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콘테의 세계지도
사누도가 집필한 《십자가에 충실한 자들의 비밀의 책》에 들어있는 지도로, 14세기 유럽인의 세계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 P613

결국 수 세대의 연구 끝에 《지리학》은 낡은 지식이 되었다.(Vagnon 2019b, 115) 
이 책이 가진 역설이 그것이다. 중세적사고의 탈출구를 찾던 14~15세기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고와방법론을 구하기 위해 2세기에 나온 고전에서 출발했다. 이 책은 많은 자극을 주었지만 그 내용은 너무 낡은 것이어서 오히려 새로운 내용을 찾도록 촉매 역할을 한 것이다. - P618

캉브레의 주교이자 추기경인 피에르 다이가 1410년경에쓰고 1480~1483년경 루벵에서 출판된 책으로, 제목은‘세계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세계 각지의 지리 정보를 제시하되 여기에 더해 책력, 천문, 점성술, 논증, 신학적 내용 등 다양한 정보를 망라하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콜럼버스의 사고 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주경철 2013, 125) - P618

프라 마우로의 지도
1450년경 베네치아에서 제작한 지도로 서구의 해상 팽창 항로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 P623

관체족
카나리아제도 테네리페섬에 고대부터 거주해온 관체의 생활을 복원한 관체박물관 전시 모형이다. - P626

군사 공격, 전염병 확산, 노예화, 생태 환경 변화, 유럽산 작물 재배 등 이 섬들에서 일어난 일들은 장차 유럽의 해외 식민지에서 일어나게 될 일들의 축소판이었다. 말하자면 대서양상의 섬들은 ‘행운의 섬‘이라는 이름과 달리 유럽 식민화의 불행한 모델 역할을 하였다. 다른 섬들도 유사한 상황을 맞았다. - P628

이 시기 지도에는 카나리아, 마데이라, 아조레스 같은 제도들이 실제보다 과장해서 크게 그려져 있는데, 교역 허브로서중요한 의미를 띠기 때문이었다. 이 섬들은 말하자면 유럽의‘첫 번째 신세계‘라 할 수 있으며, 대서양 체제 네트워크의 첫출발점이고 식민화의 실험실 역할을 했다. - P629

포르투갈이 그토록 강렬한 해외 팽창의 힘을 가지게 된 원인으로 이 나라가 처한 독특한 이중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은 두 가지 의미에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였다. (주경철 2008, 2장) - P632

첫째, 이 나라는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 P632

둘째, 이 나라는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의 해외 팽창은 선진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나갔다고 할 수 있다. - P633

중요한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데이라(1419), 아조레스(1427), 보자도르곶(1434),  기니아만(1460년대), 적도(1473), 콩고강(1485~1486), 희망봉(1488),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해 (1497). - P638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양국은 알카소바스(Alcáçovas)조약(1479. 9. 4)으로 해외 탐사 방향을 나누었다. (엘리엇, 1장) 이 조약은 여러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이 조약의 핵심은 이사벨 여왕의 카스티야 왕권(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쳐져서 조만간 에스파냐가 된다) 계승 문제였다. 포르투갈 측이 이사벨의 왕위 승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국의 후보인 후아나(Juana)를 밀어 갈등이 벌어졌는데, 이 문제에대해 양국이 합의하여 다툼을 끝내고 이사벨의왕권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이베리아반도 내 정치 문제를 매듭짓는 한편, 차제에 양국의 해외 팽창에 관한 방향 설정을 했다.
에스파냐는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지고 포르투갈은 나머지 섬들, 곧 마데이라와아조레스, 카보베르데를 영유하며, 더 나아가서 카나리아 남쪽에서 기니 방향으로 앞으로발견될 땅들에 대해서도 포르투갈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에스파냐는 서쪽과 북쪽으로 해상 팽창의 방향이 정해진 셈이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에스파냐에 입국하기 5년 전에 이미 이나라는 아프리카 방향의 진출을 포기하고, 탐사 방향을 서쪽으로 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노예무역을 피하지는못했다. 1525년부터 콩고강과 기니만에서 이스파뇰라,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지로 노예를직송했다. 포교에서 시작하여 노예무역으로 귀결되는 비극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디아스는 더 나아가서 인도까지 가고 싶었으나 선원과 간부 들이 계속 전진하는 데에반대해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프리카 남단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봉우리를 보고 ‘폭풍우의 곶(Cabo das Tormentas)‘이라 명명

했으나, 나중에 포르투갈 국왕이 긍정적인 이름을 부여하자는 의미로 ‘희망봉(喜望峰, Cape ofGood Hope)‘으로 다시 명명했다. 그는 1488년12월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잠깐 희망봉 지역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Fauvelle, 264~267)희망봉 지역은 1500년경부터 유럽인에게알려졌다. 수에즈운하 이전 시대에 아시아로가는 모든 배들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므로 희망봉은 여러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우선 대서양과 인도양의 경계로서 선원들이 항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조 지점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비록 바이킹시대에 스칸디나비아 주민 일부가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적은 있으나,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이 되지는 못했다. 이와 달리 근대 국가가뒤에서 강력하게 지원하는 콜럼버스의 항해는세계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이 현상에대해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쇼뉘는 이렇게 표현한다. - P657

"중국인들은 할 수 있었으나 원하지않았다. 오스만튀르크는 원했으나 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인들과 에스파냐인들은 원했고 할수 있었다."(Vincent, 143, Chaunu에서 재인용) - P657

1492년 극적으로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계획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 요인이작용한 결과다. 콜럼버스의 기획이 성공 가능성은 낮으나, 혹시라도 이웃 국가가 먼저 시도하여 성공하면 에스파냐에 타격이 클 것이라는루이스 데 산탄헬(왕실 서기로서 재정 문제를 답당했던 관리)의 설득이 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처럼 경제적 이해타산만으로 결정된것은 아니다. 1492년은 에스파냐로서는 실로
‘기적의 해(annus mirabilis)‘였다. 무엇보다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해였다. 8세기 이래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와 있던 이슬람 세력을 점차 밀어내다가 이제 마지막 근거지인 그라나다를 최종 함락한 것이 같은 해 초였다. 콜럼버스 자신도 1월 2일 알람브라 궁성에 기독교 깃발이 날리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이 사건은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복수로 여겨졌다.

콜럼버스는 기함(旗艦) 산타마리아호와 니냐호,  핀타호 등 3척의 선박을 구했다. 세 척 모두 길이가 20미터 남짓한 소형 선박이었다(24×11미터의 테니스코트와 비교할 만하다). 작은를 선택한 이유는 재정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원래 낯선 지역으로 탐험하는 배는 작은배가 더 유리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1492년 8월 3일 팔로스(Palos)항을 출항한 콜럼버스일행은 9일 후 카나리아제도에 도착해서 약간의 수리를 한 후 다시 항해를 속행, 10월 12일새벽 드디어 구아나아니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라고 다시 이름 지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법적으로 판단해보면 알카소바스조약을 위반한 것이 맞다. 그의 항해는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의 탐험 영역인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어서, 이를 감지한 콜럼버스는자기가 항해해간 곳이 카나리아제도와 같은 위도라고 주장했다. 에스파냐의 후속 조치는 2차항해를 시도하고 교황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4번의 칙서를 통해서에스파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두 국가간 해상 사업의 경계를 다시 획정하고자 했다.
교황이 제안한 것은 아조레스제도 서쪽 100리그가 구분선인데, 포르투갈의 강한 항의로 양국이 직접 합의하여 1494년 토르데시야스조약을 체결했다

지역을 발견한 듯이 썼다. 이후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가 세계지도를 제작할 때 신대륙 이름을 그의 이름에서 따와 결정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이런 상징적 행위를 통해 이땅은 지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발견‘은호기심의 행위가 아니라 정복 행위다. ‘발견‘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직접 가서 확인하고,
우리의 마음속 지도를 재정리하고, 실제로 우리 세계 내로 편입시키는 행위다. 그것은 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칼끝으로 하는 행위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교역을 지배한다. 세계의 교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결국 세계 자체를 지배한다.
Whosoever commands the sea commands thetrade; whosoever commands the trade of theworld commands the riches of the world, andconsequently the world itself. A Discourse ofthe Invention of Ships, Anchors, Compass,&c.‘
영국의 군인이자 시인인 월터 롤리 경(SirWalter Raleigh, 1552?~ 1618)이 한 이 말은 근대유럽인의 심성을 잘 나타낸다.

알메이다의 기본 전략은 ‘바다를 장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부 거점들만 설립하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해로를 지배하는 것이유리하며, 내륙 영토 지배에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면 오히려 불리해진다고 보았다. 국왕 마누엘 1세에게 "요새가 많을수록 전하의 힘이 약해집니다. 대신 바다의 힘이 강하면 인도는 전하의 것입니다" 하는 보고를 올린 것이그런 의미다.

이 시점 이후 약 25년 동안 피리 레이스의흔적이 사라진다. 이 시기 해군을 담당한 인물은 제독이자 알제리 태수인 카이르 앗 딘(Khayral-Din, 일명 바르바로사(Barbarossa, ‘붉은 수염‘),
1475~1546)으로 원래 지중해 해적 출신이었다.
형 오루스 레이스(Orus Reis)와 함께 약탈 행위를 하다가 1516년 오스만제국의 해군 지휘관으로 고용되어 알제를 정복하고 술탄이라고 선언했다. - P697

교황 피우스 5세가 오스만 세력의 지중해 팽창을 막아야한다며 일종의 십자군운동을 호소해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갤리선 200척과 갈레아스 6척으로 강력한 대군을 구성했고, 오스만제국은 약 250척의 갤리선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갤리선 간에 벌어진 해전에서 신성동맹 측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통상 이야기하는161TEECUDER대로 유럽이 오스만제국의 기세를 꺾어놓은 결정적 전쟁이 아니었다. 복수를 원했던 셀림 2세는 선단 재건을 결정했으며,곧바로 재원을 부어서 갤리선 250척을 건조하여 유럽을 놀라게 했다. 신성동맹 측도 다시 준비했으나 양측 모두 다시 전투를 벌일 의사는 없었다. 결국 레판토 해전에서 결정적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승자는 영토를 얻은 게 없고, 패자는 여전히 키프로스를 보유하고 마그레브를 통제했다. - P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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