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브룬 궁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게 말했다. "리더십을 형성하려면 지적·정신적·정서적 능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학습과 경험을 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라도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나를 보라." - P74

벨베데레는 ‘전망 좋은 테라스‘를 가리키는건축 용어인데, 상부와 하부로 이루어진 이 궁전은 이탈리아 출신 ‘사보이 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이 18세기 초반에 지었다. 사보이왕가는 1권 로마 편에서 소개했던 통일 이탈리아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가문이다. 오이겐 왕자는 넓은 부지를 구입해 공원을조성한 다음 하부와 상부 두 저택을 차례로 지었는데, 그 저택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구입해 벨베데레라는 이름을 붙이고 왕실의 예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벨베데레를 거처로 사용한 마지막 인물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제국이 해체된 후 벨베데레는 다른 궁전들처럼 박물관으로바뀌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부서졌지만 완벽하게 복구했다. - P74

상궁 전시장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그곳의 슈퍼스타는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키스>였다. 나도 이 그림이 아니었다면 굳이 벨베데레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P75

훈데르트바서하우스는 시정부가 지은 공영 임대주택이다. 외벽에 3원색을 칠한 이 집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까사 밀라‘처럼 직선이 없었다. 그가 설계한 교회와 호텔 등 다른 건물의 디자인도 다 그랬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지은 집은 용도가 달랐다.
가우디는 돈 많은 부동산업자의 의뢰를 받고 호화 연립주택을 지었고 훈데르트바서는 공영 임대주택을 설계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까사 밀라‘라고 할 수 있을까? 뿌리를 2층 발코니 안에 두고 밖으로 몸을 내민 나무들은 이 집에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 P89

훈데르트바서는 집만 잘 지은 게 아니라 말도 멋지게 했다. "직선에는 신이 없다" "진짜 문맹은 창조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것" "나는집을 고치는 의사"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표현했다. - P90

그는 이렇게 믿었다. ‘인간은 자연에 기생하는 생물이다. 얇은 피부를 옷으로 덮고 집에서산다.그집은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사회는 지구 행성의 자연환경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집을 지으면서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P91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덮어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자의반 타의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삼위일체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 P93

중앙역에서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빈에 대한 기억을 정리했다. 가장 뚜렷한 기억의 대상은 사람이었다. 요제프 황제, 시씨 황후, 모차르트, 클림트,
훈데르트바서…………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묻은 문화유산이었다. - P93

빈 중앙역에서 부다페스트 동역까지 기차로 세 시간이 채 걸리지않았다. 비행기보다 빠르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깊은길이라서 일부러 기차를 탔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차창밖풍경을 보면서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던 1989년을 생각했다. 그해여름, 늘그랬던 것처럼 많은 동독 시민이 헝가리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가을이 되자 동독의 공장과 학교와 병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엔지니어 · 교수·교사·의사·간호사를 비롯한 전문직 종사자 수십만 명이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99

그들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에 들어갔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않겠다고 하자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의 철조망을 걷어냈다. 친지방문과 방송교류를 통해 서독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동독 시민들은 열차와 자동차를 타거나걸어서 국경을 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들의 입국을 허락했다. - P99

길 위에 삶이 있다. - P100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은 거센탁류였다.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 존재하지않았다. 다뉴브(Danube), 도나우(Donau), 두너(Duna)는 모두 같은 강을.
가리키는 영어 · 독일어·헝가리어 이름이다. ‘푸르고 잔잔한 도나우의 물결‘이라는 나의 관념은 아마도 음악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 P100

19세기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같은 것이다. 특히 이바노비치의 곡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 원곡이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 P101

바실리카 입구에는 요한복음 14 장을 라틴어로 새겨 놓았다.
"EGO SUM VIA VERITAS ET VITA(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어지는 성서 문구는 다들 들어보았지 싶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하느님에게 갈 자가 없느니라." - P105

헝가리왕국은 슬라브족의 바다에 뜬 머저르족의 배였다. 이슈트반이 헝가리왕국을 세웠을 때 게르만족은 로마 가톨릭, 슬라브족은콘스탄티노플에 본부를 둔 그리스정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역사·언어·문화 등 모든 면에서 딴판인 머저르족이 종교마저 다른 상태로 살았다면 더 혹독한 시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역사의시간 속에서 민족이 흩어지고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이슈트반은국가의 통치자로서 민족의 문화적 고립을 완화하는 방책으로 로마가톨릭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을까?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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