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백제는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륙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1. 무령왕의 출생과 즉위 과정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동성왕은 20대 초반인 479년에 왕위에 올라, 약 22년간 재위하다가 40대 중반에 죽었다. 그런데 이 때 무령왕의 나이는 이미 40살이었다. 따라서 동성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일 수 없다.

아이는 축자국의 각라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도(島, 일본어로 시마 또는 사마)라 하여 도군(島君)이라고 불렀다.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대국화(大國化)를 이끌어낸 무령왕과 백제의 위상 강화

(서기 462~523년, 재위기간:서기 501년 11월~523년 5월, 21년 6개월)

무령(武寧)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의 양자이다. 462년 왜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며, 생시에는 주로 사마(斯麻)왕이라고 불렸다.

523년 5월, 그는 62세의 나이로 의욕에 가득 찼던 생을 접어야 했다. 백제의 대국화에 열정을 쏟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 ‘붕’은 황제의 죽음을 가리키고, ‘훙(薨)’은 왕의 죽음을 가리켰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붕’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자국의 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그런 시각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역사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고, 학문의 대상이다. 역사를 감정의 골 속에 가둬두면 둘수록 우리의 역사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임나에 대한 해석 문제는 이제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임나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1. 희대의 책략가 성왕의 불운과 추락하는 백제

(?~서기 554년, 재위기간:서기 523년 5월~554년 7월, 31년 2개월)

성(聖)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1. 위덕왕의 생존 전략과 국제 정세의 급변

(서기 525~598년, 재위기간:서기 554년 7월~598년 12월, 44년 5개월)

위덕(威德)왕은 성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창이다.

어쩌면 성왕과 위덕왕의 진짜 목적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불교를 지렛대로 삼아 왜국 조정에 친백제파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백제가 왜에 불교를 전파한 행위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모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1. 늙은 혜왕의 왕위 찬탈과 짧은 재위

(?~서기 599년, 재위기간:서기 598년 12월~599년 12월, 1년)

혜(惠)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계(季)다. 그는 위덕왕과 함께 성왕을 보필하였으며, 왕자 시절부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 왕권 강화를 위해 불제자를 자처한 법왕

(?~서기 600년, 재위기간:서기 599년 12월~600년 5월, 5개월)

법(法)왕은 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이다(『수서』는 그를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정황으로 봐서 혜왕의 아들이 맞을 것이다).

1. 한낱 서동에서 왕으로 등극한 무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와 『수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고, 『수서』는 『북사』의 기록을 따른 것이기에, 무왕의 혈통은 『삼국사기』와 『북사』의 내용 중에 어느 것을 옳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무왕은 여느 왕손과는 성장과정이 크게 달랐다. 대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제왕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마를 캐는 서동(薯童)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무왕의 왕위 승계 과정이결코 평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2.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 무왕과 격변하는 국제 정세

(?~서기 641년, 재위기간:서기 600년 5월~641년 3월, 40년 10개월)

무왕은 위덕왕의 서자이며, 이름은 장(璋)이다. 600년 5월에 법왕이 죽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고 있다.

1. 해동증자 의자왕과 백제의 패망

(?~서기 660년, 재위기간:서기 641년 3월~660년 7월, 19년 4개월)

의자(義慈)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641년 3월에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중국의 현인증자(曾子)와 같다 하여 ‘해동증자’로 불리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성충은 부여씨로서 백제 왕족 출신이며, 문리에 깊고 병법에 밝아 가히 하늘이 낳은 재사라 할 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꾀가 많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상고사』에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 동예)

백제사에 등장하는 낙랑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륙의 낙랑군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4군의 하나이고, 한반도의 낙랑국은 흔히 동예(東濊)로 불리던 나라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을 혼동하여 서술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왜곡된 역사 서술에서 기인한 것이다.

1. 다루왕의 조직 정비와 영토 확장

(?~서기 77년, 재위기간:서기 28년 2월~77년 9월, 49년 5개월)

다루(多婁)왕은 온조의 맏아들로 이름과 태어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0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도성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다가 서기 28년 2월에 온조가 죽자 백제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1.기루왕의 유화정책과 끝없이 이어지는 천재지변

(?~서기 128년, 재위기간:서기 77년 9월~128년 11월, 51년 2개월)

기루(己婁)왕은 다루왕의 장남이며, 언제 출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다루왕 6년(서기 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그로부터 44년 뒤인 77년에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재위한 사실을 감안할 때, 태어난 뒤 곧바로 태자에 책봉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은 원래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남겼지만,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달랐다. 서양의 드래곤은 인간이 물리쳐야 할 괴물로 인식되는 반면, 동양의 용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왕의 상징으로 쓸 만큼 신령스럽게 여겨졌다. 그런 탓에 서양에선 용을 물리친 자가 왕이 되고, 동양에선 용의 힘을 빌린 자가 왕이 되었다. 즉, 동양에서의 용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용은 인충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구석을 가졌다. 즉 머리는 낙타와, 뿔은 사슴과, 눈은 토끼와, 귀는 소와, 목덜미는 뱀과, 배는 큰 조개와, 비늘은 잉어와, 발톱은 매와,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1.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딛고 왕위에 오른 개루왕

(?~서기 166년, 재위기간:서기 128년 11월~166년 모월, 약 38년)

개루(蓋婁)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며, 출생 연도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28년 11월에 기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 계승 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루왕의 장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루왕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으로 보아 정실이 아닌 후실의 소생, 즉 서자일 것이다.

1. 초고왕의 영토 확장 노력과 신라와의 세력 다툼

(?~서기 214년, 재위기간:서기 166년 모월~214년 10월, 약 48년)

초고(草古)왕은 소고(素古)왕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개루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나 장자는 아니며, 서기 166년에 개루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1. 털북숭이 거인 구수왕의 20년 치세

(?~서기 234년, 재위기간:서기 214년 10월~234년 모월, 약 20년)

구수(仇首)왕은 귀수(貴須)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초고왕의 장남으로 214년 10월에 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구수왕은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했다고 전한다.

1. 모래 반쪽 인생 사반왕

(생몰년 미상, 재위기간:서기 234~234년)

사반(沙半)왕은 구수왕의 맏아들이다. 구수왕이 234년에 죽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의 묘호 사반은 ‘모래 반쪽’이라는 뜻인데, 그의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모래 반쪽에 비유될 정도로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1. 고이왕의 왕위 찬탈과 왕실의 분란

사반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고이(古)왕에 대해 『삼국사기』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2. 고이왕의 대륙 진출과 백제의 위상 정립

(?~서기 286년, 재위기간:서기 234년 모월~286년 11월, 약 52년)

고이왕은 개루왕의 방계 후손이며, 이름과 출생 관련 기사는 남아 있지 않다. 234년에 구수왕이 죽고 어린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1. 대륙백제의 영토 확장에 주력한 책계왕

(?~서기 298년, 재위기간:서기 286년 11월~298년 9월, 11년 10개월)

책계(責稽)왕은 청계(靑稽)라고도 불리었으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고이왕의 아들이기는 하나 장남은 아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 분서왕의 짧은 치세와 안타까운 죽음

(?~서기 304년, 재위기간:서기 298년 9월~304년 10월, 6년 1개월)

분서(汾西)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298년 9월에 책계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걸출하여 책계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전한다.

1. 비류왕의 한성 장악과 백제의 분열

고이왕 대 이후 백제는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여 산동 지역의 대방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고이왕의 대륙 정책은 그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로 이어져 대륙에서의 백제의 힘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이왕이 대륙 진출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행위를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사하고, 분서왕마저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 정책은 힘을 잃고 만다.

2. 분단 상황에서 이어진 비류왕의 40년 치세

(?~서기 344년, 재위기간:서기 304년 11월~344년 10월, 39년 11개월)

비류왕은 구수왕의 방계 혈통으로 보이며,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았다고 전한다. 그는 원래 평민이었다가 분서왕 재위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분서왕이 죽자 무력을 앞세워 한성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

1. 베일에 가려진 계왕의 즉위와 죽음

(?~서기 346년, 재위기간:서기 344년 10월~346년 9월, 1년 11개월)

계(契, 또는 설, 결, 글로도 발음됨)왕은 분서왕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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