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역설 -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미래사회 전망 보고서
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 / 알마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전우치"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 도사 전우치는 미움을 받아 그림 속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가 풀려난 건 500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였다. 게다가 그가 생활하게 된 곳은 도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그를 보면서 구석기나 신석기처럼 머나 먼 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몇 십년 전의 사람이 세월을 건너뛰어 갑작스레 현재로 오게 된다면, 그래서 지금처럼 넘쳐나는 물질문명을 접하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는 과연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을 접하고 좋아 할 것인가 혹은 놀라고 경계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행복의 역설"이란 책은 지금처럼 풍부한 적이 없었던 현재에 대해서 "소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주는 책이다. 

 먼저 1부, 과소비사회
이미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시장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단계를 넘어선 지금, 으레 그렇듯이 소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줄어들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히려 소비를 하고자하는 사람들의 욕심은 커졌고, 소비를 할 수 있는 물질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현대사회는 '탈-소비'사회가 아니라 과소비사회가 된 것이다.(P.25)

 소비가 미덕이 된 사회에서  소비 문명은 3단계를 거치면서 변화해왔다. 
1880년대 무렵부터  시작되어 제2차 세계 대전과 함께 막을 내린 대중소비사회 1단계. 
이 시기는 근대식 교통 통신과 관련된 인프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적인 대형 시장이 생겨나고 상품 또한 대량 생산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 단계였기에 부르주아만이 주체가 되는 불완전한 대중소비사회를 형성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브랜드, 포장, 광고가 생겨나고 상품 판매를 위한 방법으로 힘을 얻기 시작함으로써 1단계는 자연스럽게 2단계로 이어진다.

 2단계는 1950년대 무렵 부터 시작되어 전후 30년에 걸쳐 자리 잡았다. 2단계는 '풍요로운 사회'와 동일시 되는 시기로 봉급자의 월급이 3-4배까지 오르곤 했다. 더불어 소비력도 증가하여 소비의 엘도라도라는 꿈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는 '대중소비사회'의 완벽한 모델로 등장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3단계는 1970년대 말 이후에 현대사회의 무대에 올랐다.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포드주의 생산방식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시점에 등장하여 소품종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소량생산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 시기에 와서는 특정 계층에 의해서만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진것이 없는 자들도 자신만의 소비를 꿈꾸고 때로는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까지 소비에 참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지막 2부, 소비자의 기쁨, 상처받은 행복. 
1부에서 소비의 진화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면 2부에서는 그 진화의 과정에서 있었던 고통과 현재의 고통, 그리고 미래에 혹 있을지도 모를 걱정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사회의 행복과 기쁨을 보여주는 다섯 가지 패러다임의 모델을 제시하여 책을 읽는 재미를 더했다. 

모델 하나, 끝없이 욕구를 자극하는 소비주의 사회라는 페니아(Penia)의 원리. 
모델 둘, '지금 그리고 여기'의 욕구만을 우선시하는 쾌락주의 시대- 디오니소스. 
모델 셋, 경쟁력, 훌륭함, 유능함 등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 영웅 슈퍼맨. 
모델 넷, 개인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끝없는 욕망으로 고통을 주며 타인의 성공과 행복을 지켜보면서 더 큰 불쾌감을 느끼는 사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모델 다섯, 소비 문명에 의해 시작된 존재의 사유화를 강조하면서 형성된 사회- 호모 펠릭스.

  아직 상품화폐가 발달 하지 않았던 시대엔 나라에서 이를 권장하곤 했었다. 소비가 곧 미덕이라는 심리를 심어주기 위해 국민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필요한 것을 사고 파는 소비사회를 벗어나 과소비사회가 된 지금, 이는 옳은 것일까? 혹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끝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할 것인가? 책은 그 점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책을 보니 지금의 과소비사회를 두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어느 덧 과소비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터전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각종 환경문제,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등으로 인해서. 현재 접하게 되는 환경오염이나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뉴스 등을 보면 지금의 과소비사회가 정말 위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역시, 한걸음 물러나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통해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 가곤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역시나 희망은 있다. 

 과소비자본주의가 아무리 자신과 타인, 문화와의 관계를 뒤흔들어놓는다고 해도 포스트 역사주의 인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배우고 이해하고 진보하며 자기를 초월하는 의지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P. 415)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고 싶었다. 정말 내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미래사회 전망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에 얼핏 심리를 다룬 책인가 했다. 그리고 보게 된 책의 두께에 손길이 주춤했다. 휘리릭 넘겨보고는 혹 전문서를 잘못 고른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니 어렵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처음 접하는 낯선 용어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해를 할 수 없다거나 이해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고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소설 위주로 책을 읽었던지라 오랜만에 읽는 교과서 같은 책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책은 재밌는 소재를 다루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아주 잃지는 않고 있었다. 그로인해 유익한 독서를 했다는 흐뭇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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