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892년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의 이름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만년에 그는 적장자인 장남 신검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신하들의 중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넷째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는 무리한 행동을 강행했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935년 3월에 신검이 반정을 일으켰고,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어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태봉을 세운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제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1. 비운의 왕 경애왕과 서라벌로 진군한 견훤

(?~서기 927년, 재위기간:서기 924년 8월~927년 11월, 3년 3개월)

경애(景哀)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1. 마지막 왕 경순왕과 천년왕국의 몰락

(?~서기 978년, 재위기간:서기 927년 11월~935년 11월, 7년)

경순(敬順)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경순왕은 곧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개골산의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그가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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