들을 대하는 주인공의 자세나 시각을 자기 세계관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게 하루키 팬들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 그게 자신의 세계를 확립하는 툴이 된 거니까.

훨씬 뒤에 가서야 겨우 그게 연결되는 거야

『양을 쫓는 모험』은 다시 읽어보니까 웃긴 부분이 많더라. 비싼 프랑스 요리 먹고 "식비가 응축된 맛이 났다"*고 한다든가 "러시아인은 가끔 아주 재치 있는 말을 한다. 겨울 동안에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라든가.

"세상에는 그런 타입의 돈이 존재한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쓰고 나면 비참한 기분이 되고, 다 써버렸을 때는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자기혐오에 빠지면 돈을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땐 돈이 없다. 구원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무작정 좋은 거야. 자네와 마시는 맥주라든가…."*

* 『양을 쫓는 모험』(하), 신태영 옮김, 문학사상, 2009, 237쪽.

올해도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라고들 했던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다. <하루키는 왜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했는가?>라는 일본의 신문기사 아래로 "하루키스트들이 멋대로 소란을 피우는 것뿐이야" "(노벨상은 후보를 발표하지 않으니) 애초에 하루키가 후보에 올랐는지 말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등의 댓글이 달린 것을 봤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함께 펴냅니다.

아무튼,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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