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의 통념에 의하면 5세기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몰락을 계기로 유럽의 역사무대가 지중해에서 유럽대륙으로 옮겨가면서 명실상부한 유럽세계가 성립되었다. 이 새로운 세계에는 전래의 그리스·로마문명과 외래의 기독교 및 게르만적 문명요소가 융합된 이른바 ‘유럽문명‘이 형성되었다. 30여개 문명을 탄생시킨 인류의5~6천년 문명사에서 유럽문명은 생몰년(生沒)으로 보면 가장후발한 문명으로서 그 역사는 고작 1,500여 년밖에 안 된다. - P4
미지의 세계는 더 말할 나위 없거니와 어지간히 안다고 하는 세계도 눈에 초롱불을 켜고 답사하면서 찬찬히 살피는 견문(見聞)과 밖에서 귀동냥으로 얻어듣거나 책갈피에서 어설프게 익히는 전문(傳)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겉치장에 이골이 난 유럽 같은 ‘문명세계‘를 거닐다보면 그러한 괴리를 현실에서 더욱더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괴리는 겉치장에 감춰진실상, 즉 민낯을 제대로 가려냈을 때만이 발견 가능한 것이다. - P5
흔히들 민낯이라고 하면 허구나 위작을 함께 연상하고 부정적으로만 이해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어원으로 따지면 ‘민‘은 꾸밈이나덧붙임이 없다는 뜻의 접두사로서, 민낯은 화장을 하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얼굴을 가리킨다. 이렇게 민낯은 왜상(歪像)이나 허상이 아닌, 실상이나 본연이라는 긍정적 함의를 지닌 보통명사다. 그런데 허구나 위작이 난무하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그 의미가 부정 일변도로 와전되어버렸다. 따라서 필자는 졸문에서 그 함의야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관계없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 한해서는 일괄 ‘민낯‘이란 표현을 쓰려 한다. - P6
이것이 필자 나름대로 짚어본 유럽문명의 현주소일진대, 애당초무엇이 그 민낯이고 또 어떻게 하면 그 민낯을 제대로 드러낼 것인가가 난제로 떠올랐다. 책제목의 선택부터 그러했다. 문명사적 시각에서 아시아를 ‘문명의 용광로‘로, 라틴아메리카를 ‘문명의 보고‘로, 아프리카를 ‘문명의 요람‘으로 규정짓기는 그 문명의 단순성과 투명성으로 인해 비교적 쉽고 단출했다. 그러나 원래부터가 스펙트럼이 다양한 융합적 성격을 지닌 유럽문명에 한해서는 결코 가볍게 단정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고 끝에 가까스로 짜낸 것이 ‘문명의 모자이크유럽을 가다‘이다. 문명교류사적으로 유럽을 ‘문명의 모자이크‘로 윤색한 셈이다. - P6
학여불급(學如不及)을 재삼 되새기며 2021년 10월 30일 옥인학당에서 정수일 - P9
3) 유럽은 6대주 가운데서 지세가 가장 낮은 대륙으로 평균 고도가340m에 불과하며, 고도 200m 이하의 평원지대가 전체 면적의 60%나되어 6대주 중 평원 비중이 가장 높다. 대서양 연안에서 시작해 우랄산록까지 이어지는 대유럽평원의 너비는 수천km에 달한다. 이대평원지대는 몇개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품고 있다. 평원이 많은 만큼 산지는 흔치 않으며 높은 산도 몇 안 된다. 해발 2,000m 이상의 고산지대는 총면적의 2%에 불과하다. - P17
8) 주지하다시피 사계(斯界)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유럽 사상과 문화의 2대 근원이라는 주장은 마냥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실상 이 두 사상의 발상지와 성숙지는 유럽이 아닌 서아시아 일원(오리엔트, 오늘의 팔레스타인과 이란)이며, 후(後出)한 ‘유럽사상‘과는 어느 모로 보나 직접적 연유성이나 계승성이 희박하다. 이 때문에 유럽 사상과 문화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2대 근원설‘은 증빙성이 약한 가설로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지론이다. 굳이 유럽사상의 근원을 추적한다면 유입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나 헬레니즘이 아니라 에게문명이나 그리스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할 것이다. - P2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문명은 그 생성 과정에서 교류를통해 이질적인 세계의 여러가지 문명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치화폭에 착지한 각양각색의 현란한 모자이크처럼 다채롭고 찬란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역사가 이러한 사실들을 명백한 문헌 기록과 확실한 유적·유물로 고스란히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문명 ‘중심주의‘나 ‘우월주의‘의 주창자들과 추종자들은 이를 망각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 P20
그러나 오리무중으로 지지부진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지리학자 따찌셰프(Tatishev)가 드디어 한가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는 서로 다른 수자원의 원천과 식물의 분포라는 자연지리적 환경의경계를 근거로 우랄산맥 -우랄강(2.534km)-카스피해 - 흑해-보스포루스 해협(터키)을 기준으로 하는 경계 설정을 주장했고 그 설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남북 길이 2,000여km에 평균높이 300~500m의 나지막한 우랄산맥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로 공인되고 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경계선상에 경계탑 혹은경계비를 세웠는데 그 수만도 44개에 달한다. - P21
문명은 교류 과정에서 각이한 접변(接變, acculturation)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접변은 크게 선과(善果)와 악(惡果) 의 두가지 결과로 나타난다. 두 문명의 교류 접변으로 인해 각이한 문명요소가 긍정적 · 건설적으로 혼합되어 순기능적인 선과를 나타내는 현상을 융합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피전파문명의 해체나 퇴화같은 부정적 · 파괴적인 역기능을 초래하는(악과) 현상이 있는데, 여기에는 점변으로 인해 피차가 아닌 제3의 문명이 형성되는 융화融化 deliquescence)와 일방적 흡수로 나타나는 동화(同化, assimilation)의 두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문명교류의 성격이나 결과는 이상의 세가지 접변 현상에 근거해 판단한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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