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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금 못된 생각일테지만, 아니 조금 많이 못된 생각이지만 이상하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의 에세이집은 잘 찾지 않게 된다. 누군가가 선물을 해준다거나하는 것과 같은 우연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스스로 찾아보게 되는 경우가 없다. 여기에는 왠지 모르게 소소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랄까. 내가 알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하신분들의 에세이집이 아니면 좀처럼 읽지를 않게 되니..굳이 이유를 찾자면 소설에 푹 빠지기전에 읽었던 몇 권의 에세이에서 큰 감동과 재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고, 그로 인해 거리를 좀 두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만 해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이야기에서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우박으로 망가져버린 채소들 앞에서 울어버렸다는 글을 읽고는 사전에 품고 있던 경계심이 탁 하고 무너져 버렸다. 비유를 하자면 소개팅 따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조금은 뚱한 마음으로 나간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느낌이랄까. 상대는 나를 잘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상대방이 좋아지는, 덕분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설레임을 ’마당 있는 집’이라는 짧은 글에서 느끼게 되었다.
허수경이라는 이름은 내게 참 낯선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내게만 그럴 뿐 이분은 이미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셨고, 라디오의 작가로 활동을 하셨다 한다. 그렇게 많은 글들을 쓰시다가 본인이 세상에 내놓은 글들에게 갇혀버리면 어쩌나 싶어 작가로의 삶을 잠시 접어두시고 늙은 학생이 되셨다. 것도 고고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잠깐일줄 알았던 늙은 학생의 생활이 길어지고,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고국에 머물고 있는 지인들이 그리워 그들에게 쓰신 글들을 모아 엮은 이 책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자꾸보다보니 제목에서부터 왠지 ’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길모퉁이..길모퉁이..왠지 발음을 하면 할 수록 정이 가는 단어인 것 같다.
조금은 허전해 보이는 작고 얇은 책 속엔 허수경님의 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정확히는 그녀의 삶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를.
우선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림움이 담겨 있었다. 섬처녀에서 뭍으로 시집와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와 함께 꽃밥을 먹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지킨 동생에 대한 이야기..이상하게 가족이란 존재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당시에는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가도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마음 한 켠이 살짝 아파오는 것 같다. 아마 내가 효녀보다는 불효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그녀가 늙은 학생으로 머물렀던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면서, 발굴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었던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발굴이라고 하면 단순히 땅속에 묻혀있는 유물들을 현재의 세상으로 드러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다보니 그게 다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단순한 줄 알았던 일에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독일이 독일을 이끄는 문화의 깃발 아래 서야 한다는 어느 독일 정치인의 발언 때문에 독일의 정계와 문화계, 언론계가 시끌시끌해지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발굴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경험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기에 글로 접하는 그들의 생활이 조금은 신기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든 조금씩은 비슷비슷 하구나 싶었고.
한 번 무너진 경계심은 회복될 줄을 몰랐고, 좋았던 첫인상은 마지막까지 갔다.
누구보다 조금은 외롭고 고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하면서풍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허수경님의 삶에 조금은 질투심이 일면서 소박하고 진실한 글들을
읽으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