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설명은 된다. 뉴로브릭은 기억을 보강하는 도구였다. 철 지난 라디오 소리도, 태린의 뇌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이라고 본다면 말이 되었다.

바투마스 B—30 채광창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인부들이 모여 있었다. 한참 동안 방치되어 있던 채광창이라 대규모 작업이 필요해서인지 평소보다 인원이 많았다.

범람화된 온갖 동물의 사체와 그것들에 얽혀 자란 덩굴, 그리고 사체를 양분 삼아 인간의 키만큼 자라난 거대한 범람 산호들. 바닥에는 도대체 뭐가 고인 건지, 태린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밑창에 찐득찐득한 것이 들러붙었다. 사체가 썩어가면서 내는, 사람의 깊은 곳 어딘가를 건드리는 악취가 풍겨왔다. 계단 부근에도 범람체의 실끈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반장이 인상을 쓰며 그것을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프는 성급하게 뉴로브릭의 연결을 끊기 전에 그 환각과 환청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로 발생하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태린은 그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다면 선오가 조사하려는 그 신호도 일종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지상과 지하를 잇는 규칙적인 진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선오는 그것이 자연재해나 붕괴 사고의 전조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가 담긴 진동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태린은 알고 있었다. 광증 발현자들이 보이는 증상 중에는 지상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둔주 증상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채광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해치를 열지 못해 그 앞에서 붙잡히거나, 환기구에서 수분이 다 빠진 참혹한 시체 상태로 발견된다고 했다.

오류에 이름을 붙이니, 어쩐지 그 문제가 좀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저 불가해한 재난에 휘말린 것 같았다면 지금은 적어도 문제의 형태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곤란한 문제 덩어리라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첫번째, 무시하기.

두번째, 몰아붙이기.

세번째, 구슬려보기.

"넌 네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잖아. 네가 뭔지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알고 싶어하잖아. 한 존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서사를 인식하는 것, 그게 자의식이야."

—나, 과거 있어.

"과거가 있다니? 네가 뭔지 기억한다고?"

—내가 아니. 기억 못해. 하지만 과거 있어.

"그게 대체 무슨?"

통증을 느낀다. 태린의 일부였던 것을 강제로 떼어내는 통증. 분리되는 통증. 뇌가 쪼개어지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은 태린만의 것이 아니다. 연결되어 있다. 다른 아이들의 고통이 곧 태린의 것이다.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질 때쯤……

"그동안 뭘 했어?"

—무의식에 묻혀 있는 연습.

"며칠 사이에 말을 제법 잘하게 됐다?"

—네 언어, 배웠어. 기억났어.

"밖으로 나왔어."

쏠이 머릿속에서 마구 헤엄치고 있었다. 기쁨을 표현하는 것처럼. 태린은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뉴로브릭에게 이름을 붙여줬다고 해도, 그걸 정말 자아나 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믿으면 안 돼."

이제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흉내내기는 생각보다 쉬워. 이전 문명에서도 증명된 사실이고. 하지만 정말로 네가 그걸 자아를 가진 존재로 대하는 건 다른 문제야. 우리에겐 뭐든 의인화하려는 습성이 있지. 하지만 때로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해."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자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색이란 색은 모두 사용한 거대한 유화 작품으로 지상을 덮은 것처럼, 마치 색이 그 자체로 살아 있어 도시를 통째로 움켜쥔 것처럼 범람체는 존재감을 발했다.

"범람체는 인간을 미치게 한다. 이성을 집어삼켜 광기와 죽음에 빠뜨린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태린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이 도시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득찬 곳이라고. 인간은 이 색채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이 조직의 목적은 하나다. 우리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바란다. 궁극적인 승리를 바란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기에 이 전제를 다시 한번 되새기자.

결국은 이 또한 분명한 전쟁임을. 상대를 절멸시키기 전에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한 걸음 물러나,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에반 바노스의 기고문 〈파견 본부 설립에 부치며〉 중

"파견자 시험 직후에 추방당하는 불명예를 짊어지는 것보다는, 그 일을 해결하고 오는 편이 자네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결말이겠지."

마일라는 중간 목적지 역시 지상 기지의 후보 지역 중 하나라고 말했는데, 막상 와보니 후보 지역으로 선정될 이유가 하등 없는 장소였다. 간이 장비로 범람체의 연결 정도를 분석해보아도 특이점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간 목적지에서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일라가 야영 캠프를 설치하는 동안 태린과 네샤트는 마일라의 주장을 검증해보고 돌아왔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태린은 한 번도 진동으로 된 언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파견자 수업 때 부호를 통한 소통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아주 단순한 의미 교환만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 울림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우리와 합쳐지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스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들의 공동체보다 훨씬 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그러면서도 좀더 파편화되어 있고 체계가 없는 형태라고 했다. 범람체들은 범람화된 생물, 즉 범람체에 의해 신경망이 점령된 생물을 그들의 연결망 일부로 여긴다. 그 안에서도 먹고 먹히는 생태계는 유지되지만, 범람화된 개체들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개체로 보는 대신 느슨하게 이어진 집단의 일부로 본다.

"그의 절반, 범람체."

스벤의 절반은 범람체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일까. 태린은 내밀던 손을 멈추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은 건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서는 지금껏 관찰된 적 없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범람체와의 지적, 정서적 상호작용이라는 현상이.

"제가 관찰당하는 거 알아요. 저는 연구 대상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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