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소매 옷을 입고 후드를 눌러쓴 사람들이 이어폰을 꽂은 채 서성이면서 이따금 앞이나 옆으로 스마트폰 쥔 손을 쭉 뻗곤 했다. ‘좀비플래쉬몹이라도 하는 건가?‘ 알고 보니 그들은 휴대전화로 증강현실(AR)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슈테판 광장은 원래 놀이터였다. 중세에는 거기서 부활절 행사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를 열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우리는 놀이를 즐기는 종이다. 뭘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만 달라질 뿐,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P22
오스트리아 국민은 대부분 독일어를 쓰고 가톨릭을 믿는다. 고대독일어에서 ‘동쪽 땅‘을 의미했던 국명 외스터라이히 (Österreich, 오스트리아는 이 단어의 라틴어 표기법에서 유래)는 이 지역이 옛날부터 독일어사용권의 동쪽 변방이었음을 시사한다. 켈트족, 라틴족, 슬라브족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와 뒤섞였는데 9세기에 프랑크왕국의 단일 행정구역이 됨으로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다른 국가로 발전하게되었다. 빈은 철기시대 켈트족이 들어와 요새를 만들었을 때 ‘빈도보나(Vindobona)‘라는 지명이 생겼고 B.C.1 세기 로마군이 점령하면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했으며 로마군의 성채 일대가 최초의 도심이 되었다. 12세기 들어 상업이 발전하고 십자군의 집결지가 되면서 국제도시로 발돋움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터를 잡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직위를 차지한 16세기 이후 중요한 도시로 떠올랐다.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두 번 물리친 이후 유럽 기독교인들은 빈을 이슬람의 서진을 막는 종교적 군사적 요충으로 받아들였다. - P24
링은 워낙 넓은 길이라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아야 그 모양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링을 따라 가상의 성벽을 세우고 바깥쪽의 건물들을 지우자 중세 도시 빈이 보였다. 그 큰 제국의 수도가 그토록작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울 남산 전망대에서본 한양도성이 떠올랐다.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 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 P26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힌 제국의 수도라면 그렇게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고 두꺼웠던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던 두려움을 드러낸 건축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감정을 이겨냈기에 그 성벽을 길로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 P27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 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슈테플하단에 매달아 두었던 품메린이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의 폭격에 맞아 크게 부서지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무게가 4톤이나 늘어난 두 번째 품메린을 만들어 슈테판 성당의 북탑인 ‘독수리탑‘에 걸었다. - P27
기도의 힘이 모자라서 신의 가호가 내리지않은 게 아니었다. 세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없어서 비극을 막지못했다. 30여년 후 페스트가 또다시 덮쳤을 때 빈의 방역 담당 관리들과 의사들은 첫 번째 대유행 때 저질렀던 오류를 되새기면서 적극대처해 피해 규모를 크게 줄였다. 비를 맞고 선 페스트조일레를 보면서 그들을 생각했다. 인간은 얼마나 무지하며 무력한가. 그러면서도또 얼마나 지혜로우며 용감한가. 삶은 때로 얼마나 허망하며 또 얼마나 질긴 것인가. - P32
링 주변은 공공건물뿐 아니라 민간주택도 엄청나게 크다. 도대체갑부가 얼마나 많았기에 저택을 이리도 많이 지었을까 의아했는데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집들은 대부분 다세대주택이었다. 링 주변의 택지를 매각할 때 필지를 크게 잘랐기 때문에 주택도 크게 지을수밖에 없었다. 택지를 매입한 빈의 귀족과 신흥 부자들은 자본주의적 해법을 찾았다. 여러 가구가 살 집을 지어 자기네가 살 공간을 뺀나머지를 임대한 것이다. 이런 집을 ‘친스하우스(Zinshaus, 셋집)‘라고한다. 나중 구도심을 재개발할 때도 낡은 주택을 헐고 친스하우스를지었다. 결국 구도심의 오래된 주택과 좁은 골목이 다 사라져, 빈은도로를 따라 규모가 큰 공공건물과 다세대주택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도시가 되었다. - P41
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활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풀과 나무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년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 P53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프리스>, 제체시온의 슈퍼스타. - P54
‘비더마이어 시대‘ ‘비더(bieder)‘는 우직하다는 뜻인데 조롱하는 느낌이 살짝 얹혀 있다. 비더마이어라는 인물은 여러 독일 작가들의 다양한 문학 작품을통해 만들어졌다. 직업은 시골 학교 교사이고 성격은 우직한데 생활태도는 성실 근면하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가족의 행복을 최고의가치로 여기는 그는 소박한 가구를 갖춘 작은 집에 살면서 텃밭을 가꾼다. 일상의 작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며 조용하게 사는, 요즘 말로하자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 이다. - P58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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