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은 나의 처녀 장편소설이다. 서른두 살 때였으니, 36년 전이다. 그때 나는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민족의 거대하고 거룩한 문화유산일 수는 있으되, 불법(佛法)의 힘으로 외적(몽고의 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 술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것이 『대장경』의 주제이고, 그 소설을 쓴 목적일 수 있다.
‘팔만대장경’ 한 장, 한 장은 오늘날 보아도 상상을 초월하는 극치의 예술로, 보는 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수많은 영혼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대하고 칼칼하고 싱싱한 예술품의 가치를 쓰고자 감히 필을 든 것이다.
불타는 성전(聖殿)
초승달이 노송의 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제대로 어둠을 사르지 못하는 달빛은 희뿌연 안개를 일구는 듯싶었다.
염불을 하고 염주를 돌리는 것으로 불자의 일상(日常)을 살아온 것뿐 정작 세속의 자아는 달걀 속의 씨눈처럼 부화의 기회를 엿보며 은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염려 마시오. 나만 혼자가 아니라 우린 모두 혼자나 마찬가지요. 소문대로라면 적이 10만 기병(騎兵)이라는데, 말까지 타고 창검을 휘두를 10만 적병을 맞아 싸울 우리 천 명은 어차피 불더미 속을 헤쳐야 하는 한 마리 개미와 뭐가 다를 게 있겠소. 날 괘념하진 마시오."
일찍이 무(武)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지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이 아니었다.
무인이 지배의 쾌락에 탐닉하게 되면 충(忠)과 용(勇)을 함께 잃게 마련인 것이다. 그 대신 교활과 잔인을 얻게 되어 나라를 망치는 불한당 패거리로 둔갑을 하는 것이었다.
승(僧)이 도(道)의 규범을 잃고 재물의 마력에 취하게 되면 흉악무도한 산도적으로 변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 개째가 허공을 가르자 와아아―함성이 터져올랐다. 그리고 횃불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공격 개시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온통 화염으로 휩싸인 판전에서는 그칠 줄 모르고 석가모니불을 외우는 합창 소리가 낭랑하게 퍼져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도 거칠어지는 불길에 따라 차츰 윤기를 잃고 탄력을 잃어가며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수한 불티와 폭음을 남기며 지붕이 내려앉는 것으로 그 소리도 흔적을 감추어버렸다.
살례탑을 쏘아보고 서 있는 주지 스님의 입 언저리에는 엷은 비웃음이 바람결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 두개골과 저 구슬과······, 사내의 머리를 번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저것은 보석이 아니라 득도한 대승(大僧)이 사후(死後)에 남긴다는 말로만 들어온 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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