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때부터 강남 개발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논밭 아니면 황무지였던 곳이 닦이고, 포장되고, 파헤쳐져서, 아파트와 빌딩이 올라가는 신시가지로 바뀐다. 왜 박정희는 강남을 개발했을까? 정권 자체가 투기를 했다는 시각이 있다. 개발의 결과로 땅값이 천문학적으로 오르자(10년 사이에 약 200배가 올랐다고 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리 사둔 강남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권에 가까운 사람들은 사전 정보를 이용해 투기에 뛰어들 수 있었으므로,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더욱 높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직후부터 정부 고위층이나 서울시장 등과 서울을 발전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그때 이미 지금의 잠실 쪽에 대규모 체육 시설을 지어 올림픽대회를 유치한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규모를 확대하고, 앞서 본 영등포 권역의 테마별 개발처럼 강남 권역에서도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영등포보다 더 백지에 가까웠던 만큼 상업 지구와 중산층 주거 지구로서의 특화 개발이 더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강북 도심에 모조리 모여 있던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 기능들을 한강 남쪽으로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본의 아니게 대구가 보수의 본거지가 되고, 광주는 진보의 본거지가 되었다면 서울 강남은 자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한동안 김영삼 계열의 야당을 밀었다. 그러다가 1990 년 3당 합당으로 구 권위주의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보수 야당 세력이 합쳐지자, 내내 그쪽만 밀고 있다. 강남 주민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우려한다.
대대로 이어져 온 물 많은 고을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뒤바뀐 도시들이 많은데 수원은 의외로 일관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이는 이름은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며, 백제로 넘어가서 모수성이 된 다음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의 백제 땅들을 빼앗을 때 고구려로 넘어가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모수’는 ‘벌(들판)의 물’이며, ‘매홀’은 ‘물의 벌’이라 사실상 같은 뜻이다. 결국 ‘수원水原(물의 벌)’이라는 뜻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으니(신라 경덕왕은 수성水城, 왕건은 수주水州라 하여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물 많은 고을이라는 뜻은 이어진 셈이다) 한국사에서는 매우 진귀한 예다. 지금 봐도 수원 경내에는 호수가 2곳, 저수지가 5곳이라 물이 많은 도시다운데 과거에는 더했던 것일까?
1592년 6월에는 광교산 자락(용인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삼도근왕군 수만 명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불과 1600여 명의 왜군에 참패했다. 총 병력만 많았지 조율이 안 되는 여러 지방의 병력들을 엉성하게 지휘하다 빚은 참사였다. 하지만 그해 12월에는 지금의 오산시에 속하는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전라도에서 끌고 온 병력으로 맞서 싸워 왜군을 물리쳤다.
1637년, 이번에는 광교산 자락에 북쪽 군대가 몰려왔다. 전라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병 3000여 명이 슈무루 양구리가 이끄는 2만 명 이상의 청나라 군대를 효과적으로 기습, 양구리를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왜란의 광교산전투가 왜란 전체의 최대 패배 중 하나였다면, 호란의 광교산전투는 최대의 승리 중 하나였다. 그처럼 명암이 갈린 이유에는 지휘관의 역량과 지형의 활용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왜란 때는 각지에서 올라온 군대가 서로 부대끼며 혼란스러웠던 반면, 호란 때는 수원 주둔군과 수원 현지 민병들이 한 몸이 되어 싸웠다는 점이 가장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1793년에 수원부를 화성華城이라 바꾸고 부사보다 등급이 높은 유수가 책임을 맡도록 했다. 초대 화성 유수에 그가 가장 신임하던 재상인 채제공을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화성 건축을 시작했다.
화성이 곧 실학이다 수원 화성은 ‘실학’이라 불리는 당시의 학술과 문화의 상징이자 집대성이다. 화성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서양에 비해 동양은 체계적이지 않다거나 뜬구름 잡는다거나 주먹구구식으로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하지만 세계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체계성과 주도면밀함이 수원 화성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사실적인 것을 중시하고, 구체적이며 정밀한 해답을 찾는 실사구시 정신이 유감없이 구현된 것이다.
화성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기도 하다. 화성은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평지성이다. 평지성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거액을 들여 수십 미터 높이의 견고한 성벽과 넓고 깊은 해자를 파지 않는 한 방어에 취약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산악이라 하는 자연의 방벽을 활용한 산성 중심으로 성을 방위해 왔다. 왜란 때 한양도성과 같은 평지성은 방어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화성은 평지성이면서도 방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했다. 치성과 돈대, 적대를 요소마다 배치해 적의 이동을 여러 각도에서 감시하고, 입체적인 사격으로 적이 성벽을 뚫지 못하게 한 점은 중국의 성곽 기술을 본뜬 것이다. 암문을 마련해 적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 병력을 이동할 수 있게 한 점은 전통 산성 기술을 쓴 것이다. 그 밖에도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쌓던 전통적 방식 대신 벽돌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적이 화포나 공성 도구를 쓸 때 더 잘 버티도록 하고, 일부 구릉지를 활용하면서 성벽의 경사나 누대의 각도 등을 치밀하게 조정해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쓸모가 있다면 중국의 기술이든 일본의 기술이든 갖다 쓰면서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꾀한 것이다. 이것이 이용후생 아닌가.
화성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다. 왜 멀쩡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고, 매년 대대적인 능행을 하고, 도시를 새로 만들면서 평지성을 쌓는단 말인가? 오직 효심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기존의 묘소를 더 크고 화려하게 개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랬다면 그만큼 비용도 더 적게 들지 않았을까? 경기 남부의 방위를 더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면 독성산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급기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이 대단치 않은 예법 문제 따위에 얽혀 힘을 못 썼다. 힘없는 백성들은 세도가들의 착취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갔다. 세도가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이 아니면 누가 이들을 억누르고, 국가와 백성에게 활력을 찾아주겠는가?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나라와 온 생명의 주재자)이라 자임하며 ‘조선판 계몽 전제군주’를 꿈꾸고 있었다. 폐단이 누적된 한양에서는 그 꿈을 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듯, 루이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듯, 정조는 화성을 세웠던 것이다. 당파 싸움과 불요불급한 정치 논쟁에서 탈출해, 나라와 백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를 펴기 위해선 새롭고도 완벽한 무대가 필요했다. 그는 화성을 튼튼하고 실용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1949년 수원에 일제의 농사 시험장을 개편한 농업기술원이 들어섰다. 이는 훗날 농촌진흥청이 되었고, 2000년대에 수도권 행정기관들을 각 지방으로 분산시킬 때 전주로 내려가기 전까지 수원에 자리했다. 또한 일제 때 수원으로 옮겨진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되었다가 2000년대에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올라갔다.
20명 이상이 사망한 이 만행은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자이자 의학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가 쓴 『끌 수 없는 불』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과인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중심을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오히려 혜택이 되도록 애쓰며 그리했느니라. 결국 도시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웅장한 건물의 것도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더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수원의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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