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깐헌 것이 어찌 그리 판에 박은 서울내기 그대로다냐. 싸납고 뺀들뺀들허고 시건방진 것이. 복천 영감은 그만 돌아서버릴까 했다. 그러나 기왕 내친걸음이었다.

저것 참말로 똑똑허네웨. 누가 콜라 묵을지 몰라서 그러간디, 저 쥐방울만헌 것이. 싸가지 웂기넌…….

그런데 복천 영감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모든 서울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니고 있는 그 몰인정이요, 매정함이었다.

언제나 차갑고 싸늘하고 냉정해서 삭막하기 엄동설한 같은 인심에 부딪힐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울분 같은 것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약삭빠르기 다람쥐 같고, 뻔뻔스럽기 쇠가죽 같은 낯짝인가 하면, 능청떨기는 백여우요, 억척스럽기는 땅벌 같은 종자들을 대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는 촌놈이라는 탄식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없이 살아도 늘 푸짐하고, 배가 고픈 대로 따뜻하고, 별달리 도와주는 것이 없어도 믿음직스럽던 고향의 인심은 그리움 저편의 머나먼 이야기였다.

서울 냄새가 진동할수록 마누라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고향의 그 정겨운 모습모습이 불현듯 코앞에 다가드는 것이다. 그건 괴로움이었다. 이기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누나, 이걸 마시면 정말 카아 소리가 저절로 나올까?"
"인제 마셔보면 알 거 아니니."
아이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복천 영감은 눈 가장자리를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자리를 고쳐앉아 꽁초에 불을 붙였다.

복천 영감이 혀끝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닌가 싶게 세게 혀를 차댔다.

공연시 목구녕이 포도청이란 말이 생겨나고, 먹성 좋은 한 입이 호랭이 아가리보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을 것잉가.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이제.

산동네 사람들은 가난한 것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살 길을 찾아 단봇짐을 싸들고 시골서 올라온 촌뜨기들이었다.

"맥 웂이 가난허게 살간디. 부자가 될라먼 물 한 그럭에라도 눈에 불을 켜야 허는 것이여. 근디 그리 야박시럽고 모지락시럽게 해갖고 부자가 되먼 워쩌자는 것이여 금메 사람이먼 사람짓얼 허고 살아야 사람이제."

"헹, 무신 놈에 시상이 바가지꺼정 푸라스틱인지 나이롱인지로 변해뿔고 지랄이여. 물맛 싹 떨어지게."

"와따, 나는 대나무로 맹근 소쿠리고 조리가 진짜배기로 정답고, 고런 것들이 푸라스틱에 밀려 급작시럽게 없어져가는 것을 봄스로 고향이 없어져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허는 소리제라."

열 효자보다 한 악처가 낫다는 말이 나이 들어갈수록 지당한 말로 느껴지고, 그럴수록 먼저 가버린 마누라가 야속하고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는 했다.

아무려나 강 영감이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은 같은 나이 또래에다, 고향이 같은 전라도이기 때문이었다.

엄동설한같이 차갑기만 한 서울 인심 속에서 그래도 살아갈 맛을 영 잃지 않는 것은 그런 일이라도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돈벌이가 좋다 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사기그릇과 계집은 내돌리면 금이 가는 법이었다.

"금메 말이요. 영기 이름을 듣기는 들었는디……."
마누라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와따 이 사람아, 워째 똑똑헌 귀신만도 못헌 소리럴 혀."

"나보담은 우리 아부지가 훨썩 잘허시는디, 우리 아부지가 쩌그 저 와 기신께로 우리 아부지헌티 한 자락 시키는 것이 좋겄는디, 워쩔깨라우?"

"아부지, 고것이 아니랑께라. 미국서 퍼붓어대는 원조민지 원조쌀인지 그 니기미 씨펄 것이 태풍맹키로 여름 한철로 끝나는 것이 아니랑께요."

남자 나이 마흔다섯이란 낮근력으로나, 밤근력으로나 이미 기울어진 해였다.

그 전 정치인들은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쌈박질하느라고 세월을 다 보냈는데, 정작 싸움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군인들이 눈치 빠르게 민심을 꿰뚫고 나섰던 것이다.

"와따, 나겉은 촌놈이 고런 것을 워찌 땅짐이나 허겄소. 그리 눈치 쌌음사 이도령 제치고 과거 급제럴 혔겄소."

그러다가 비만 한차례 지나고 나면 언제 물싸움을 했던가 싶게 서로서로 예전의 그 수국꽃 닮은 풍성한 웃음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어서 가리라 했다. 기필코 가리라 했다. 가서 그 땅에 다시 괭이질을 하여 씨를 뿌리리라 했다. 밀린 빚을 다 갚고, 훔쳐낸 소값도 톡톡히 치르리라 했다.

긍께로 예로보텀 머시라고 일렀소. 죄는 진대로 가고, 덕은 딲은대로 가는 것잉께 인심 잃고 살덜 말고, 척지고도 살지 말라고 안 혔읍디여.

근디 예나 이제나 부자덜언 워째서 그 쉬운 말도 못 알아듣는가 몰라. 허기사 더
말허먼 뭘혀. 바다는 메꿔도 사람 욕심은 못 메꾼다고 혔응께.

다 천년만년 살지 알고 그놈에 욕심 채우니라고 말싸심헌 것이 탈이제. 아이고, 그 징헌 놈에 욕심!

"긍께 말이오. 척지고 산 부자덜이 시상 뒤집어지고 엎어질 때마동 숭헌 꼴 그리 당허는 디도 정신덜 못 채리고 또 척지고, 또 웬수지고 허는 것 보면 사람 미련허기가 돼지 찜쪄묵을 판이요. 참말로 그놈에 욕심이란 것이 징허고 징헌 물건이단 말이오."

허기넌 사람 사는 한평생이 이러나저러나 빙신은 빙신인디. 그려도 배부른 빙신이 낫고 권세 있는 빙신이 난 법잉께. 고만 울어라, 고만. 이 애비넌 암시랑 안 혀, 이러나저러나 다 빙신으로 한평생 살다 가는 것잉께로.

두 자식의 손을 양쪽 손에 나눠 잡고 이렇게 중얼거리듯 하고 있는 복천 영감의 수척한 볼에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눈물로 흐린 시야에는 마누라의 얼굴과 큰아들의 얼굴과 푸르른 들녘이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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