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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좋은 이유 - 내가 사랑한 취향의 공간들 ㅣ B의 순간
김선아 지음 / 미호 / 2019년 4월
평점 :

켜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보통 한옥에 많다. 대문을 지나 마당을 지나 또 다른 쪽문을 지나 마루를 건너 다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험들.
옛날부터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아서 건축에도 물론 관심이 있었는데, 내게 주어진 공간 지각 능력이 바닥을 치는 것을 안 후로는 깨끗하게 마음을 접었다. 로드뷰로도 길을 잃는데, 무슨 수로 건물의 전체적 구조를 인식하고 구상하고 실현해 내겠는가. 그래서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공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는 것도 흥미를 끌었다. 블로그에 자칭 'HOME' 카테고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거의 방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글을 잔뜩 써보고 싶었다. 이 책도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해주는 것이니 아주아주 얕게나마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라고 우겨 본다.
켜 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켜켜이 쌓인'과 같은 단어를 무의식중에 썼는데, '켜'라는 단어의 단독적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켜'라고 한다니. 전공에 맞게 나는 그 개념을 설명하는 고운 단어가 있다는 것에 가장 놀랐다. 그리고 한옥 건물을 난데없이 방문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우리가 대문을 지나고 몇 가지 과정을 거쳐 다른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들이 켜 라고, 몸소 그 단어를 느끼고 싶어서.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만큼, 서로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가족과 함께 있는 내가 다르고, 회사에서 보이는 내가 또 다르다. 친굳들과 편하게 있을 때의 나는 또 다른 내가 된다. 같은 상황 안에 있어도 누구와 마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자아가 불쑥 튀어나온다. 사람도 맺는 관계마다 여러 얼굴을 가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몇 백만 명이나 살고 있는 도시가 그렇지 않을 리 없다.
어제 친구를 만나러 보령에 다녀 왔다. 바다를 너무나 좋아해서, 친구를 보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찌는 햇빛에 미간을 찡그리다가 노을이 지는 바다에서 인생샷을 건지자고 이리 저리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원래 가려던 횟집은 알고 보니 예약제였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해변의 길은 쓸 데 없이 노을이 아름다웠다. 친구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카페에 가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들까지 모두 합쳐 깨달은 것은 감정적인 자유였다. 웃고 싶을 때만 웃어도 되는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나에게 언짢은 표정으로 불친절하게 대하는 남자 직원에게 억지로 웃어 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서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요즘 들어 가장 고민을 했던 부분이 어쩌면 그것이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웃어야 한다는 강박.
친구의 집을 처음 방문하고 친구가 자주 간다는 카페에 함께 가고 친구가 곧잘 방문하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친구네 집 근처 천변을 걸었다. 친구가 혼자 향유하던 시간과 공간을 내게도 공개한 셈이다. 신기한 일이다. 같은 공간도 누가 사용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다른 형태를 보이거나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문득 궁금해진다. 내 공간은, 나와 있는 공간은 어떤 느낌을 줄까? 물론 더럽다고 하겠지만(ㅋㅋ) 내게 머무는 사람들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귀찮다는 핑계로 버려두었던 나의 공간을 보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 포스팅은 리뷰어스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