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예나 지금이나 부를 상징합니다. 돼지, 그것도 살진암퇘지를 집안 문장으로 사용한 걸 보면 스크로베니 집안은애초부터 돈에 대한 욕심을 숨기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듯해요. 아무튼 단테는 돈놀이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스크로베니 집안의 사람을 지옥불에 고통 받는 죄인으로 그려냈습니다. - P52

교회 건물에는 중앙의 제대와 가까울수록 중요도가 높은 그림이 들어갑니다. 그러니 제대 입구 근처에 자리한 그림은 예배당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 P53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탐욕을 경계하라는 거죠. 자신은 탐욕을충분히 멀리하며 돈을 모았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 P55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구원 앞에서 참솔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이토록 아름답고 거대한미술작품을 창조할 정도였으니까요. 실제로 구원에 대한 욕망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작품의 생산량을 어마어마하게 증가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죠. - P57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 구원을 향한 열망이야말로 중세, 그리고 이어지는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 동기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죄가 커질수록 성당의 크기도 커지고 그 안의 장식도 아름다워지지요. - P61

프레스코란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입니다. 벽에다 석회 반죽을 얇게 바른 다음, 반죽이 마르기 전 신선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리면석회 반죽 자체가 마르면서 안료가 착색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색이 잘 보존됩니다. 미술사학자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중에 ‘견오백지천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단 그림은 오백 년, 종이 그림은천 년 간다는 뜻이죠. 그런데 프레스코화는 잘만 다루면 종이보다도 더 오래 가요. - P67

게다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면 색의 순도가 아주 높아서눈에 확 들어옵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도 막상 들어가면 색채가너무 생생해서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 700년 전에 그려진그림인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거든요. - P67

프레스코 기법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 바탕이 뒤틀리거나 변형되면 그림이 손상되기 때문에 두꺼운 벽체 위에만 쓸 수 있습니다. 또한 석회는 습기에 약해 습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사용하기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도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졌지만 제대로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물죠. 하지만 이탈리아 중부처럼 건조한 기후를 가진 곳은 프레스코 기법이 잘 유지됩니다. 이 밖에도 여러 단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회 반죽이 마른 뒤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기 때문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화가는 하루하루 그날 그릴 만큼만 석회 반죽을 바르고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 - P68

그림 하나하나를 제대로 보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래서 유럽여행은 조금 여유 있게 일정을잡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보다가 지쳐버리는 것보다는 스크로베니예배당과 같은 대작 하나를 제대로 보고 오는 게 더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P72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은 세 가지를 알아야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해야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 토마스 아퀴나스 - P74

충분히 스타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하루아침에 모든 걸 버리고 헐벗은 발로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죠. 지친 도시 빈민들은 그 행동에 크게 감동했고 그 사람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죠. 이 놀라운행적들은 전설이 되어 시골 어린이에게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 P76

이제 알려주세요. 누구인가요?
프란체스코 성인입니다. 1182년경에 태어나 1226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세 사회에 큰 가르침을 줬지요. - P76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나고 활동한 곳은 이탈리아 중부의 아시시라는 도시입니다. 성인은 여기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들자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세우게 되지요. 이 수도회가 바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인데,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함께 스스로 노동하며 최소한의 탁발로 연명했기 때문에 흔히 탁발수도회라고 부르곤 합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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