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 광해군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로 보는 거라 그런지 속도가 역시 빠르다. 그래서 어느 덧 11권.
주인공은 광해군.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신하에 의해서 왕의 자리를 물러나야했던 왕.
그래 그런지 기억되기로 선한 군주의 이미지보다는 폭군의 이미지가 더욱 강한 임금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광해군 3살 때 돌아가셨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그 자리를 지킴에 있어서도 외척의 세력이 몹시 중요했던 시대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앞날이 편치 않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선조는 새로운 중전을 맞았던 것. 그녀가 인목왕후 김씨였다. 당시 광해군의 나의 26세였다. 둘째였지만 형이었던 자가 현명치 못해 그가 선조를 이을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조 39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인목왕후가 새로운 중전인 이상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광해군의 지위가 위태로워짐은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었다.

작가분이 말하길 어쩌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보였던 포악스러운 면은 세자 시절에 쌓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었겠냐는 의견도 있다고 했다.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막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신하들까지 그보다는 왕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 41년, 선조가 사망했다. 만약 선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바람대로 영창대군이 왕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더 일찍 떠나는 바람에 장성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세자 시절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즉위 초 그는 현명한 정치를 하는 왕이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조세를 개편하여 대동법이란 법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내는 세금 중에 지금처럼 돈이 아니라 그 지방의 토산물을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세금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중간에서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백성들의 피해가 무척 컸던 세금이었다. 또한 방납이라는 것이 생겨나 더욱더 백성들의 목을 조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토산물 대신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만큼 쌀로써 세금을 대신하는 제도가 바로 대동법이다. 시작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지만(양반들의 반대로 인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100년이라는 시간이 들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 사상에 젖어 있어서 국제 정서를 읽지 못했던 대부분의 신하들과는 다르게 광해군은 주변의 정세를 읽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른바 중립외교라는 것을 한 것이다. 당시 강국으로서 조선을 넘보던 후금과 명 사이에서 때에 따라 적절한 외교를 한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반정이 발생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천하다 여기는 왜에게 고개를 수그린다는 것이 당시의 신하들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현명하게 나라를 운영해나가고자 했던 광해군의 정치에도 먹구름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형장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이의 이름을 거론하는 옥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형장에서는 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하면 자신의 이복형제를 잔인하게 죽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영창대군은 역모에 휘말리게 된다. 처음엔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그치는 듯했지만 곧 식량을 끊고 아궁이에 쉴 새 없이 불을 땠다. 영창대군은 바닥이 뜨거워 눕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울다 기력이 다해 죽었다고 한다. 그 어떤 고문보다 더욱더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복동생을 죽인 형, 광해군. 더욱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나름 우애가 좋았던 사이였다고하여 그 충격이 더욱더 크다.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광해군은 점차 퇴락을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결국엔 신하들에 의해 왕의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처음부터 뭔가 불안했었던 왕이었다면 실망감이 이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군을 조직하고 용감하게 왜군에 맞서 싸웠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피난길에 오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자존심보다는 현실을 더욱 중시 여겨 현명하게 외교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피를 보았으며 결국엔 좋지 못한 결론이 났는지 정말 안타까웠다.

광해군 이후 반정을 일으키면서까지 왕위에 오른자가 행한 정치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안타까움이 커다란 한숨으로 뿜어져 나올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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