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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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p 266

 

 

 

어쩌면 이 책을 관통하는 말일 것이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마치 나를 위해 태어난 문장처럼 공감되는 말이었다. 예전에 리딩 나잇에서 추천을 받고 구매를 하게 되어, 회사에서 틈이 날 때 야금야금 읽다 오늘에서야 겨우 완독을 했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이 등장해 각자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고 때로는 얽히기도 하는 책. 근데 정세랑 작가님은 인생이 몇 회차이시길래 이토록 다양하고 세밀하게 삶을 서술하시는 걸까? 아무리 사람이 싫어도 우리는 하는 수없이 사람을 만나며 살아야 하므로, <피프티 피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표정이 변했다. 어떤 표정을 짓든 언제나 거기엔 불신이 섞여 있었다. 기쁠 때도 화를 낼 때도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조차도.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 눈 너머로 매일 추락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얼굴.

p 270

 

 

 

어릴 때는 어른이 되기를 동경했다. 지금의 내 나이(스물일곱)가 되면 당연히 차도 있고, 집도 있고, 어엿한 직장도 있고,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무적의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 생각을 할 때는 아마 일곱 살 즈음이었을 테니까, 그 조그만 머리로 이십 년이라는 건 가늠이 잘되지 않는 수치였다. 나이를 먹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인간을 알다 보니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생경해졌다. 어느 순간부턴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시간이 훅 가 있고 안달복달을 해도 시간이 멈춘 듯 느리기도 하다. 내게 맞춰진 시계만 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전에는 막연한 낙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믿게 되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환경이 변하고, 취향이 변할 수는 있지만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그 무엇은 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설핏 잠이 들려 하는 혜린을 깨워 묻고 싶었다.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p 305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변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지금 내가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나쁜 어른이 되면 어떡하지?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강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은 나름의 속도로 앞서 걷는다는 것인데 어느 순간 그 걸음을 멈추게 될까 봐, 그것이 제일 두렵다. 성장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는 내가 될까 봐 두렵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p 381

 

 

 

어느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의사의 말씀인데, 이 대목을 읽다 눈물이 울컥 날 뻔했다. 나는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만 멀거니 내려다보았는데, 여기가 알고 보니 징검다리라고 한다. 조금 더 힘을 내면 차례차례 다른 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그토록 미운 (일부의) 어른들조차 먼저 무언가를 닦아두었고 나는 그 끝에 서서 나름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들이 돌을 던져 닿지 못했던 곳에 내가 돌을 던지고 있는 거다. 내가 못하면, 내 다음의 누군가가 해 줄 것이다.

나는 늘 자아가 여럿이서 웅성대는 편인데, 무언가 특별하게 살고 싶어 하는 하나와 남들 따라 평범히 살고 싶어 하는 하나가 매일같이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한다.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매일같이 Tv에 나오는 화려한 삶을 어릴 때부터 막연히 동경하기는 했지만 상상을 하다 보면 또 겁나 피곤한 일일 것이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고.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늘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기 때문에 게으르게 적당히 사는 법을 오롯이 즐기며 살지 못했다. '슈크림 의사'선생님 말씀을 듣고 울컥했던 것도 그 느낌이었던 것 같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퍼져 있겠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나를 잘 토닥이면서 쉬엄쉬엄 걸어갈 것이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힘들게 하면 고치라고 하면 되고, 안 되면 곁에 두지 않으면 된다. 좋은 사람만 만나면서 살아도 시간이 한참 모자라다. 좀, 단순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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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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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손이 떠난 자리를 움켜쥐자 내 손이 느껴졌다. 따뜻한 손이었다. 그 따뜻함이 너무 미안해 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p 37 / p 39 <몰:mall;沒>

 

 

임성순 작가님의 <컨설턴트>를 예전에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컨설턴트>와는 조금 다른 느낌에 당황스럽기는 했다. 특히 첫 번째 단편 <몰>이 인상깊었다. 예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잔해를 처리하는 일꾼의 이야기에서 문득 마지막 문장이 가시처럼 까끌거렸다.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강렬했다. <몰>이라는 작품만 두 번을 읽었는데, 두 번째 읽을 때에는 따뜻함이 미안해 눈물을 쏟는 주인공과 함께 내 눈도 글썽거렸다. 2014년 4월 16일이 기억이 났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떤 뉴스를 보고 영영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던.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중간고사 기간이라 학교에서 내내 공부를 하다가 (거의 반쯤 졸면서) 집으로 가는 통학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뉴스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동생 뻘의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일상을 영위한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집에 오는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은 공부고 뭐고 밤새 네이버 메인에서 새로고침을 했다. 생존자 수를 확인하고, 새로 올라오는 뉴스를 확인하느라고. 손목이 답답해서 팔찌고 시계고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그 날 이후로 노란 팔찌를 사서 내내 끼고 다닌다. 잊지 않기 위한 방법인데, 이따금 스스로가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그 팔찌를 어루만진다. 나는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그 정도면 조금은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하고. 그 무거운 짐을 어깨에 나누어 들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살아보자고.

 

 

 

 

 

나중에 그녀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내가 구구절절 떠들지 않아 좋다고 했다.

우리가 끝날 때는 당신은 나의 무표정한 얼굴과 과묵함이 싫다고 말했다.

납득할 수 있었다. 끝은 대체로 그렇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

마음 끝이 심지처럼 타들어가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 심지의 빛이 너무 강해 잠들 수 없었다.

p 171 / p 176 <불용>

 

 

작가님의 해설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투영해서 쓴 글이 이 <불용>이라고. <불용>을 읽을 때 가장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던 건 역시나 작가의 진심이 투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기억 속 저편에 묻어 두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한 로맨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도 비슷한 것을 이야기한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사소한 것들로 사랑에 빠지는 한편 그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이 결국 우리를 눈물짓게 하기도 한다.

이따금 힘겨운지 지루한지 알 수 없는 하루를 보낸 뒤 침대에 누우면 감이 잘 잡히지 않는 통증으로 인해 불면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마음 끝이 심지처럼 타들어가던 날들이 떠올랐다'라는 말을 들으니, 낯이 설은 문장인데도 반가웠다. 요즈음 특히나 돌아가며 나의 심지에 누가 불을 붙인 마냥 버겁고 뜨거운 통증을 느끼는 일이 잦아서.

단편집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김애란 작가님의 <비행운>을 읽은 뒤로 좋아하는 필체의 작가들이 낸 단편집을 읽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로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왠지 어릴 때 갖고 싶었던 과자 종합선물세트 같기도 하고. 특히 이번 책은 장르가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해서 매 이야기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말투는 어딘가 쓸쓸하고 시니컬한 구석이 있어서 이따금 마주치게 되는,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들이 반갑고도 좋았다.

본 포스팅은 카페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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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좋은 이유 - 내가 사랑한 취향의 공간들 B의 순간
김선아 지음 / 미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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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보통 한옥에 많다. 대문을 지나 마당을 지나 또 다른 쪽문을 지나 마루를 건너 다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험들.

p 23


옛날부터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아서 건축에도 물론 관심이 있었는데, 내게 주어진 공간 지각 능력이 바닥을 치는 것을 안 후로는 깨끗하게 마음을 접었다. 로드뷰로도 길을 잃는데, 무슨 수로 건물의 전체적 구조를 인식하고 구상하고 실현해 내겠는가. 그래서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공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는 것도 흥미를 끌었다. 블로그에 자칭 'HOME' 카테고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거의 방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글을 잔뜩 써보고 싶었다. 이 책도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해주는 것이니 아주아주 얕게나마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라고 우겨 본다.

켜 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켜켜이 쌓인'과 같은 단어를 무의식중에 썼는데, '켜'라는 단어의 단독적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켜'라고 한다니. 전공에 맞게 나는 그 개념을 설명하는 고운 단어가 있다는 것에 가장 놀랐다. 그리고 한옥 건물을 난데없이 방문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우리가 대문을 지나고 몇 가지 과정을 거쳐 다른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들이 켜 라고, 몸소 그 단어를 느끼고 싶어서.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만큼, 서로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가족과 함께 있는 내가 다르고, 회사에서 보이는 내가 또 다르다. 친굳들과 편하게 있을 때의 나는 또 다른 내가 된다. 같은 상황 안에 있어도 누구와 마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자아가 불쑥 튀어나온다. 사람도 맺는 관계마다 여러 얼굴을 가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몇 백만 명이나 살고 있는 도시가 그렇지 않을 리 없다.

p 196


 

어제 친구를 만나러 보령에 다녀 왔다. 바다를 너무나 좋아해서, 친구를 보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찌는 햇빛에 미간을 찡그리다가 노을이 지는 바다에서 인생샷을 건지자고 이리 저리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원래 가려던 횟집은 알고 보니 예약제였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해변의 길은 쓸 데 없이 노을이 아름다웠다. 친구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카페에 가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들까지 모두 합쳐 깨달은 것은 감정적인 자유였다. 웃고 싶을 때만 웃어도 되는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나에게 언짢은 표정으로 불친절하게 대하는 남자 직원에게 억지로 웃어 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서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요즘 들어 가장 고민을 했던 부분이 어쩌면 그것이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웃어야 한다는 강박.

친구의 집을 처음 방문하고 친구가 자주 간다는 카페에 함께 가고 친구가 곧잘 방문하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친구네 집 근처 천변을 걸었다. 친구가 혼자 향유하던 시간과 공간을 내게도 공개한 셈이다. 신기한 일이다. 같은 공간도 누가 사용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다른 형태를 보이거나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문득 궁금해진다. 내 공간은, 나와 있는 공간은 어떤 느낌을 줄까? 물론 더럽다고 하겠지만(ㅋㅋ) 내게 머무는 사람들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귀찮다는 핑계로 버려두었던 나의 공간을 보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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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스무 살은 되고 싶지 않아 - 2018 제12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1
조우리 지음 / 비룡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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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내가 예전에 알던 세상보다 더 춥고 낯설다. 그리고 영원히 겨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하운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돌아가 하운이의 작은 손을 잡고 웅크리고 누워 긴 겨울잠을 자고 싶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면 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모든 창문을 열고 따스한 햇볕을 온 몸으로 맞으며 내 아이와 눈을 마주 볼 것이다.

p 69 <김하연>

오랜만에 비룡소 청소년 컬렉션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표지도 눈에 띄었고, 어릴 때 읽었던 비룡소 특유의 감성이 좋았다. 아직 덜 자랐기 때문인지 유독 성장 소설에 눈이 가고 어릴 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좋다. 10대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새삼스럽게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한없이 해맑던 나의 청소년기, 그 때 그 친구들은 서로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는지. 이제는 새삼 떠오르지도 않는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줄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던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하지 않았나,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한다.

특히나 하연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미혼모가 된. 그나마도 주변의 시선과 하연의 미래를 걱정해 하운은 외조부모님의 호적에 아들로 들어가게 된다. 새끼를 물어 죽이고 남편도 죽여 버리는 어미 햄스터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하연은 사실 그토록 자기 자신을 좀먹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임신과 출산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혼절할 듯 고열을 앓고 하연은 문득 생각을 했다.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비로소 하운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연은, 씩씩하게 잘 해낼 것이다.

 

 

수영아, 엄마는 말이지, 네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중요하지 않아.

p 94 <이수영>

수영의 어머니는 특별하다. 여타 부모님들과는 다르다. 술을 먹고 이성교제를 해서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벌을 받는 딸을 일으켜 세우고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되묻는 사람. 아이들은 성장하게 마련이라고, 잠깐 지나가는 일탈일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 수영은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결혼식장 아르바이트를 간다. 주방에서 내내 설거지를 하다가 사장 사모의 싸움을 관전하고 빠질 것 같은 팔로 일당을 받아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간다. 학교에 다니기 싫다는 수영에게 수영의 어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 저렇게 말한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중요하지 않다고. 왜 저 문장이 마음에 콱 박혔느냐 하면,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 대부분 자고 있는지 버스 안은 작게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 외에 진공상태처럼 조용하다. 버스는 마치 거대한 침묵을 운반하는 것 같다.

p 126 <천현준>

 

현준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실종되어 버린 소년이다. 아버지를 찾으려고 이곳 저곳을 뒤지다 제보를 받고 어떤 아버지뻘의 남자와 매일같이 피씨방에서 잠복을 하게 된다. 결국, 경찰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엔 무관심 속에 부패가 다소 진행된 시체가 하나 있었을 뿐. 현준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탄다. 그 부분을 읽자 내가 태어나 처음 가 본 장례식이 생각났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화장터로 향하는 버스도 거대한 침묵을 운반하는 것처럼 고요했다.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는 노래가 흘러서 계속 훌쩍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듣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역시나 내가 성장이 퍽 느리다는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학창 시절에 겪고 느끼는 감정들을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넘어지고 구르면서 배우고 있다. 느리다는 것은 차분히 배워가는 것이 많다는 것은 아닐까, 애써 생각해 본다. 아플수록 흉터는 진하지만 대신 새살이 돋은 자리를 어루만지면서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다. 최대한 아픔을 피하되, 고통을 맞닥뜨리면 모른 체 피하지는 말자.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본 포스팅은 카페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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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비로소 나다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 익명의 스물다섯, 직장인 공감 에세이
김가빈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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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안주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업무에 흥미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p 84



매번 친구들과 하는 대화의 주제가 바뀌지만 요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이직, 적성, 퇴사인 것 같다. 어느덧 나와 내 친구들은 인생의 경험이 꽤나 쌓인 사람들이 되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그 때는 당장의 성적과 진학이 큰 고민이었는데, 인생은 늘 고민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 없어서 나름대로 편했던 시기였다.

벌써 서른에 가까워지는 나이지만 직장생활이라고 할 만한 건 두 번 뿐이다. 두 번 다 계약직이었다. 3개월 짜리로 들어갔다가 연장되어 6개월을 일한 공기업과 지금 일하고 있는 대학교 조교다. 첫 직장이라고 볼 수 있는 공기업은 무언가를 연구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연구 결과를 정리해 둔 엑셀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당시 사무실에 엑셀을 곧잘 다루는 연구원이 나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현장에 나가 있는 동안 나는 박사님들과 사무실을 지키곤 했다.

물론 하루 종일 엑셀창을 보다 퇴근을 하면 시트가 어른거려서 이따금 철창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잘 쓰지 않던 엑셀이 늘었고 아무도 터치하지 않아 편했다. 다만 사람들이 많이, 다소, 불편했다. 나를 챙겨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민한 부분을 건드는 사람이 더 많았다. 대부분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건네는 것이었는데, 무례함에 놀라 따박따박 대들었더니 어느 순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퇴근 직전에 업무가 부과되면 내일 하겠다고 퇴근해 버렸다. (출퇴근은 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했고 배차 간격도 한 시간이었다 ㅎ 초과 수당도 물론 나오지 않았음) 친구들은 내게 미쳤다고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계약이 끝나고 나올 때 미용실에서 500원짜리 동전만 한 땜빵이 생겼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다시 새로운 머리가 난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 상사는 계약을 더 연장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행정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불발되어 계약 만료가 된 것이었는데, 아마 재계약이 되었다 한들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도 지금도 나는 별다르게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자괴감이 많이 든다. 여유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쁠 땐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는데, 내가 담당하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이 조금 힘들다. 그것에 무뎌지는 내 자신도 두렵다.

 

 

 

 

 

왠지 남는다면 이 선배처럼 될 것 같았어.

퇴사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어.

p 98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안 좋은 모습이 좋은 모습보다 훨씬 부각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윗사람들은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경우가 절대 다수였다. 매번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곧이곧대로 표정을 드러냈던 전 직장과 달리, 현재는 표정을 제법 잘 숨기며 지내고 있다.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인 것처럼. 사회생활에 외향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싫고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확실히 더 편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자진해서 웃음 코르셋을 찼고 출근 전과 후가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차라리 분리되는 것 같아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함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장점이 아무리 많아도 결정적인 단점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일을 하는 관계일수록 그것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 개인적인 관계는 좋지만 일을 할 때 삐걱댈수도 있고, 일을 할 때는 무리가 없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빈정이 상할 수도 있는 거다. 최대한 배우고 싶은 점은 흡수하고 아닌 점은 두고두고 되새기며 지양하려고 한다. 나는 늘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은 영영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괜찮은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 일하는 곳은 곧 계약이 끝난다. 3개월이 조금 안 되게 남았는데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벌써부터 버겁다. 함께 일하는 분들이 좋으셔서 1년은 거뜬히 채울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든 변수가 생기게 마련이니까. 다들 이제 뭐할거냐고 물어보시는데, 안그래도 요즘 걱정도 많고 울적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그치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나를 안다. 뭐든 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지, 아무렴.

본 포스팅은 카페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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