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이 근초고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근구수왕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내용은 371년의 평양성 공략을 주도했던 사람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모두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은 그들에게 정사를 맡겨두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의문은 한반도 백제와 대륙백제로 나뉜 당시 백제의 영토 관리 체제를 이해해야만 풀린다.

한반도 백제는 당시 외척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던 진씨 일족이 정사를 맡아 다스리고, 대륙백제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형태를 이해해야만 『삼국사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구수왕도 왕위에 오른 뒤로는 근초고왕이 그랬듯이 한반도 백제는 외척인 진씨 일족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대륙백제의 정사를 주관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1. 침류왕의 짧은 치세와 불교의 전파

(?~서기 385년, 재위기간:서기 384년 4월~385년 11월, 1년 7개월)

침류(枕流)왕은 근구수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근구수왕이 384년 4월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침류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한 불교 전파이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한 것은 384년 9월이었다. 침류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크게 우대하고 공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마라난타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침류왕의 초청으로 왔다는 뜻이다.

1. 진사왕의 불행한 죽음과 백제의 위기

(?~서기 392년, 재위기간:서기 385년 11월~392년 11월, 7년)

진사(辰斯)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관미성은 대륙백제의 황하 이북 지역 최대 거점이었다. 때문에 관미성의 상실은 대륙백제의 힘이 황하 이남의 산동 지역으로 축소되었다는 의미였다(‘대륙백제의 위축과 관미성’ 참조).

이 한수 문제는 삼국사 전체의 구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한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곧 삼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에 한수(漢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본기」 온조 편의 백제 도읍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이 책의 편찬자들은 한수를 지금의 한강으로 보도록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륙백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능비문에서는 지금의 한강을 ‘아리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수를 모두 한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하수(河水, 황하)를 모두 한반도의 한강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392년에 점령한 ‘한수’ 북쪽의 11개 성은 모두 하수(황하) 북쪽에 위치한 백제의 요서군에 속한 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그의 수군 4만이 상륙한 곳이 아리수(한강) 이북이었다는 것은 396년 당시에도 한강 이북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392년에 광개토왕이 장악한 한수 이북의 10개 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한수 이북을 장악했다면 굳이 396년에 한강 이북을 재차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 굴욕의 왕 아신왕과 백제의 위축

(?~서기 405년, 재위기간:서기 392년 11월~405년 9월, 12년 10개월)

아신(阿莘)왕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며, 진사왕의 조카이다. 『일본서기』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아방(阿芳)’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였고, 『양서』에는 이름이 ‘수(須)’라고 되어 있다.

왜에 전해진 백제의 문화는 비단 칠지도와 같은 상징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가 일본사에 큰 의미로 남는 것은 백제의 발달된 선진문화와 학문의 전래였다. 거기에는 백제인으로서 일본에 건너가 학문과 기술을 전함으로써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3. 아신왕과 광개토왕의 지속되는 라이벌전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2. 온건주의자 전지왕과 해씨 세력의 득세

(?~서기 420년, 재위기간:서기 405년 9월~420년 3월, 14년 6개월)

전지(腆支)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 『양서』에는 이름이 영(映)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직지왕(直支王)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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