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1959.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 한시 시인이자 관료인 아버지 나가이 규이치로와 한문학자 와시쓰 기도의 차녀 쓰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소키치, 호는 가후.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딴 단장정주인断腸亭主人, 긴푸산진金阜山人 등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03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1907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자연주의 문학에 매료된다. 귀국 후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 『프랑스 이야기ふらんす物語』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으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이어 발매금지 당했다. 1909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요청으로 <도쿄아사히신문>에 「냉소冷笑」를 연재했으며, 1910년에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천황을 암살하려는 대역 사건을 보며 문학가로서 무력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에도의 정서를 묘사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또 「히요리게다日和下駄」를 비롯해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가는 도시 도쿄를 안타까워하며 골목과 공터, 언덕과 강 등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손수 지도를 만들고 글을 남겨 ‘산책 예찬론자’로 불린다. 1952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54년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대표 저서로는 『지옥의 꽃地獄の花』(1902) 『꿈의 여인夢の女』(1903) 『스미다 강すみだ川』(1911) 『에도예술론江戸藝術論』(1920) 『장마 전후つゆのあとさき』(1931) 『강 동쪽의 기담濹東綺譚』(1937) 『단장정일승断腸亭日乗』(전7권, 1958) 등이 있다.

해설 오토와 베니코音羽紅子

와세다대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홋카이도 북쪽 땅끝에서 어린 딸을 기르며 오호츠크 해를 노래하는 하이쿠 시인으로 살고 있다. 기타홋카이도의 하이쿠 잡지 『유키시즈쿠』 주간으로 하이쿠를 발표하면서 <홋카이도신문> 문화센터 문학강좌, 호타루시립문학관 기획전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고 있다. 하이쿠 「기타미北見」가 2013년 전통하이쿠협회상을 수상했다.

山(산)  산/센, 야마

川(강)  센, 가와

寺(절)  지, 데라

坂(언덕)  한, 사카/-자카

谷(골짜기)  고쿠, 다니/-야

町(마을)  초, 마치

門(문)  몬, 가도

原(들판)  겐, 하라/-바라

柳(버드나무)  류, 야나기

崖(벼랑)  가이, 가케

島(섬)  도, 시마/-지마

森(숲)  신, 모리

堂(당)  도

園(뜰)  엔, 소노

橋(다리)  교, 하시/-바시

通り(거리)  도리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 나가이 가후 저,정수윤 역

여기에 글 쓴 날짜를 분명히 기록한 이유는, 책이 세상에 나올 즈음이면 글 속의 거리 풍경은 이미 적잖이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탓이다.

목조 다리였던 이마도바시는 어느 새 철교로 바뀌었고, 에도 강 둔덕은 시멘트가 발라져 다시는 달개비꽃을 볼 수 없다. 에도 성 사쿠라다몬 성문 밖이나 시바 아카바네바시 건너편 공터는 지금 토목공사가 한창이다. ‘어제의 꽃도 오늘은 꿈’이 되는 덧없는 세상의 유물을 비록 서투른 글월로나마 남기고자 하니, 부디 훗날 두런두런 나눌 이야깃거리라도 될 수 있기를.

 

을묘년(1915) 늦가을

가후

『히요리게다日和下駄』

게다의 여러 종류 가운데 특히 맑은 날 신는 게다를 이르는 말. 비 오는 날 신는 아시다보다 굽이 낮지만 일반 게다나 서양 구두보다는 높아 옷자락이 바닥에 끌려 흙이 묻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남달리 키가 큰데도 나는 항상 히요리게다를 신고 박쥐우산을 들고 걷는다. 아무리 맑게 갠 날이라도 히요리게다에 박쥐우산이 없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쉬이 변하는 건 남자의 마음과 가을 하늘, 높은 분들의 나랏일뿐만이 아니다. 봄날 벚꽃놀이 무렵, 아침결에는 하늘이 맑게 개다가도 오후 두세 시면 으레 바람이 불고 저녁나절에는 비가 온다.

변화무쌍한 날씨 덕에 뜻밖의 비를 만난 선남선녀가 부득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옛 소설에도 나올뿐더러, 오늘날에도 연극이 끝나고 때마침 내리는 비로 요행히 남의 눈을 피해 장막 안 어딘가에서 은근하게 정사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거리를 산책하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한여름 푹푹 찌는 날이면 나도 하굣길에 짐수레꾼, 마삯꾼과 함께 수건을 적셔 땀을 닦고, 둑 위에 올라 커다란 팽나무 그늘 아래서 쉬었다. 둑에는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올라가면 해자 너머로 멀리 마을이 보였다. 아마도 이 풍경은 외호 소나무 그늘에서 바라보는 우시고메, 고이시카와 고지대의 경치만큼이나 도쿄 내 절경이리라.

원래 에도(江戸 도쿄의 옛 명칭, 에도시대 막부의 수도) 명소 중에는 예로부터 별로 자랑할 만한 풍경이나 건축이 없었다. 이미 호신사이 기카쿠(宝晋斎其角 에도시대 초 골계적인 풍류를 담은 산문시인 하이카이의 대가)가 『루이코지類柑子』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쾌청한 날의 후지 산만이 에도 명소 가운데 오직 한 가지 흠잡을 데 없는 명작이라 했다. 아마도 이것이 에도 풍경에 대한 가장 공정한 비평이리라.

요사이 내가 히요리게다를 딸깍거리며 다시금 거리로 나와 산책을 시작한 건 물론 에도 경문학에서 받은 감화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특별히 이렇다 할 의무나 책임도 없는, 말하자면 은거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는 처지다.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 세상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돈도 쓰지 않으며 말상대를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그저 혼자서 멋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거닐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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