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이곳에 왔고, 그게 잘못된판단이었음을 깨닫고있다. 루지가함께 가주겠다고 했을 때 제안을 받아들였어야했는데, 용기와 대담함도생존 지식도 부족하면서 대체 왜 혼자 오겠다고 우겼던 걸까. 후회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생각한다.

어제까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오늘내가 같은 복도를 다섯 번째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기록한 지도는 엉망이었다. 그것이 지도기록에서 음성 기록으로 일지 형식을바꾼 이유다.

어쩌면 친구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동료 로몬들의태도를 배워야 했다. 나흘간 쉬지 않고 걸었지만 의미 있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기계들은 3420ED의 복잡한 미로 가장 안쪽에 그들만의 소박한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나에게 준 사전 정보로 추측해보자면, 이곳에서 거대 문명을 이루었던 인간들은 감염병으로 모두 사망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러나 기계들은 감염되지 않았고 살아남아 거주지 일부를 차지했다. 그들이 거주지 전체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간들이 설치해둔 함정을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넓은 공간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들이 인간 지배자를 대체한 거주구에서는 인간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유기물이나 흩어진 사체, 지문이 남은 소도구들 따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라이오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가 무척 원망스럽다. 기계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때 기계들의 주인이었던 라이오니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었다. 

셀이 저렇게 확신하는 것을보니 나와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광학 신호 입력기가 없는 셀이 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의문이다.

우주에는 두 종류의 멸망이 있다. 가치 있는 멸망과 가치 없는 멸망. 인류가 행성과 행성들 사이, 별과 별들 사이로 널리 퍼져나가 번영한 이후 우주곳곳에서는 매일 어떤 거주지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시에 새로운 거주지가 탄생한다. 

멸망의 규모는 작게는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이 거주하는 소규모 거주선에서부터 크게는 행성계 전체를 집어삼킨다. 그렇게 수많은 멸망이 남긴폐허를 뒤적이다 보면, 죽음은 모두 같은 죽음이고 그 앞에서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게 무력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그렇지 않다. 어떤 멸망은 다른 멸망보다 더 가치 있다. 적어도 우리 로몬에게는 그렇다.

우리는 멸망의 현장으로 떠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에 이끌린다. 로몬들은 유능한 유품정리사이자, 멸망의 단서를 탐색하는 1급 수사관이다. 행성 하나의 생태계가 삶과 죽음의 순환 위에 세워져 있듯이 죽음의 순환을 우주 전체로 확대해보면 멸망의 가치가 드러난다. 

잘못된 종에 갇혀 있다는 감각. 나는 평생 감금되어 있다는감각을 느껴왔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 비좁은 배양실에 갇혀서도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나는 루지의 말을 듣고도 그 의뢰를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첫단독 의뢰였다. 타인의 기준으로는 그저 쓸모없는 요청, 무시해버려도 아무 상관 없는 한 줄의 의뢰였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치를 비로소 증명할 때가 되었다는 시스템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쓸모 있는 로몬이라는 걸 증명해봐‘라고 말하는.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루지의 말대로 그건 그냥 시스템의 오류였다. 나의 탄생이 시스템의 복제 오류였던것처럼.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생애 중 어느 때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한 지금, 나는 뜻밖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두렵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온다. 그 안도의감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 나를 계속해서 감싸고 있지만, 여전히 그 감각의 근원을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죽음에 기생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방식. 내게는 눈앞의 이모든 것들이 아주 익숙하다.
"너희들, 로몬들과 똑같은 짓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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