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정치 이슈로 중국 문제가 떠오르고 외교정책에 대한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자 그간 좌파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강경한 입징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였던 민주당 정권이 이제는 온건한 태도를 빌미로 비난을 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전쟁 또한 약소국에서 벌어지는 작은분쟁 정도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이제 한국만의 문제가아니라 어느 때보다도 내분이 심해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였다. 따라서 트루먼 정부는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중국공산군의 개입 여부를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 핵심 인사들의 걱정과 달리 막상 전장에 투입된 고위 장교들과 맥아더는 오히려 그런상황이 벌어지기를 내심 기대했다. 결국 트루먼은 양손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전쟁이라는 까다로운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다. - P317

사람들은 이미 장제스의 지휘 능력에 어떠한 기대도 믿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공산당은 "거의 광신도에 가까울 정도로 의욕과 열정이 넘쳐흘렀다." 그는 국민당 정부가 썩을 대로 썩었고 보수적이며 전혀 효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전했다. 후에 웨드마이어는 장제스가 내세운명분 중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보다도 의지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무기나 장비가 부족했던 게 절대 아닙니다. 싸우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빗자루를 들고라도 정권을 사수할 수있었을 겁니다." - P352

국민당 정부는 많은 사람을 놀래며 갑작스레 몰락하고 말았다. 1948년 11월 5일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사흘 전에 난징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중국에 있는 모든 미국인은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각에 마오쩌둥은 평소 조심성 많기로 유명한 스탈린의 특사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Mikoyan)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섣불리 양쯔강을 건너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다가 미국을 자극하여 중국 내란에 뛰어들게만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1949년 1월 21일,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에 대한명목상의 통제권을 대리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동안 모아놓은 금괴를 챙겨 대만으로 달아났다. 이를 두고 국무부는 장제스가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왕이나 황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군사력을 버리고 중국 본토를 떠나 작은섬으로 달아나 피난민이 되었다." 라고 보도했다. 1949년 4월 21일, 마오쩌둥은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넘었다. 3일 후에는. 국민당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다. - P353

그는 다양한 임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유럽 지역을 희망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가라는 임명이 떨어지자 적잖이 실망했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나 한국으로 보내져서 비료 취급을 당한다는 느낌이 강했기에 한국에 오자마자 그의 실망감은 더 커졌다.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당시 한국을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아서감정이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고 미국인들이 자국의 앞날을 어떻게 할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주변 동료들로부터 일본에서 근무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말을 듣자 더 속이 상했다. 일본인들은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승전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배우려 한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현실에는 분명모순이 있었다. 한때 이웃 국가를 그토록 모질게 억압했던 나라가 일단 전쟁이 끝나고 나니 미국인들의 눈에 그들에게 희생되었던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긍정적인 인상으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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