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아시아

서아시아는 동서문명의 접합지로서 일찍이 그곳에서 개척된 오아시스로(왕의 길)는 서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이 길의 서단인 로마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사막길과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오아시스로가 완성되었다. - P246

성역광장
전체 너비가 75만m나 되는 터에 자리 잡은 마슈하드의 성역광장(하람)은 하나의 복합문화도시를 연상시킨다. 중앙에 있는 레자 묘당을 비롯하여 고하르 샤드 마스지드, 각종 박물관, 도서관과 신학대학 등이 광장 안에 다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크기나 화려함은 이슬람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다. 예로부터 마슈하드는 교통이 사통팔달한 곳이다.

- P247

투스에는 이란의 대민족시인 피르다우시(Firdausi, 935~1020년)의 영묘가 있다.
피르나우시는 신화시대부터 아랍 정복기까지의 
이란 역사를 35년 간 무려 6만 편의 시를 써서 
민족적 대서사시 사나마 (Shub-Nina, 왕서書)란 
책에 담아냈다. - P247

혜초의 서역 기행노선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쓰國傳)」은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그 잔권이 발견된 지 
7년 후(1915년)에야 저자가 신라승 혜초(慧超)임이 밝혀졌다. 현존「왕오천축국전」은 필사본(현재 파리국립도서관 소장)으로 총 230행(매행27~30자)에 
약 6,000자밖에 안 되는 절략본 진간이다. 혜초는 이 여행기에서 그가 인도뿐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편람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각국의 역사·문화 · 정치 · 풍속 · 불산 · 종교 등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여행기는 8세기의 이 지역에 관련된  서적으로는 그 내용의 다양성과 정확도에서 단연 으뜸가는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혜초는 이 여행기에서 사상 최초로 아랍을 대식(大食)이라 명명하였고, 한자(漢字) 문명권에서는 처음으로 대식 현지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함으로써 한자문명권과 아랍-이슬람 문명권  간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도모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혜초의 도축 순례는 중국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해로로 동남아시아를 지나 동천축에 상륙했으며, 거기서 육로로 중천축 · 서천축 · 남천축 · 북천축을 두루 거친 후 페르시아(현 이란)의 동북부까지 갔다가 귀로에  올랐다.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을 통해 보면 그의 노정은 당시 서역의 니샤푸르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실크로드 오아시스로를 따라 귀로에 올라 당시 당나라수도 장안에 도착하였다.
혜초는 밀교(密敎)의 선도자로 불교 발전에도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 그는 어려서 당나라로건너가 중국 밀교의 시조 금강지(金剛智)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의 권유에 따라 도축구법 순례를 하였다. 당나라에 돌아온 후 혜초는 장안의 천복사(薦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 그리고 만년에는 오대산(五臺山)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밀교 경전을 연구하고  필수(受)- 한역(漢譯)하였다. 
그는 밀교의 제2대조인 불공삼장(不空三藏)의 6대 제자 중 제2인자로 밀교 전도에 일생을 바쳤다. 혜초는 밀교 경전의 한역과 주식에 진력하다가 787년경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 - P253

니샤푸르는 720여 년 경 신라 고승 혜초가 단행한  서역기행의 서단(西端)으로 추정된다. 
그가 토화라(吐火羅, 현 아프가니스탄)에서  설정한서행(西行)의 방위나 소요 노정과 지세,  그리고 현지 상황에 관한 정확한 기록 등을 감안한다면, 이곳을 기행의 서단으로 잡는 데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당시로서는 동양의 그 누구도 닿아보지 못한 이곳에  다녀와서 혜초는 귀중한 현지 견문록을 남겼다.
- P251

역사적으로 볼 때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유라시아 중심부에 우뚝섰던 최초의 세계적 통일제국이었다. 제국은 대대로 문화적 절충주의와포용성을 추구해,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문명요소들을 적극 섭취하고 창의적으로 조화시켜 소중한 인류공동 유산을 창출하였다. 왕도 떼르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문명의 모임터‘로서, 그 여파가 실크로드를타고 멀리 동방의 한반도에까지 미쳤다는 것은 문명의 교류가 보여주는파급력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 P255

팔미라는 기원을 전후해 약 300년간 시리아 사막 한가운데 자리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다. 오아시스로를 통한 교역의 중계지로 번영을 누린팔미라가 실크로드 전개사(展開史)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었다. 
당시 무덤 골짜기의 아르타반 탑묘(塔墓)에서  중국 한나라 때의 비단, 즉 한금(漢) 조각이 여러 점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금이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 해안 일대에서만 발견된 점을 감안해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F. v. Richthofen)은 처음으로그 발견지들을 이은 길을 ‘실크로드‘ 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이 실크로드개념 확대에서의 제1단계, 즉 중국~인도로 단계다. 그러나 그후 팔미라 - P288

까지 이르는 이 길의 서쪽 여러 오아시스에서도 한금이 발견되자 1910년역시 독일의 동양학자 헤르만(A. Henmann)은 이 길을 지중해의 동안인 팔미라까지 연장하고 ‘오아시스로‘라고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실크로드 개념 확대의 제2단계, 즉 중국~ 팔미라 노선 단계다. 이 길에서 팔미라는 지중해 연안과 중국 간의 교역 중계지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서 출토(1881년)된 팔미라 관세표(關稅表)‘ 석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팔미라를 통해 진행된 교역품의 명세와 가격 및 관세율 같은 구체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 P289

흔히들 한국과 터키는 ‘형제국가‘라고 한다. 그것은 두 민족이 인종학적으로 같은 어족에 속하고, 역사적으로 공통된 운명을 겪어왔으며, 여기에 더해 지난 한국전쟁 때 터키가 혈맹으로 참전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앙카라에 있는 한국공원과 그 안에 있는 한국참전 토이기(터키) 기념탑(높이 9m의 4층탑)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 P301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의 두 개 대륙에 걸쳐 있다. 양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는 1973년에 완공되었는데, 동쪽의 베이러베이(Beylerbeyi) 지구와 서쪽의 오르타쾨이 (OrtakOy) 지구를 연결함으로써 동서 교류의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P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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