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평성세를 일군 장수왕과 남북조 시대의 전개

(서기 394~491년, 재위기간:서기 413년 10월~491년 12월, 78년 2개월)

장수왕 시대는 중국에서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종결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때문에 중국 대륙은 다시 한 번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고구려는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세력 팽창의 기회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참수하여 소수림왕 이후 지속적으로 계속되던 고국원왕에 대한 복수전을 마무리한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09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413년 10월에 광개토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고구려 제20대 왕에 올랐다.

1. 문자명왕의 영토수호 노력과 나제연합군의 협공

(?~서기 519년, 재위기간:서기 491년 12월~519년 모월, 약 28년)

문자명왕은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의해 확장된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연합군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문자명왕은 나제연합군에 밀려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다시 축소되기에 이른다.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며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맏아들 고추가 조다인데, 그가 결혼 후에 일찍 죽음에 따라 장수왕은 손자인 나운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장손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기 491년 12월에 장수왕이 죽자 나운은 고구려 제21대 왕에 올랐다.

1. 안장왕의 치세와 국제정세의 변화

(?~서기 531년, 재위기간:서기 519년 모월~531년 5월, 약 12년)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태어난 연도도 알 수 없다. 서기 498년(문자명왕 7년) 7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고구려 제22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할 당시 중국은 남쪽엔 양 왕조, 북쪽엔 위 왕조가 서로 세력을 다투며 대립하고 있었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들 양국 관계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와 양의 비중을 똑같이 두고 양쪽과 모두 화친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위는 자신들이 먼저 생긴 국가일 뿐 아니라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곤 하였다.

1.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안원왕의 복구 노력

(?~서기 545년, 재위기간:서기 531년 5월~545년 3월, 13년 10개월)

안원왕은 문자명왕의 차남이며, 안장왕의 아우로 이름은 보연(寶延)이다. 안장왕은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보연을 자주 궁중으로 불렀다. 보연은 키가 7척 5촌이나 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인품 또한 뛰어나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형인 안장왕은 그를 무척 총애하였고, 결국 계승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죽자 보연은 고구려 제23대 왕에 올랐다.

동위는 산동 지역의 일부가 백제의 영역이라는 점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의 부탁과 상관없이 백제를 공략했다. 이 때 백제의 대륙기지는 529년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의 침략으로 매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위의 공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백제는 양나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양나라는 고구려와 동위와의 관계를 생각해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결과 백제의 대륙기지는 붕괴되어 동위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때부터 백제는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의 계속되는 패전과 고구려의 위축

(?~서기 559년, 재위기간:서기 545년 3월~559년 3월, 14년)

양원왕은 안원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원왕 3년인 서기 5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45년 3월에 안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4대 왕에 올랐다.

신라의 강성으로 삼국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또 하나의 세력이 고구려의 서북쪽 변방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북위의 멸망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돌궐이 어느덧 거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51년 가을에 그들은 고구려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9월에는 평양성 북쪽의 신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그들과 대적하게 하였고, 고흘은 뛰어난 용병술로 군대를 인솔하며 돌궐군 1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1. 평원왕의 화친정책과 수나라의 강성

(?~서기 590년, 재위기간:서기 559년 3월~590년 10월, 31년 7개월)

평원왕은 양원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양성(陽成)’이다[중국 사서에는 ‘탕(湯)’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59년 3월에 양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5대 왕에 올랐다.

1. 영양왕의 강병책과 수나라의 침입

(?~서기 618년, 재위기간:서기 590년 10월~618년 9월, 27년 11개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지속함에 따라 영양왕 시대는 고구려와 수의 세력다툼이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는 네 번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고,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전면전을 펼친다.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이자 평원왕의 첫째 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원(元)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90년 10월에 평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신책구천문(新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통달했고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다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전쟁에 이겨 이미 그 공이 높으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족함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어떠리

1. 온건주의자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반정

(?~서기 642년, 재위기간:서기 618년 9월~642년 10월, 24년 1개월)

영류왕은 평원왕과 그의 둘째 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이름은 ‘성(成)’이다. 서기 618년 9월에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구려 제27대 왕에 올랐다.

1. 마지막 왕 보장왕과 고구려의 몰락

(?~서기 682년, 재위기간:서기 642년 10월~668년 9월, 25년 11개월)

연개소문의 반정으로 보장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은 일찍부터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으나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했는데, 마침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히자 당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 침략을 획책한다. 이에 따라 당은 총력전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략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 아래 당나라의 침략에 대응한다.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인 대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장[臧, 또는 보장(寶臧)]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서기 642년 10월에 연개소문이 그의 큰아버지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 제28대 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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