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과 곶자왈을 품은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에겐 이상향의 세계였습니다. 거센바다와 거친 화산 땅을 일구며 사나운 바람에 맞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신선이산다는 한라산은 마음속의 이어도였습니다. 꿈 없이 갈 수 없는 땅이었지요. 백두산이 북녘 땅 만주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내는 곳이라면, 한라산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태풍을 온몸으로 껴안는 우리 국토의 파수군인셈이지요. - P9
봄...겨울 잠에서 깨어나는생명의 노래
가장귀 덮었던 눈꽃을 녹이는 게 햇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우듬지 감쌌던 눈송이 떨치는 게 스쳐가는 바람인 줄로만 여겼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벌거벗은 나무에도 체온이 있었다는 걸 미처몰랐습니다. 햇살 쏟아지고 바람 부는 날, 겨울눈 꽁꽁 덮은 차가운 서리꽃 그 눈부신 아픔 떨쳐내려고 뿌리에서 가장귀로, 줄기에서우듬지로 수직의 혈관을 고달프게 역류하는 나무의 치열한 줄소리를 예전엔 정말 몰랐습니다. 나무는 저마다 한 그루 시를 품고 삽니다. 바람 불면 제 몸 흔들어노래하고 제 살 햇살에 비벼 고이 꽃 한 송이 피웁니다. 머나먼, 우주의 시간을 몰고 오는 바람의 영혼이 맨살의 연둣빛으로 올올이 스밀 때 나무는 속수무책의 가슴으로 울음을 웁니다. 죽어간 살들은 안에서 고여 산 것들을 떠받쳐 일으켜 세우고 만져질 수 없는 모든 그리움을 향하여 나무들은 날마다 한 움큼의 수액을 쏟습니다. 가장 혹독한 계절 벌거벗고 지내며 뜨거운 피 쉼 없이 뿜어 올리는나무의 조용하면서도 결곡한 전율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 P15
불가의 화두 중에 ‘줄탁동시(卒琢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때가 되면 알 속의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껍질을 쪼아댑니다. 줄(卒)‘ 소리지요. 이 소리를 들은 어미는 병아리가 쪼아대는 속껍질 바깥쪽을 동시에 쪼아줍니다. 바로 ‘탁(琢)‘ 입니다. 줄과 탁이 엇갈리면 병아리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법이지요. 줄소리를 어미 닭이 듣지 못하면 병아리는 알 속에서 혼자 끙끙대다 지치겠고, 줄도 없는데 어미 닭이 강제로 ‘탁‘을 하면, 아직 여물지 않은 병아리가 성할 리 없겠지요. 줄과 탁의 교감이 없고서는 생명의 싹을 틔울수 없는 법이지요. - P16
혹독한 겨울의 들판에서 홀로 지새워야 하는 나무들은 낙엽을 떨쳐내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무의 모든 자양분을 한 곳에모아두는 일이지요. 바로 겨울눈을 만드는 일입니다. - P18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나무들은 줄기 곳곳에 아이를 낳듯이 겨울눈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무의 모정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더군요. 겨울눈이 한겨울을 지내는 동안 얼어 죽지 않게 또 한 겹의 두툼한 옷을 입혀줍니다. 아린‘ 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서리꽃이 온몸을감싸더라도 겨울눈이 상하지 않게 감싸주는 비늘 껍질이지요. 이것으로도 못 미더워서인지 나무들은 아린 안쪽에 끈적끈적한 방수액도 발라줍니다. - P19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떠올림으로 하나의 형상을 그릴 수 있고, 그 형상을 떠올릴 때면 으레 떠오르는 각인(刻印) 같은것이지요. 이름에는 그에 걸맞는 풍경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이른 봄한라산의 봄을 알리는 꽃에게 생멸화란 이름 하나 짓습니다. - P31
저들도 우리와 같이 생명이 있다는 마음. 그것이지요. 우리의 눈높이를 자연에 맞추는 일, 그것입니다. - P31
딱따구리(Dendrocopos leacotor)는 ‘나무(Dendron)를 쪼는(kopos) 새‘라는라틴어에서 유리된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woodpecker라고 합니다. - P39
한때 한라산의 명품으로 유명했던 오미자나무의 열매도 지금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멸종되었거나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아주 깊숙한 산속으로 피신했을 것입니다. 다른 나무의 등걸을 타고 높은곳에 올라가 열매를 맺는 오미자의 특성 때문에 오미자나무뿐 아니라오미자에게 제 몸을 내어준 나무까지 무참히 잘려나갔기 때문이지요. - P49
이런 것을 부탁해도 될는지요. 어린 두릅나무새순이 탐나실지라도 나무마다 한두 송이의 새순은꼭 남겨두시기를, 그래서 두릅나무가 여름이 되어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어서 내년에도 연둣빛 고운새순을 피워낼 수 있기를, 그것이 두릅나무 가시의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이 아닐는지요. - P51
이 부근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야릇한 설렘이 한구석에 흐른다. 그것은 버스에서 내려 들판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부터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일어온다. 오름 왕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드넓은 벌판에 오름 또 오름, 기생화산의 군집지대이다." <오름나그네> 제1권 중에서 - P54
바람의 섬 제주 들판의 정령(精靈)들이여, 바라노니 초록 융단 선연히 물들이던 피뿌리풀을 되살리지 못하고서 감히 말하지 말라. 화산섬 제주의 봄, 그 오월의 들판을 온전히 품었노라고, - P61
선작지왓을 아시는지요. 영실기암 올라 싱그러운 구상나무숲 터널을 벗어나면서 드러나는 널따란 평원입니다 ‘바위 (지지)들이 서 있는 들판(왓)‘이란 뜻이지요. 눈앞으로 백록담 화구벽의 웅자(雄姿)가 심장을 울리고 윗세오름과 방아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을 양쪽에 거느린 가없는 벌판입니다. - P64
잠자리는 번데기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성충(成蟲)이 되는 불완전 변태를 합니다. 뜨거운 햇살이 유월 하늘에 쏟아질 때, 잠자리들은 빛나는 날개를 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화(羽化)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화하는 순간에 잠자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지녔던 날개를 펴니다. - P78
한 잠자리의 생은 산란으로 한 해뿐인 삶을 마감하지만, 산란을 통해 새로운 생을 잇는 것으로 잠자리의 생은 완성된다. - P85
한라산 들머리인 들렁귀에서의 봄맞이를 영구춘화(瀛邱春花), 정방폭포의 시원스런 여름날의 물줄기를 정방하폭(正房夏暴), 노랗게 익은가을날의 귤밭을 귤림추색(橘林秋色), 한겨울 눈 덮인 백록담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하여 사계절 제주의 서정을 읊은 것이 두 소절이요. - P102
영주12경 http://naver.me/5Am2hn5S
한라산 화구벽에 둥지를 틀고 사는 검독수리는 신성한 독수리란 뜻이다. 짐승의 썩은 고기를 외면하고 오직 자신이 사냥한 짐승의 싱싱한 살을 먹으며 야생의 존엄을 지킨다. - P111
제주의 한가운데 선작지왓 너른 벌판 위로 홀로 장엄하게 솟아있는 화구벽은바다에서 달려드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한여름 바람이 구름을 몰고 화구벽을 차오른다. - P113
제주의 숲은 곶자왈이라 불립니다. 곶자왈이란 토종 제주 말인데,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곶자왈에선 나무와 나무들이 지마다 제 멋을 자랑하며 가지를 뻗고, 가지 사이로 덩굴들이 무성하고, 그 아래로는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고사리와 풀들이 자랍니다. 죽은 나무 가지에선 숲속의 청소부라 불리는 버섯들이 저마다의 색채로 검푸르고 바위에는 초록의 이끼들이 뿜어대는 태고적 자연의 신비들로 신성하지요. - P114
우거진 숲 때문에 곶자왈의 바위들은 얼제나 초록 이끼에 덮여 있다. 제주 자연의 허파라 불리는 곶자왈은 한라산과, 오름과 더불어 반드시 지켜내야 할 제주 생태계 최후의 보루이다. - P125
한라산 화구벽에 서린 원형 무지개, 고도가 높은 곳일수록 무지개는 원형에 가깝다. 동그란 무지개를 광환(光環)이라 부르는데 서양에서는 ‘브로켄‘이라 하여 행운의 상징으로 여긴다. - P133
한 사진가가 있었습니다. 그이는 적막하도록 아득한 제주의 들판과 오름을 좋아했습니다. 광야에 출렁이던 억새와 바람을 그이는 사무치게 좋아했습니다. 아니 사랑했습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에서 배고픔과 외로움을 마시면서 사진에 몰두했던 그이였지요. - P260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운 삶을 여한 없이 보고 느꼈다. 이제 그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평화롭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아름다움을 통해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지금,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그이가 지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가슴에써내려간 고백이었습니다. - P265
오름과 오름 사이 가없는 벌판이야말로 진정한 제주의 속살이라하겠습니다. 봄이면 황금빛 유채물결 출렁이고 가을이면 눈부신억새 파도 온 섬을 물들입니다. 한라산 깊은 곳에서는 구상나무풋풋한 향기가 번져옵니다. - P247
이렇게 겨울 산 설원을 헤쳐 나가는 것을 ‘러셀(Russel)‘이라 합니다. 눈이 많은 곳에 사는 ‘러셀‘이란 미국 사람이 고안한 제설차량에서 빌려온 등산용어입니다. - P214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광야를 지나갈 때엔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를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나의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마침내 후세들에겐 이정표가 되리니 - P215
‘아비에스 코리아나 (Abies koreama)‘, ‘한국의 젓나무‘란 구상나무의 학명입니다. 우리나라 2천여 종의 식물 중에 유일하게 ‘코리언‘이란 학명이 붙어 있는 나무입니다. 구상나무는 바로 한국의 나무였습니다. 끊임없는 질곡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면면히 생명의 씨앗을 이어온 백의민족의 저력처럼 오랜 세월 이 땅에 뿌리를 내려온 우리의 나무인 것입니다. 백여 년쯤 전에 서양인들은 한라산 구상나무 종자를 저네들 나라로 가져가 우수한 유전형질 인자들만을 개량한 신종 구상나무를 만들어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다지요. 이를테면 귀중한 우리의 식물 종(種) 자원을 허가 없이 약탈해간 셈입니다. - P230
큰부리까마귀 부모를 공양하는 한라산 청소부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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