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고난의 길, 민족해방의 길,
벅찬 가슴을 억누를 수 없는 눈물 나는 길
김태영 박사(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질)
지난 백년의 세월, 우리는 어떻게 지냈는가?
지난 백년의 세월, 우리는 어떻게 싸웠는가? - P4

약산은 스스로를 직업 혁명가라고 했다. 그 혁명은 강도요, 악마인 일제를 내나라에서 몰아내는 혁명이요, 착취에 고통 받는 조선 민중을 해방시켜 진정한자유와 평등을 실행하는 혁명이다. - P4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를 거치며 우리는 일제의 악행을 능가하는 처참한 살육과 착취의 현장을 보았고, 민중들의 기본권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또 다시 희망을 본다. - P4

그러나 김종훈 기자는 젊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느낀다. 김종훈 기자의 말처럼 약산의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P5

반 토막 난 독립운동을 완수하는 그 길.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와 약산 김원봉의 길
참 도발적이게도 난 약산 김원봉을 통해 ‘반 토막 난 우리 독립운동사‘를 말하고 싶었다. 그만큼 ‘빨갱이 김원봉, 공산주의자 김원봉‘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무엇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당당하게 약산을 빨갱이라 외치는 그들에게 "좀 알고 떠드시오"라는 말과 함께 《약산로드 7000km》를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약산관련 이야기와는 좀 더 다르게 쓰고자 했다. 좀 더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를치밀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지난 1년을 걷고 또 걸은 이유다.
약산의 고향 밀양을 시작으로 서울, 지린, 베이징, 상하이, 난징, 우한, 광저우, 구이린, 치장, 충칭을 추적했다. - P23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거나 강제 이장을 가능하게 하는 법안은 지금까지 모두 다섯 번이나 발의됐다. 2007년 김원웅 전 의원(현 광복회장)이 처음 발의했는데 시간만 허비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013년 김광진 전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 역시 마찬가지다. 친일 인사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개정안에 규정했지만 제대로 된 논의 한 번 못하고 폐기됐다. 2016년과 2018년 6월, 같은 해 8월에 발의된 개정안 모두국회 상임위 회의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 P35

2019년 여름, 제21대 광복회장에 당선된 김원웅 전 의원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어떻게 친일파와 애국지사가 국립현충원에 함께 묻혀 있을 수 있냐‘면서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중에는 일부러 국립현충원에 묻히는 걸 거부한 애국지사도 있다‘고 성토했다. - P35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무덤에 세워진 비석 옆에 최소한 그것과 같은 사이즈의 비석에 ‘친일‘ 공적을 기록하면 된다.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후손들은 떠나지 말라 해도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옮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를 위한 ‘운동‘을 준비 중이다. 여러 시민들과 뜻을 모아 현충원에 잠든 친일파 무덤 옆에 공적으로 친일공적비를 세울 것이다. 지금은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 중이다. - P37

"장택상은 수도청장이 된 뒤 이승만의 정적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때려잡았다. 약산과 조소앙이 붙잡혀갔다. 약산은 붙잡혀갈때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채워서 끌고 갔다. 약산은 수모를 당한 뒤 나에게 와사흘을 울었다. 그는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고 울면서 말했다." - P39

정정화 지사는 약산보다 2년 늦은 1900년 여름에 태어났다. 대한민국 여성독립운동가의대표 격이며 애국지사 김의한 선생과 1910년 열 살 나이에 결혼했다. 그의 시아버지는 구한말 고위 관료를 지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고문 역할을 맡은 김가진 선생이다. 그는 1920년 먼저 상하이로 망명한 남편과 시아버지를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했다. 그녀는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아서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10여 년간 자금 모금책,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중국 망명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이동녕, 백범 김구 등 임정 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며 임시정부의 안 살림꾼으로서 임정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의 홀대 속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오랫동안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구가 암살된 뒤에는 한국 전쟁 중 남편 김의한 마저 북으로 납북됐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치렀다.
1982년에야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1년 영면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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