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아주 어릴 때는 아버지도 같이 살았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집안일도 바깥일도 대개 할아버지가 도맡아 했던 거죠. 할머니는 이야기꾼 역할을 했어요. 온갖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텔레비전은 금지예요. 그런 걸 보면 머리가 나빠지고 품위가 없어지니까 보지 말라고 해서."

마귀할멈이 무슨 짓을 할지, 적인지 우리 편인지, 처음 등장할 때는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마귀할멈 이야기들의 재미난 점이죠.

할머니의 결론은 늘 똑같았어요. ‘너도 마음씨 곱고 친절한 아가씨가 되면 마귀할멈 같은 무서운 사람이라도 널 도와줄 거다’라고. 어떤 마귀할멈이 등장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그 말을 듣게 되죠.

암튼 재미난 짓을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강인하고 멋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할머니에게 왕비가 아니라 마귀할멈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엄청 혼났죠.

"넌 타고났구나"라고

예의범절도 없다. 금기도 없다.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기술이었다. 무도가 아니라 싸움.

"무도에 들어서면 평생 다시는 싸움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무도가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폭력은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것.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할아버지나 나 같은 자를 위한 오락.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여의었다. 이제 맞서서 싸울 상대는 곰 정도밖에 없게 되자 신도는 고향을 떠나 독립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폭력을 찾기 위해 도쿄로 올라왔다.

"이런 더러운 뒷구멍 앞에서는 고추가 서질 않아."

어차피 촌코재일한국인의 멸칭라고 어딜 가나 퇴짜야.

하지만 이 일은 주먹 있고 머리만 잘 돌아가면 좋은 평가를 받지. 불량배나 주먹깨나 쓰는 놈들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이 세계밖에 없어.

뿌리께에서 절단된 크고 작은 음경 여섯 개가 옻칠함에 가득 들어 있었다.

"―처치곤란이에요, 이런 거."

"오야붕이 주는 거라면 똥더미라도 감사합니다 하는 게 야쿠자다."

"우타가와가…… 아가씨의, 약혼자니까."

톡, 하고 싱크대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언월도薙刀 나기나타=언월도는 무가의 부녀자가 익히던 기예로, 지금도 아가씨의 취미로 여겨진다

"싸움에는 예절이고 나발이고 없으니까요. 뚜드려 패고 쓰러뜨리는 게 전부죠."

"붙어 볼 수 있겠냐, 마사랑? 아무리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리를 들었다지만 이젠 놈도 중늙은이야. 하지만 너는 점점 실력이 오르고 있는 야쿠자다. 너라면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다."

"개새끼…… 역시 내가 말도 안 되는 또라이를 데려왔구나‘개새끼’는 원문에 한글로 표시됨."

"우리,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군요."

신도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바람 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목청을 높였다.

"바보, 여기가 이미 지옥이야!"

"예쁘네, 지옥."

그렇게 말하고 제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쥐고 단숨에 싹둑 잘라냈다.

데루테루보즈
맑은 날씨를 기원하며 처마에 매다는 일본의 전통 종이 인형

서툴게 간사이 사투리를 쓰다가는 타향 사람이란 게 들통나기 쉬우므로 대놓고 홋카이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러면 ‘시골에서 돈 벌러 나온 어수룩한 처녀’라는 인상을 풍기고, 조금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의심을 사는 일은 없다.

정령지정도시政令指定都市 인구 70만 명 이상이며 광범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도시로,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하다

야나기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틀에 박힌 척하면 세상은 이렇게 잘 속아 준다는 것을. 그 남자도 뭔가 틀에 박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걸 거부했던 것일까.

산사태로 거대한 토사가 나무들을 꺾으며 탁류와 함께 산기슭으로 쏟아져 내리는 소리였다.

"그래요. 바다 건너 할머니 고향으로 가요. 숲속에, 닭 다리 달린 오두막을 찾는 거예요. 그곳에서 커다란 솥에 버섯을 삶고 이끼도 따고 가축과 사람들에게 저주를 걸며 사는 거예요. 아, 그래, 개를 키워요. 고양이도 키우고. 잔뜩 키우자고요. 갈 곳 없는 걔네들을 다 모아서 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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