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는 정말 독특하다 싶었다. 
한 사람이 일본군이었다가 인민군이었다가 국군이 되었다니..
한 사람의 인생이 어찌 그리 될 수가 있는건지. 설령 소설 속에서라도 너무 가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있었다. 허구라고 넘기기에도 너무 가혹한 사람들이..

 일제치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보내진 사실은 익히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전쟁이 끝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지목되어 시베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아닌, 전쟁으로 피해를 본 나라의 백성이 어찌하여 전쟁 종료 후에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포로 생활을 했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러시아 말이나 일본말을 할 수 있었던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주장했으나 소련 측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이송이 되고 억류 결정이 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미국과 소련의  전후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이 소련에 배상하는 방안의 하나로 노동력 제공을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전억협(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이라는 일본의 단체가 찾아내 공개된 문서에 뚜렷히 나와 있는 사실이었다. 문서로 인해 논란이 되자 아사에다 참모는 "전쟁에 진 일본의 본토 4개 섬에 모든 사람을 밀어넣으면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 일본이 재기하려면 자원이 있는 대륙에 달라붙어 설사 국적이 바뀌더라도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또한 수인노동(죄수에게 과해지는 강제노동)이 1930년대부터 소련에서 국가 계획경제의 한 기둥이었으며, 시베리아 억류는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된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 마지막 세번째 이유였다.

 억류, 시련이 시작되다

1948년 12월. 한 밤 중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그 곳을 고국 땅을 밟는다는 기쁨으로 발길을 옮기던 사람들. 그들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종료 후 시베리아에서 몇년 간 포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에 항복 할 때도 손 안들어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 들었지. (P.23)

 당시 한반도는 독립을 맞았지만  한반도 내에 하나의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서로 간에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한 밤 중 38선을 넘었던 사람들 중엔 남한 군인의 총에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한 밤 중에 38선을 넘은 이유는 북 쪽에서 그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그들에게 조선의 화폐를 제공하기도 했다. 

 힘들게 고향 땅을 찾아와 가족을 만났지만 이들에게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포로로서 노동을 했던 시간은 3~4년 정도 였는데 그 사이 고향의 가족들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던 것. 게다가 때는 1948년 12월. 한국전쟁이 터지기 채 2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본군에게 징집될 당시 대부분 젊은 나이였기에 포로 생활을 하고 고국에 돌아왔을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3~40대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다시 그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아니 명령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전쟁에 나가야했다. 

귀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단체 중에 "삭풍회"라는 곳이 있다.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말한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름지어진 이 단체는 1991년 12월께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분들이 뜻을 모아 결성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도 훨씬 오래 전인데 왜 그제서야 단체를 조직했을까 싶지만 이 또한 한국이 소련과 수교를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한국 정부에게 삭풍회 회원들은 앞의 상황은 딱 잘라버리고, 단지 그들이 북에서 넘어온 인물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정부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아직까지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삭풍회에선 김영삼 대통령 때와 김대중 대통령 취임 당시 진정서를 제출 했으나 돌아온 것은 수용불가나 해결곤란이란 답변이 전부였다.  

 일본의 경우 "전억협"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지고, 보상 또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적이 "일본"인 자에 한해서였다. 때문에 보상을 받은 일본인 중에 한국의 억류 피해자에게 자신의 보상금을 나눠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음은 2005년 4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우라 외상등 외무성 간부 사이에 오고 간 질의, 응답 중에 곤노 아즈마라는 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P.296)

 "삭풍회 사람들은 이미 80세가 넘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성의를 갖고 대응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제 이분들은 나이가 많이 드셨다. 처음 단체를 만들 당시만 해도 50여명이셨던 분들이 현재는 20여명 정도 밖에 남아계시지 않다. 침묵으로 일관한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화합을 통한 발전. 새삼 필요한 일임을 책을 통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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