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외국인들의 땅으로 한국인은 쉽게 들어가 보지도 못하며 서울 교통망의 맥을 끊어온 미군기지의 반환이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미8군 사령부, 유엔군 사령부 등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한미연합사와 일부 미군부대만 남아 있으며, 완전히 이전이 끝난 뒤에는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 집값의 가파른 상승이 공급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공원 대신 아파트를 짓자는 말이 나오고,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 국방부 자리에 집무실을 마련함으로써 혼란이 이는 참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서울 한복판의 풍광 좋은 이 권역이 군부대와 묘지, 유흥시설 등에 오래 매여 있었던 셈이다.

서재필을 비롯한 독립협회는 360년이 지난 1897년에 이 영은문을 헐고 두 기둥만 남겼다. 그리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모화관은 독립문으로 바꾸었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김가진이 썼다고 하나,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설도 꾸준하다. 당시 이완용도 독립협회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심지어 독립 건립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독립협회와 급진 개화파 구성원들은 대체로 반청친일의 입장을 띠고 있었다. 사실 독립도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근대 주권국가로서 독립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 제1조가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사대 일번지를 이렇게 갈아엎은 것이다.

1908년에 경성감옥으로 세워졌는데, 사실상 의병 감옥이었다. 을사조약으로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병을 붙잡아서 가두고 고문할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연창수가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근대 한국 최초의 정치범 처형이었다) 국권 상실까지 수십 명의 의병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서대문형무소 내부는 이미 대한제국의 주권이 털끝만큼도 미치지 않는, ‘먼저 온 일제강점기’였다.

일제 내내 상황은 비슷했다. 김구, 손병희, 한용운, 여운형 등이 이곳을 거쳤고 유관순, 강우규 등은 이곳에서 죽었다. 강우규는 처형, 유관순은 옥사였다. 안창호도 고난의 수감 생활로 병이 생겨 출옥 후 사망했다. 김구는 "옥사 면적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수용되어, 발 뻗을 틈조차 없었다. 자다가 몸이라도 뒤척이면 옆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라고 회상한다.

해방 뒤에도 서대문형무소는 정치범들을 억압하기 위한 공간으로 종종 활용되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이승만과 겨루기도 했던 조봉암이 1959년에 여기서 처형되었다. 이유는 ‘평화통일을 주장함으로써 북괴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정권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똑같은 사법 살인은 1975년에도 있었다. 유신정권은 제2 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32명을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그중 8명을 이곳에서 죽였다.

리영희, 문익환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들도 이곳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곳의 열악한 환경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지, 리영희는 "몸을 간신히 누일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관 속에 들어간 듯했다. 화장실 바로 옆에서 밥을 먹어야 했기에, 구더기들이 음식 위로 우글거렸다"라고 썼다.

1978년 그 하중도인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하고 1993년까지 서울과 그 인근 도시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이곳에 매립함으로써 ‘피라미드의 33배 규모’라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제 못지않게, 해방 뒤에도 이 권역에 대한 대접이 험했던 셈이다.

본래는 난초와 지초가 아름답게 피어서 난지도라 불렸으며 유원지로 활용되던 난지도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섬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곳을 포장하고 치장해서 ‘월드컵공원’을 조성하기는 했다. 그래도 한동안 봄철이면 오물 냄새가 인근에 퍼졌으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이 건강을 해치니 절대 놀러 가면 안 된다는 ‘도시 괴담’이 아직도 있다.

1409년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안암동에 터를 잡았다가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 정릉貞陵이 되었다. 당시의 임금은 태종으로, 그는 계모이며 정적이었던 그녀에게 뒤끝이 있었다. 그래서 유지 보수를 전혀 하지 않았을뿐더러 청계천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을 가져다 고쳐 깎아서 새 돌다리를 만들도록 하는 등 파손에 앞장섰다. 이후 무슨 잡초만 만발한 언덕배기처럼 방치되었다가 1669년 이후 겨우 손질을 해서 오늘에 이른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泰陵도 여기에 있다. 두 여성 모두 성격이 강했고 정치적 센스가 뛰어났다. 신덕왕후는 태종 이방원과의 정쟁에서 패배했으나 문정왕후는 승리해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여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음이 차이랄까.

이곳은 독재정권에 맞선 학생운동의 진원지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 권역에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4월 18일에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다 동원된 폭력배들에게 피습되었다. 이 일이 서울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게끔 촉발했다. 이를 감안했는지 1962 년에 성북구 수유동에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희생자 묘지가 건립되었다. 이 권역에는 고려대 외에 국민대, 한성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등 대학교가 많으며 종로 - 중구 권역의 성균관대와도 가깝다. 서대문 권역의 신촌 같은 대학촌은 없으나 서울에서 가장 대학생들이 많은 권역 중 하나다.

지금은 재벌 1세대만이 그곳에서 계속 살며 그 후계자들은 강남 등지로 나가서 살짝 시대에 뒤져 가는 감이 있으나 아직도 최고 부촌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비슷하게 개발되어 부촌 대열에 들었으나 이후 부동산 개발 대책이 꼬이면서 철거된 집터만 잔뜩 남아 을씨년스러워진 장위동 같은 곳도 있다.

1970년,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이 이런 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동대문구청에, 나중에는 노동청에 진정을 넣고 대통령에게까지 탄원서를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결국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불사른 다음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결코 과격하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이 요구가 무시되던 현실은 그의 젊은 생명을 태움으로써 비로소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가 분신했던 청계천로 274번지에 그의 동상이 서 있으며, 기념관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동대문시장은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패션·의류·주얼리에 중점을 둔 복합 쇼핑몰들이 들어서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생겨 패션 디자인의 메카로 거듭나 있다.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며 입영 열차를 타러 가는 신병들이나, 경주 등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들의 새 출발을 수없이 많이 지켜본 청량리역이다.

고려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낙성대(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나 폐허처럼 된 것을 거의 통째로 새로 지었다)와 국립현충원은 모두 북쪽의 침략에 맞서서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호국 정신을 강조하고 현창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학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 - 통합한 것은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의 모두가 탐하는 땅

"이럴 줄 알았으면, 빚내서 강남에 집을 사두는 건데!"

현대 한국인의 흔한 푸념이다. 문제는 이 말을 10년 전에도, 20 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흔히 들었다는 것이랄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말이 아예 나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강남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아서라기보다, 빚을 져서 살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기에) 점이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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