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카스트
스즈키 쇼 지음, 혼다 유키 해설, 김희박 옮김 / 베이직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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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은 '어르신'? 들에게 있어서, '학창시절' 은 그리움과 같은 '좋은 추억거리'를 제공하는 소중한

가치 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층에게 있어서, 그 학창시절의 기억이란, 과거처럼 그다지

소중하다거나, 그립다는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잊어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큰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는 '왕따' 라는 존재 때문

인데, 이에 심각한 '이지메' 문화를 지니고 있던 일본에서는 이 '학교 따돌림' 에 대한 문제를 보

다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전문 심리학적인 해석을 통해서, 어째서 집단 따돌림이 일어나는 것인

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이 책은 그러한 노력에 대한 결과물중 하나로서, 특이하게도 따돌림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

을 인도 고유의 '전통적 신분제' 카스트 제도의 성격과 비교하였다.   책에서는 학교에서 일어나

는 많은 따돌림이 절대적인 '그들의 신분사회'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신분이라

는 것이 어디까지나, 주위의 환경과 외부의 압력같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 아

니라, 학생들만의 의지와 관점으로 만들어진 '독자적 신분제' 라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어째서 어른들의 노력에도 따돌림 문제가 해소되지 않

는가?" 하는 사회적 물음에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앞서 이

미 '그들의 세계' 에 만연한 교실의 신분제에 과연 어른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접근하여야 하는

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학생과, 학부모, 선생들과 같은 '관계자' 들과 꽤나 기나긴 토론의 시간을

가지고, 또 그 진행과정을 이 책의 내용으로 삼았다.

 

때문에 이 책은 근복적으로 이지메의 해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책이 아니라, 어째서

이지메가 나타나는 것인가?  하는 원인규명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야 마땅하다.

 

 

이 책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환경, 직업, 접근성에 따라서 각자 다양한 시선

으로 따돌림에 대한 정의를 지니고 있다.   학생들이라 해서 '왕따'를 시키는 상위층에 대한 증오

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요,  교사라 해서 왕따가 어디까지나 학생들만의 문제라 여기고 있지

도 않다.   심지어는 '상대적 평등상태'인 학생들이 스스로 사회의 구조에 걸맞는 신분

차를 만들어 '스스로 작은 사회를 만든것이' 왕따문제의 근본적인 시작이라는 놀라운

주장도 나온다.  이미사회는 '잘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자'  '실패자'와 '성공자'라는 보이지 않

은 신분제를 가지고 있는데, 세삼스럽게 학교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그것인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부터 '이지메를 근절하자' 라는 정부와 학부모들의 바램은 절대로 이루어 지

지 못할 이상론에 불과해 진다.

 

학생들은 학생들만의 신분제를 통해서, 잘나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자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 구

분점은 어른들이 원하는 성적차나 능력주의가 아니라, 외모, 스포츠능력, 인맥같은 학생특유의

기준점에 의해서 구분되며, 낮은계급에 대한 그들의 대우는 마치 약육강식에 의한 동물적인 괴

롭힘을 동반한다.  이에 어른과 학생.... 사회적 신분제와 학생의 신분제에서 유일하게

것...그리고 제일 뿌리 뽑아야 하는 큰 문제점은 왕따 그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높은 신분에 있는 자가 뿌리는 '폭력의 씨앗' 의 존재라고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의 이지메는 집요한 폭력과, 금품갈취, 심지어는 성적인 폭력(인권유린)을 동반한다.   그

리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해결 해야 할 진정한 왕따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학생들이 편을

가르고, 끼리끼리놀고, 상대방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이미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으로 만연한 문제이기에 그 해결책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적어도 소외되는 계층에 대한 무

분별한 불이익에 대한 것만은 막아야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학생들에

게 괴롭힘에 대한 대가(사회적 책임) 은 상상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진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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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 지구인이 알아야 할 인류 문화 이야기 어느 외계인의 인류학 보고서
이경덕 지음 / 사계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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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은 후, 제일 처음 생각했던 것은 책의 내용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의외로 고정

관념은 무섭구나.." 하는 묘한 위화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때, 책의 '유아

틱한' 디자인을 보고, 이 책은 어디까지나, 청소년이나 유소년을 위해서 만들어진 (내용의 레벨

을 대폭 낮춘) 그저 그러한 책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막상 본문에 들어가자, 단순히 외계

이 ' 제3자의 시선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특징적 설정만 특이 할 뿐... 전체적인 글

의 수준은 사회. 정치. 종교. 문화 등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창조하고, 또 부수어 온 모

든 정신&물질적 가치에 대한 척도를 재조명한 전문가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외계인 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별 지구에서 가장 지적이고, '특이한' 종족은 바로 인류이다.   인

간은 문명을 창조했고, 또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영혼적 가치인 '신화'를 창조해 스스로 그것을 

섬기기도 했다.    때문에 과거에는 각 문명마다 확연한 특징이 존재했으나, 오늘날의 지구촌 시

대에 들어서서는, 그러한 문화적 특징이 점차 누그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들은 분명 과거

의 인간들에 비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 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니고 있고, 또 그들이 한계를 느끼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할 과학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인간은 '유아독존'

의 자만심 속에서 점차 끝도 모를 '사치'의 늪에 빠졌고, 또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기 보다는

문화, 상식, 영토, 그리고 피부색 이라는 차이점을 들먹이며, 인간끼리 스스로 깊은 갈등의 골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이는 분명,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인간존중의 상식이지만, 오늘날의 세상사를 보면,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

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어디 인간의 편 가르기가 '인간들' 에게만 한정된 것이랴?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라 자부하며, 지구의 모든 동.식물을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로 분류

한다.    그 덕분에 강아지는 주인을 잘 만나면, '개팔자가 상팔자' 라는 소리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모기와 파리는 태어날 때무터 해충이라는 딱지를 얻을 뿐만이 아니라, 보이는 즉시'에프

킬라'의 세례를 받는 수모를 겪지 않는가? 

 

제3자인 외계인들은 그러한 예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모든 사물에 대한  편애가 너무나도 심

한 종족이다. 라는 결말을 내린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들이 가축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방법 모두가 '위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개한 인류를 힘으

로 정복하기보다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인류와 섞여 지구에 정착하기 위해서, 그를 위한 사전

공작의 일환으로 인류학이라는 가치관을 만들어 낸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보고, 문화를 보고, 생활상을 보면서, 그들은 각각의 사건들

에 대해서 감탄과 분노를 자아낸다.  그들은 점점 인간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인간이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종족이지만, 상대주의적 배려심이 결여되어 있는 종족이기도 하다. 라는 확

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은 인류에 대해서  구제불능' 이라는 일방적인 딱지를 붙이

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인류와 같은 고정관념을 가졌다면... 분명 책 속의 지구의 인류는 어

느 영화에서처럼 '침략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리라.     

 

실제로 인간이 보기에도 '역사'에 그려진 인간이 발자취란, 피와 살점과 파괴라는 단어를 제외하

면 표현 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인류는 과거부터 산과 악을 분류하고, 지배자와 피지배

자를 분류했으며, 문명인과 미개인의 잣대를 강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재어왔다.     때문에 우리

들은 단순히 자원전쟁을 떠난 '이념적 전쟁' 을 수행한 지구 유일의 생명체라는 불명예를 달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며, 또 그러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의 '주의론자'들이 만

들어낸 갈등에 대체로 상대주의적인 관대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국이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가졌다고 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미개인'은 아니

지 않는가?  이 세상에 이유없는 행위는 없다.  상대를 비난하기 이전에 한번 상대를 이해도록

하자, 아니...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분명 '미개하

다' 라는 편견은 자연히 없어 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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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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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에 하나된 생각이란 있을 수 없다.  1억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1억개의 인생, 일억개의 사상

, 일억개의 욕망이 있을테니까."

 

이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흔히 입버릇 처럼 말하는 그의 인생철학?(믿음)

중 하나다.  이 말은 물론,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교훈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를 조금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의외로 무궁무진한 추론거리를 가져다 준다.  자... 그럼 이

책을 중심으로, 그 가치를 적용시켜 보면 아떠할까?  내가 생각으로는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인생은 언듯 일관성 있고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수 많은 갈림길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고요하게 안정된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언듯 단순하고 일관성있는 인생을 살

아간다.  내가 속한 한국의 사회상 역시,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란 '건강' '취업' '고임금' '복지' 

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단순해 보이는 사회' 속에서도, 인

간은 아둥바둥 죽을 힘을 대하서 살아가고, 때로는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기도

한다.   괜히 사람이 살면서 "어찌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랴.." 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때와 장

소에 따라서, 또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운명'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무거운

시련과, 또 행복한 행운을 부여 받는다. 

 

느닫없이 교통사고로 양 부모를 모두 잃은 사람,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액의 지폐를 주운사람...

이 모두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의 운명에 의해서, 각자 절망과, 기쁨을 맛보는 순간을 맞

이한다.    이렇듯 사람의 인생은 착실하게 노력만으로 구어지는 존재가 아니며, 이러

한 사실은 당연히 '인생의 베테랑'인 우리들의 뇌리에 깊숙히 박힌 상식중 하나다.  그렇기에, 우

리는 사람의 삶을 각색한 '소설'의 세상속에서, 이와같은 비정한 세상사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져

'휴식'을 취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해피앤딩' '훈훈한 이야기' '감성의 이야기'

등등 우리는 이러한 '힐링'의 이야기들을 현실성이 없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읽고 접하고 있

지 않은가?

 

그러나 불과 20~30년전만 해도, '읽히는 문학' 이란 그러한 부류의 것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예

를 들어'프랑스 콩쿠르상'을 수상한 이 책의 내용을 보자, 이 책의 내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쟁후의 프랑스'의 모습을 다룬다.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소년 아르쉐는 본질적으로 우리와

는 다른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젊은인생을 희생한

어머니와, 가족보다 프랑스라는 국가의 내일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한 레지스탕스 영웅의 아버

지를 두었다.    때문에 그는 우리들이 평범하다고 믿는 안정된 나날을 보내지 못했고, 오히려 어

머니의 무심함과, 집을 나가 살아있는지도 모를 기억없는 아버지를 문득 떠올리는 비운한 성장

기를 보냈다.

 

그 때문인가? 덕분에 아르쉐는 친 가족인 어머니와도, 가족의 정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없고,

또 어머니도 '의무의 틀'에 머무르며, 아들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아르쉐에게 어머니는 모성과 사랑의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증오와 미움의 대상도 아

니다.  그에게 어머니란 어머니라는 명찰을 단 '중년의 여인' 그리고 전쟁에 의해서 인간성이무

너진 '동정받아 마땅한 자아'에 불과하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비꼬고, 동정하고, 무시하며

살아가지만, 의외로 그들도 '가족이라' (어떠한 '여행'의 상승효과로 인해서) 드물게 서로의 마음

을 교환하는 작은 이벤트도 벌이는 인간다움을 보여주기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이벤트' 일 뿐, 그들의 일생은 언제나 무감각과 무관심의 연속

이다.  그러나 그러던중 소년 아르쉐는 점차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그녀들을 통해서, 인

간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지금껏 잊었던 그리움 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를 누린다.  그는

그 해방된 자유행동중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 노력없이 상속받은 '상당한 규모의 공장' 의 존재, '아버지를 찾기위해 어떤 윤락녀에게 건낸

'일만 프랑'의 가치란, 어디까지나 아버지를 찾기위서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부

수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비록 가족을 버렸지만, 그 때문에 불운하고 무미건조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그는 아버지를 미

워한 적이 없다.   프랑스의 영웅, 레지스탕스의 영웅, 그렇게 아버지를 기억하는 무수한 사람들

을 만나면서, 아르쉐는 이미 아버지의 무심함을 용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눈앞

에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였다.  아니..정확하게 말하

자면, 그는 전쟁에 의해서 망가진 불쌍한 모습이 아니였다.    그가 만난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명성과, 재물, 그리고 변태적인 성행위에 취한 타락한 영혼 그 자체였다.

 

그동안 간직해온 마지막 인간의 감정... 그것이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순간.   그 순간을 접하기

위해서, 주인공은 일만 프랑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해피앤딩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인공인 그가 철처하게 망가지는 배드 앤딩도 없다.    그는 분명 아버지의 존재

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앞으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

이다.   그는 그저 실망의 마음을 가슴에 안고, 무미전조한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그 어느일

이 일어나도,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내일이라는 삶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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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이야기 - 내 영혼을 위로하는
김현 지음, 조민지 그림 / 오션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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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간간히 이러한 책을 받아들고, "과연

무엇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 하지?"  라는 강렬한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분명 내가 스스로

집어들었고, 또 그 당시에는 어떠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 책을 골랐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 책 같은 경우는 단순히 표지의 고양이가 귀여워서) 일반적으로 소설보다는 사실주의적인

'재미없는?'  전문서만 읽어 내려가는 나의 가치관에 있어서, 이 책과 같은 내용은 분명 그 존재

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이 책의 내용의 '주제'는 분명 추억이고, 그 연결고리는 '음식'이다.  그러나 이 책에 존재하는 추

억의 먹거리는 무특정 다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저자 개인의 기억과 취향에 걸맞는

것이며, 그나마 공감대를 표시할 수 있는 독자층이라고 해봐야 저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대

에 한정 될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주제가 별나기는 하지만, 단순히 저자의 '자서전'에 해당하

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내가 무엇때문에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

아야 하는 것인가?' '과연 이러한 책에서 어떠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라고...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저자와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와의 조그마한 연결

고리는 가진 세대로서, 조금이나마 저자가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존재'(시대상)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분명 연탄을 간 적도 없고, 88올림픽의 뜨거운 관심을 둔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국민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방공의 날에

학교대표로 표어와 포스터를 제출한 기억도 있다.   (분명 내가 생각하기로는 90년대의 정서는 

80년대 말의 생활상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시기였고, 저자가 놀았던 방식 또한 그대로 전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그가 추억하는 수많은 놀이와, 음식같은 주제에 대해서, 그에 조금도 이질적이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가 추억하는 수많은 반찬들과, 그 시대상의 모습이 나

의 어린시절 떠올리는 기억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고 신기했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아버지을 여읜 그 슬픔에 문득 과거의 추억과 맛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

로 점점 맛보기 힘든 추억의 맛을 그리며, 이 책을 통해서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다는 뜻도 적어 넣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고, 그 때문에 저자가 생각하는, '추억에 대한 집착?'에 조금 여유로운? 시간

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가? 나는 문득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어린시절 즐거웠지만, 지금은 잊

고 있는 무수한 것에 대해서 전혀 추억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깨달았고, 또 그 기억을 소중하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족들과 다같이 집 밥을 먹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어

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투정부린 때가 과연 언제까지였던가?"  나는 이와 같은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침네 이 책의 진짜 '존재의의'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음식이나, 추억은 부분

적인 가치일 뿐.... '앞으로 살아갈 날,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대면하자.' 는 것이다.    그

것이야말로, 이 책의 참된 주제이자, 또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픈 저자의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그러나 과연 그것이 쉬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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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추적자들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의 발칙한 에덴 탐험기
브룩 윌렌스키 랜포드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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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에덴동산' 이라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낙원'이라는 성격의 것을 칭하는 단

어. 라는 정의에서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오랜기간 크리스천의 영향력을 받았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에덴'이란 (제3자로

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에덴이라는 것이 트로이나, 아틀란티스와 비교해서,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느낌이 드

는 것은 어째서 일까? 기독교인들은 에덴이야말로 인류의 요람이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라

는 기존의 믿음 (창조론)을 증명하는 최고의 이념적 가치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성서에 기록된 그 '낙원'의 존재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고, 또 그에 걸맞는 이론으

로 무장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은 에덴 추적자라는 그 제목에 걸맞게, 에덴을 발견하

기 위해서 노력했던,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또 그들이 어떠한 생각과, 이

념적 가치를 가지고 에덴이라는 것을 발견하려고 하였는가? 하는 것까지 세세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에덴이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을 위해서 노력했고, 그 노력의 증거는 수많은 가

설과, 주장으로 표면화 되었다.   에덴이 단순히 추상적인 이샹향을 칭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지

구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주장 같은, 포괄적인 이념적 가설을 포함해서, 에덴의 존재를 과학으

로 증명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종교와, 과학, 그리고 철학, 역사학 으로 무장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는 가설.  그리고 에덴이 북극 어딘가, 아니면 아프리카나, 심지어는 중국에 있었다고 믿었

던 지질학적 지식을 지녔던 사람들의 가설에 이어,  심지어는 외계인과 같은 초자연적인 매개체

와 접촉하여, 에덴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때문에 오늘날 (기정사실로 인식되는) 진화론으로 무장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에덴을 찾아

다닌 그들은 그야말로, 바보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절로든다.  그들이 행동하려는 동기라는것

은 단순히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라는 단순한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다.   진짜로 그들은 아담과 이브라는 인류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가 지구상에 실존했

진짜 역사라고 믿었단 말인가?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는 오랜 통치수단이자, 문화&도덕

적 이념의 척도였던 그리스도의 가치를 '불멸' 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러한 연구를 진행할

'이유'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들의 주장은 마치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태백산 어느부분에 환웅이 내려왔는가? 우리는 정말로 곰의 유전자를 이

어 받았는가?  하는것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의, (비정상적인 노력의 결과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창조론적 믿음은, 이제 진지함을 떠나, 오늘날의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판타

지적 이야기의 주요한 소개로 즐겨 사용되는 문화적 가치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믿기 어렵겠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창조론적 믿음은 서방세계의 많은 사람

들에게 뿌리깊은 (역사적)사실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지

만, 미국 내에서는 창조론을 주제로 한 '창조 박물관'이 버젓이 운영 되고 있다.)   때문에 성서

와, 에덴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움직임은,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라고 보아도 무방 하다.

 

에덴을 발견하기 위한 이러한 인간의 노력... 과연 그 노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어째서 그들은

'신화'라는 열차를 '역사'라는 레일에 놀려놓기 위해서, 그러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일까? 인간

이라는 종족의 우월성을 확립하기 위해선가? 백인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인가?  아니

면, 그저 단순히 그들의 탐구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위적 행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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