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개 애벌레, 쥐똥나무 벌레, 하코네 산 도롱뇽, 엣추 도야마의 천금환 있어요!" 이런 소릴 가을 저녁이나 겨울 아침 같은 때 듣고 있노라면 서글프고 씁쓸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옛 사찰과 신사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이것저것 수리한답시고 도급공사에 들어가는 순간 죄다 파괴해버리는 꼴이 된다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내가 좋아서 히요리게다를 끌며 돌아다닌다. 도쿄의 황폐한 터는 그저 나의 개인적인 흥취를 돋울 뿐, 이 풍경은 쉬이 특징을 설명하기 어렵고 지극히 평범하기만 하다.

가난한 뒷골목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방법으로 변변찮은 생계를 꾸려가는 노인을 보면 연민과 비애와 더불어 솟아나는 존경심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집 외동딸도 지금쯤 직업소개소의 먹잇감이 되어 어디 게이샤라도 된 게 아닐까 싶을 때면, 나는 일본 고유의 충효사상과 인신매매 관습이 현대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이래저래 얽히고설킨 생각에 빠져든다.

나는 도무지 새로운 세계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에도의 음곡을 전기등 아래서 요란스레 연주하게 만드는 세속 일반 풍조와도 어울릴 수 없다. 큰 타격을 주는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는 한, 나의 감각과 취미와 사상은 나를 차츰 고루하고 편협하게 만들어, 마침내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리라.

"눈물로 얼룩진 화장 번진 얼굴을 숨기고 억지로 술을 마시네"

나는 뒤에서 기세 좋게 달려드는 자동차 소리에 당황하여 큰길을 피해 해가 들지 않은 뒷골목으로 도망간다. 그렇게 남들보다 뒤쳐져 느릿느릿 걸으며 우리네 세대에서 흥미와 고뇌를, 우쭐함과 비애를 동시에 본다.

뒷골목으로 가자, 사잇길을 걷자. 히요리게다를 딸각이며 내키는 대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으레 사당이 나온다. 사당은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정부의 비호를 받은 적이 없다. 거들떠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면 자칫 사라지기 십상인데도 사당은 오늘날 도쿄 시내에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사당을 좋아한다. 뒷골목 풍경에 멋을 더해주는 사당은 다소 거창하게 말해 단순한 동상銅像보다 심미적 가치가 훨씬 뛰어나다.

신록 우거진   산에 우는 두견새   첫 가다랑어

옛 도시 에도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 정취가 이 간단한 열일곱 자에 다 담겨 있다.

호쿠사이나 히로시게 같은 화가의 에도 명소 그림을 글자로 바꾼다면, 이 하이쿠(俳句 17자 안에 계절 언어를 포함시켜 짓는 일본 전통시) 한 소절로 충분하리라.

도쿄에 사는 이여, 시험 삼아 처음으로 아와세(袷 솜을 누비지 않은 기모노) 입는 날, 아침이 됐든 점심이 됐든 혹은 저녁 무렵이 됐든 외출 길에 구단자카나 간다묘진, 유시마텐진이나 시바의 아타고 산(愛宕山 천연 산으로는 도쿄 23구에서 가장 높다는 구릉) 등등 곳곳의 고지대에 올라 거리를 내려다보라.

반짝이는 초여름 하늘 아래 끝없이 이어진 기와지붕 사이사이 어쩌면 은행나무, 어쩌면 모밀잣밤나무, 어쩌면 떡갈나무, 버드나무처럼 신록이 선명한 나뭇가지 끝에 태양이 곱게 내리쬐는 모습을 마주한다면, 아무리 도쿄가 서양을 모방한 건축물과 전선과 동상으로 추해졌다 해도 아직은 아주 몹쓸 도시는 아니라는 기분이 들리라.

아무리 도쿄가 서양을 모방한 건축물과 전선과 동상으로 추해졌다 해도 아직은 아주 몹쓸 도시는 아니라는 기분이 들리라. 어디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역시 도쿄에는 어쩐지 도쿄다운 고유한 정취가 있는 듯하다.

만약 오늘날 도쿄에 도시의 미美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 으뜸이 나무와 물의 흐름에 있다고 단언한다. 야마노테를 뒤덮은 노목과 시타마치를 흐르는 강은 도쿄가 지닌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정원을 만드는 데 나무와 물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 없다. 도시의 미관을 만드는 데도 역시 이 두 가지를 뺄 수 없으리라.

지금도 시바 타무라초에 남아 있는 은행나무처럼 도쿠가와 씨가 에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고목이라 불린 나무가 적지 않다.

소나무는 은행나무보다 절이나 신사와 한층 조화를 잘 이루어 일본답고도 동양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에도 무사는 자기 저택에 꽃이 피는 나무를 심지 않고 상록수 가운데 특히 소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다.

야나기바시柳橋에 버드나무柳가 없음은 이미 류호쿠 선생이 『류쿄신시柳橋新誌』에 "다리를 버드나무로 이름 지으니 한 그루의 버드나무도 심지 않는다."고 적었다.

히로시게가 그린 니시키에 「동도명승東都名勝」(동도東都는 서쪽 수도 교토에 대비되는 동쪽 수도인 에도)의 소토사쿠라다 풍경을 봐도 해자 옆 길가엔 버드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박쥐우산을 지팡이 삼아 히요리게다를 딸깍거리며 거리를 걸을 때마다 나는 휴대하기 좋은 가에이시대(1848~1854) 에도지도를 항상 품에 넣고 다닌다. 그렇다고 요즘 석판인쇄로 찍어내는 도쿄지도가 싫어 일부러 옛날 목판지도를 즐기는 건 아니다. 히요리게다 끌고 걷는 거리 모습을 옛 지도와 비교하노라면, 크게 애쓰지 않고도 오래전 에도와 오늘날 도쿄를 눈앞에서 직접 대조할 수 있어서다.

그러한 아둔하고 무익한 재미 외에도 옛 지도의 편리성은 또 있다. 철 따라 눈, 달,꽃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명소와 절, 신사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오게끔 색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내책자처럼 여기서부터 어디어디까지 대략 얼마쯤 가면 정원수 가게가 많다든지 하는 설명도 달려 있다.

에도지도가 다소 부정확하다곤 해도 도쿄의 정확한 신식 지도보다 훨씬 더 직감적이고 또 인상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서양식 제도는 정치, 법률,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이러하다. 현대 재판 제도는 도쿄지도의 번잡함과 같고, 오오카 에치젠(大岡越前 명판관으로 알려진 옛 에치젠 국의 태수)의 분별력은 에도지도와 같다. 도쿄지도가 기하학이라면, 에도지도는 무늬와 같다 할 수 있겠다.

현대 서양식 제도는 정치, 법률,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이러하다. 현대 재판 제도는 도쿄지도의 번잡함과 같고, 오오카 에치젠(大岡越前 명판관으로 알려진 옛 에치젠 국의 태수)의 분별력은 에도지도와 같다. 도쿄지도가 기하학이라면, 에도지도는 무늬와 같다 할 수 있겠다.

에도지도는 히요리게다 박쥐우산과 함께 나의 산책길에 없어서는 안 될 길동무다. 에도지도를 따라 낯선 뒷골목을 걷다 보면 내 몸이 저절로 옛 시대로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초여름  / 바바 긴라치

꽃은 모두 무즙이 되어 젖고 
가다랑어 닮은 오늘 아침 길게 누운 구름


신록   / 기노 미지카

꽃 핀 산 향기 주머니 봄이 지나고 
푸른 잎만 가득 우거지누나

 
철 따라 옷 갈아입네     / 지교 가타마루

여름 오니 옷 속에서 솜을 빼고
소맷자락에 남은 건 봄날 꽃종이

현대 관료 교육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충효인의의 도道를 가르친다고 들었다. 오차노미즈를 지날 때마다 ‘앙고(仰高 공자의 제자가 스승의 덕은 우러러볼수록 높기만 하다고 한 데서)’란 두 글자를 내건 다이세이덴(大成殿 공자를 기리는 사당) 정문을 올려다보면, 기와는 떨어지고 잡초는 뽑지 않은 채 비바람이 파괴하는 대로 내버려둔 황량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이를 전혀 이상히 여기지 않으니 우리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도쿄의 서생이 미국인인 양 편리하다고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문학이든 과학이든 진정한 진보가 있기는 있었는가. 전차와 자동차는 도쿄 시민들이 시간을 절약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일본의 자연은 대단히 강렬한 색채를 지닌다. 이를 페인트나 붉은 벽돌 색채로 대신하려는 짓은 너무도 무모하다. 절 지붕과 차양과 복도를 한번 보라. 일본의 절 건축은 산과 강과 마을과 도시, 어딜 가든 주변 나무와 하늘 빛깔과 조화를 이루며 특색 있는 풍경미를 자아낸다.

일본 풍경과 절 건축은 서로 어우러져 있어, 따로 떨어진 모습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화롭다. 교토, 우지, 나라, 미야지마, 닛코 등의 절과 신사가 풍경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일본 여행자들의 몫으로 맡겨두고, 난 그리 자랑할 것이 못되는 이곳 도쿄 시내를 살펴보겠다.

본디 건축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풍토 기후가 어떠하든 아시아 땅에 유럽의 탑을 짓는다 해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천연 식물은 사람의 뜻대로 함부로 옮겨 심을 수가 없다. 말 못하는 식물이 세상 어떤 예술가나 철학자보다도 자기 자신을 훨씬 잘 안다.

일본인이 이 땅에서 자라는 고유 식물에 대해 최소한의 심오한 애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아무리 서양문명을 모방한다 할지라도 오늘날처럼 고국의 풍경과 건축을 함부로 훼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선을 잇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길가의 나무를 베고, 사랑받아온 풍광이든 유서 깊은 나무든 전혀 개의치 않고 붉은 벽돌집을 높다랗게 지어버리는 오늘날 작태는 실로 자국의 특색과 예부터 계승해온 문명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난폭한 행위다. 이런 난폭한 행위로 인하여 일본이 비로소 20세기의 강국이 됐다고 한다면, 이는 외관상 강국에 불과하며 존중할 만한 일본의 내면을 완전히 희생시킨 꼴이라 하겠다.

니혼바시 대로에서 미쓰이나 미쓰코시를 비롯해 주변에 경쟁적으로 들어선 미국식 고층 상점을 바라볼 때마다, 만약 도쿄의 실업가가 니혼바시를 스루가초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고 그 전설에 흥미를 느꼈더라면(스루가駿河는 후지 산이 있는 시즈오카 현의 옛 명칭. 니혼바시에서 후지 산이 보였기에 마치 같은 마을에 있는 것 같다 하여 스루가초라 했다), 이 번화한 거리에도 맑은 날 푸른 하늘 멀리 후지 산이 바라보이던 오래전 풍광을 조금이라도 보존시켰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본다.

도쿄 시내와 물의 심미적 관계를 고찰해보면 물은 에도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도쿄의 미관을 지켜주는 가장 귀중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육로 운송편이 없던 에도시대에는 천연 하천인 스미다 강과 여기로 이어지는 운하 몇 줄기가 그야말로 에도 상업의 젖줄이었다.

오늘날 도쿄 시내의 물줄기는 단순히 운송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탐미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지 오래다.

스미다 강은 말할 것도 없고 오차노미즈의 간다 강, 혼조의 다테 강을 비롯한 시내의 물줄기는 이제 현대의 우리에게 옛 사람이 즐기던 풍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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