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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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비슷한 시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두 권이나 연달아 읽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고 아직까지 크게 실망한 적이 없어서 연달아 읽어도 즐거웠다는.

먼저 읽은 "내가 그를 죽였다"는 결말에 살짝 아쉬움이 있었지만 읽는 동안은 즐거웠고,

나중에 읽은 "숙명"은 결말에 이를때까지 정말 재밌었다.


 유사쿠는 차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차가 문을 나서기 직전

그 소년이 뒤돌아 그를 보았다. 그 장면은 한 장의 사진처럼 유사쿠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졌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서장" 의 끝 부분이다.

초반에 읽을때는 몰랐지만 다 읽고 나니 서장의 내용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시켜놓은 듯했다.

그리고 표지의 두 아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참..새삼 감탄스러웠다는..


"의사하고 기업은 서로 적입니다.

 기업은 사람의 몸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걸 무시하면서 번창해 가는 거죠.

의사는 죽을힘을 다해 그 뒤처리를 하고 있어요.

불도저로 깔아뭉갠 잔디를 하나하나 다시 심는 마음으로요. "


UR전산 주식회사의 장남이지만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가 된 아키히코.

의사와 기업은 서로 적이라 말하는 그는 아버지의 비서였던 미사코와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반한 듯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데이트를 하던 중 아키히코는 미사코에게 청혼했고 싫지

않았기에 미사코는 그와 결혼한다.


" 이 사건은 내 사건이다. 내 청춘이 걸려 있다. "

 

의사를 꿈궜지만 연이은 불행에 꿈을 접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사가 된 유사쿠.

유사쿠에겐 평생 잊지 못하고 지낼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동급생으로 만났지만 여러 면에서 앞지르지 못하고 매번 유사쿠를 좌절하게 했던, 

끝까지 이기고 싶었지만 이기지 못했던 남자아이.

우연히 만났지만 점차 가까워지고 사랑하게 되고..어쩌면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헤어져야했던 여자아이.

기억 속에 잊지 못하고 살아가던 중 살인사건 수사 중에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실이 아닐까. 그 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도 내 인생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


평범한 듯 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우연을 가장해서 이어지는 행운에 문뜩 불안감을 느꼈던 

미사코.

본인의 학벌이나 성적으론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대기업에 보란듯이 취직이 되었고, 회장의

아들과 만나게 되어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모두들 그녀를 신데렐라라 불렀지만 그녀는

내심..이런 우연한 행운이 불안하기만 했었다.


 아키히코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UR전산의 대표이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순번처럼 자연스럽게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를 이었고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아키히코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던 석궁에 의해 살해 된 채로 발견된다.

사건 해결을 위해 경찰이 투입되었고 그로 인해 만나게 된 아키히코, 유사쿠, 미사코.


 소설 속 중요 사건은 새 대표이사의 살인사건이었는데 그보다 더 흥미를 유발하는 건 세 사람의 관계였다. 정확히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관계. 셋 중 누구도 상상 못했던.

그 뿌리는 상당히 깊었다. 셋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이는 셋을 불행하게 하고 있었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특이하게도 데뷔 전엔 이공계 출신의 엔지니어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는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고 범인을 찾는 살인사건 외에도 이공계에서나(?) 가능한 소재들이 종종 등장해서 극의 즐거움을 더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특이한 이력이

빛을 발한다. 이전 작품들 중에서도 등장했던 소재이긴 하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일들 속에 누군가의 삶이 다뤄진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계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인간관계를 참 따뜻한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는게

이분의 장점인 듯 하다.  


 유사쿠의 집요한 노력으로 사건은 해결되었다.

그런데..사건 이후에 세 사람이 남았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분이라면 누구라도..

살해된 사람이나 용의자, 범인에 대한 부분보다 이 세사람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아키히코에게 마음이 쓰였다.


" 나 이외의 사람이 내 인생을 정하는 건 딱 질색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어쩌면 평범해 보이는 저 문장이. 아키히코에게는 다른 의미였을거 같아서.


 비록 소설이지만, 사건 이후에 아키히코, 유사쿠, 미사코가. 이후에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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