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성격 급한 뉴요커, 고대 철학의 지혜를 만나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석기용 옮김 / 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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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줄곧 법학 만을 배워온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는 결국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고, 또 점차 시간이 흘러 어느 제과점의 제빵사로서 빵을굽는 일을 하게된다.  바로 이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연민과 좌절 그리고 실패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본인 스스로 또한 절대로 풀리지 않을 응어리를 품으며, 어쩌면 기나긴? 그 삶 속에서 끝없는 자책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세상과 그 개인의 삶에 있어서, 한계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세상에는 스스가 만족하는 직엄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신앙과 철학 그리고 민간사회의 상식의 영역에 있어 그 불충분함을 극복하게 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고, 또 그것은 오늘날에도 나름 크나 큰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굳이 예를 들자면 이른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그 수 많은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어떠할까?   아니... 그 모든것을 떠나,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에 걸맞게 '통장잔고' 조차도 '살아라!' 요구하는 하나의 위로(가치관)로서 성립 될 수 있다.


자격증, 학위, 적금, 집, 직장 그리고 연줄...


물론 생각하면 이는 인간의 가치관중 '두려움'과 '절막함'이라는 감정에 매달리고 또 호소한 것이다.    때문에 흔히 철학적 해답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욕심과 탐욕 그리고 미련으로 옭아매는 방법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인 감상을 느끼지는 못할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이 책이 전하는 스토아 학파의 가치관으로 보게 된다면?  분명 그 길은 달라도 보다 본질적인 해석에 따라서는 나름 이에 따른 해방구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스토아 학파의 본질은 유명한 '견유학파'와 그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드러내는 스토아주의 또한 현실을 극복하고 또 받아들이는 법에 있어서, '미련을 잘라낸다'는 보다 이기적인 가치관이 드러난다.   물론 현대의 세상 속에서 오롯이 '오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대한민국사회에 있어서도 금융과 보험이라는 사업이 유난히 성업을 이어가는 이유를 따져보면, 결국 (현대의)많은 사람들이 그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보험은 그 당사자가 죽은 이후의 주변상황까지 '당사자에게' 걱정하고 또 대비하라 부추킨다.   물론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고, 또 걱정한다는 명분하에 '아름답게' 포장된다.   그러나 철학 특히... 스토아주의의 가치관으로 바라보면 정말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인간은 끝없이 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준비가 결국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도움이 되는가?   결국 그 준비로 인하여 사람은 어제, 오늘, 내일... 끝임없는 짐에 허덕이며 불행한 감정을 느껴야 하지 않는가?   이에 저자는 이제 '그러지 말자' 라는 스스로의 주장을 펴고 있다.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아성찰의 기회를 부여잡지 못해도, 결국 그 현실속에서의 만족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간은 살지만 결국 죽은것과 다름이 없다.    이에 만족의 의미와 가치를 조금만 바꾸어 보자,  오늘, 내일... 삶을 살아가면서 보다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보려 노력해보자.    준비가 벅차다면 한번쯤 내려놓으라, 그리고 그만큼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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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서 깊이로 (리커버 에디션) -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
윌리엄 파워스 지음, 임현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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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나다? 라고 말 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휴일' 바깥을 활보할때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하여 나 개인은 그리 불편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지만? 정작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그 행동에 대하여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눈치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날)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답답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본래 통신수단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필요할때, 무엇보다 긴급할때!  보다 신속하고 빠르게 정보를 전달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수단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사치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현대인들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새로운 '사치'를 부리게 되었다.   이른바 통신혁명으로까지 불리우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현대인들은 과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폭넓은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수 있게 있게 되었음은 물론 그 밖에 업무, 오락, 쇼핑에 이르는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가히 혁명적인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때문에 나 또한 일정한 통신비를 지불하며, 그 서비스를 마음껏 누린다.   아니?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어느날부터 나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데이터통신'에 의지하는 현상이 점차 늘어나고 또 당연시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소비의 영역에서 있어서도 이미 나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 더 크게 의지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출 퇴근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리고 짬짬이 적막한 시간을 달래고자 할때, 이제 나는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에 손을 대고, 곧 유튜브나 다른 오락거리를 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마트폰을 지닌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법'을 열거한 것일 뿐 딱히 그 행위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그 의지하고 마주하는 횟수가 점차 늘어갈수록 상대적으로 지금껏 쌓아왔던 어느 가치관 또한 점차 잃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때 저자가 우려하는 것 또한 그 잃어버릴 소중한 가치관에 대한 아쉬움이다.


처음 스마트폰 등이 등장했을때, 분명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많은 것을 누렸다.  그야말로 시계, 라디오, 텔레비젼, 전화기, 백과사전,컴퓨터, 은행, 쇼핑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 합쳐진 덕분에  쉽사리 생각하면 마땅히 인간은 그에 따른 시간을 번 셈이 되고, 또한 그에따른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허나 실질적으로 결국 그러한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셈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인간은 더 바빠졌다.  그리고 점차 얻어낸 정보들에 비해 활용하고 또 탐구하는 것에 대하여 점차 소홀히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나무위키, 네이버지식, 구글...


이제 세상은 '빠른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세상 속 의문을 극복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눈높이로 바라보았을때 그 순간에 얻어내고, 또 소비되는 정보와 정의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비약하자면 결국 오늘날 많은 해답들을 이끌어낼 주체는 두뇌가 아니라 검지 손가락의 정확성에 달려있는 셈이 아닌가?   '사고를 멈추어버린 현대인'  여담이지만 나는 이러한 책의 내용을 접하면서, 과거 접했던 책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철학 좀비' 어느날부터 철학하기를 멈추어버린 세상... 이때 그 작품 속의 세상이 바로 이 책이 우려하는 본질과 같았다.   언젠가 넘쳐나는 혁신과 정보를 감당 할 수 없게 되었을때의 인류의 모습이란?  과연 그때의 사람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그리고 결국 인간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또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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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유정희 외 지음 / 아이네아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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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분명 드래곤볼은 같은 또래에 있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어른들은 그러한 현실을 분석하며, 그 만화가 가진 폭력성과 잔인함을 걱정하고 심지어 '불매'운동까지 벌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란 어른들에 대하여 반항하는 존재가 아니였던가?   그 아무리 압수하고, 또 감시를 한다 해도 역시나 일본만화는 나의 주변 모든 학생들에게 있어서 나름의 해방구이자, 오락거리의 지위를 굳건하게 누렸으며, 바로 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일본문화에 친숙한'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있어서, 한 부분을 차지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이처럼 오랜세월이 흐른 오늘날 이 '뜬금없는 주제'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 공감보다는 많은 질문을 품게 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짜지)드래곤볼이라는 만화를 접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 높은 인기덕에 그 만화가 어떠한 내용을 품고 있는가? 하는 줄거리에 대해서는 대채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실제로 드래곤볼은 옛 중국의 서유기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과 또 다른 등장인물들이 소위 '절대적인 힘'을 손에넣기위해 끝임없이 싸운다는 내용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 '맞짱'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제국주의의 가치관이 드러날 수 있을까? 혹 매우 단순하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싸우고 빼앗아라' 라는 내용이 옛 (일본의)군국주의의 가치관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였을까?

 

만약 이 책이 위와 같은 교훈만을 드러냈다면, 나는 상당히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드래곤볼 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이라는 또다른 해석을 드러낸 또 다른 만화를 통하여, 보다 본질적인 '제국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도 있기에, 이에 내 개인적인 감상에 따르면 이는 그 나름대로 해석에 대해 의미가 있다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고 본다.


실제로 또 다른 예인'지팡구'는 나 또한 즐겨 읽었던 '가상의 역사 만화'였다.   그런데 이에 저자는 만화의 줄거리을 토대로 과거와의 인연과 과오를 단절 할 수 없는 일본을 그리며, 점차 그들이 경직되고 또 뻔뻔해지게 되는 과정의 모습을 분석한다.    실제로 과거의 일본이 스스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였나? 본래 이들은 서양의 충격적인 기술력과 정치력을 마주하며 이를 따라잡기위한 대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그 이후 보여주었던 오만함을 통해 옛 조선과 이웃국가들은 큰 피해를 보았고, 또 그 잔재는 오늘날 주변나라 뿐 만이 아니라, 일본 그 스스로에게도 크나 큰 상처로 남게 된다.


바로 이때 저자는 일본이 그 상처를 감추는 방법을 모색하며, 결국 자기방어와 '정당화' '합리화'라는 덪에 걸리고 말았다는 주장을 편다.  

그 증거로 분명 드래곤볼의 저자 스스로는 옛 군국주의의 가치관을 신봉하고 또 은연중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드래곤볼이 큰 인기를 얻고, 또 원작을 뛰어넘어 (계속해서) 다른 정신과 가치관이 '협업'한 그 순간!  결국 드래곤볼은 일본 그 스스로가 낳은 가장 일본적인 내용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이에 저자는 그것을 마주하여 '불편한 감상'을 남기기에 이른 것이다.  때문에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 오늘날 일본사회에 은연중 깔려있는 것! 즉 일본내의 자기방어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의 이야기다.


​오늘날 일본인은 말한다.   지난날의 과오는 일본의 전전 세대가 일으킨 과오... 그렇기에 오늘날 입버릇처럼 반성과 속죄를 부르짖어도 자신들에게 있어선 공허하고 '귀찮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지겹다" "언제까지 할 것인가"  이러한 그들의 인식에 대하여 이제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사람들 또한 과거와는 다른 또다른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제 저마다의 정의, 저마다의 의견만을 드러내며 평행선만을 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올바른 역사를 얼마나 증명하고 또 드러내고 또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머지않은 미래 서로간의 갈등 속에서 점차 설득력을 얻는 쪽은 "의문을 품고' 또 '배워 나아간 자'의 것이라!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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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재구성 - 새로운 정치를 위한 자유공화주의 선언
박형준.권기돈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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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세운다.  때문에 국민인 나는 그 헌법이 명시한 정의와 귄리 그리고 의무의 가치를 학습하며,이를 '국민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마땅한 것으로서 이해하며, 오늘날을 살아왔지만?    그러나 의외로 '정치의 논리'라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은 때때로 그 절대적?인 가치관이 여느'진형'이냐에 따라, 나름 쉬 변질되고 뒤집일 수 있는 위태로운 것으로서 이해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적폐청산과 애국보수 그리고 좌파와 우파의 갈등...


실제로 오늘날의 정치를 바라보면 근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가치관과 갈등 등에서 매우 심각한 대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는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정치'가 행해온 그 오랜 싸움의 또다른 연장선으로서 인식 될 수도 있을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것이 이처럼 정권의 구도가  뒤바뀐 이유를 생각하면, 오래도록 집권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한 그 보수세력이 점차 국민들에게 부패와 무능력함을 보여주었고, 특히 (이 시대에) 국정농단이라는 최악의 사실을 드러냈기 때문이였다.    때문에 국민은 그것을 목격하며 분노했고, 또 광장에 모여 직접적으로 변화를 요구했으며, 심지어는 그 요구를 관철시킨다는 놀라운 일을 해냈으나, 문제는 그 뒤에 집권한 정부가 그 좌.우파의 갈등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더욱 더 그 골을 파내려갔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이 책은 '보수의 새로운 역활'을 주문한다.


분명 보수정권은 국민에게 실망을 주었기에 그 스스로의 반성과 변화를 모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보수는 분명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경제성장과 발전을 이끌어낸 바탕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나름의 긍지를 가져도 좋을것이다.  아니... 그것이야 말로 오늘날 보수가 현 정권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 할 수 있는 큰 이유가 되어준다.    그렇기에 책 속의 내용 또한 성장이 멈춘 오늘날을 걱정한다.   물론 현정권이 목표로 하는 '정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 공동체는 그 나름의 부조리와 불충분함을 품고 있는것이 사실이기에, 정부는 이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생겨나는 충돌, 영향, 희생에 대한 모든 것을 조절하며,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정의'라는 그 가치관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국민은 그 대가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또 이해 할 수 있는가?


이때 국민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위의 질문에 대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허나 '보수'에 가치를 둔 사람이라면, 분명 오늘날의 모습은 그 너무나도 희생하는것이 많다 느낄 것이 분명하다.  성장이 멈추어버린 경제상황, 만성적인 일자리부족, 노동자와 기업간의 가치관 충돌, 그리고 광장정치가 언젠가 중우정치로 변질될 수도 있을것이라는 걱정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때 보수는 그 나름의 가치관과 노하우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미래에 보다 긍정적인 역활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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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 제4막 - 이병주 뉴욕 소설
이병주 지음, 이병주기념사업회 엮음 / 바이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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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겪어본적은 없지만,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잔혹한 삶이라는 형태도 있는 모양이다.    때문에 이 소설의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미국행을 선택하며, 희망보다는 죽음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며, 그의 인생 최악의 시기를 담담히 마주하는 절망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설과는 다르게, 예로부터 미국이란 새로운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 아무리 절망하고 또 궁핍하다 하더라도 미국 속 공동체와 융합되고, 또 미국의 시민이 된다면?  결국 그 선진국의 사회시스템과 경제는 그들을 여엿한 (풍족한)시민으로 만들어준다는 믿음이 이민자들의 뇌리에 은연중 깔려있었던 것이 사실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소설속 배경인 1982년의 미국 또한 바로 그러한 '기회'가 사방에 널려있는 것으로서 이해가 될 수도 있겠다.    혹 그래서일까?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죽기 위해서' 미국에 왔지만, 그 절박한 마음과 지갑사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근근히 그에게 삶을 유지시켜주었다.  단돈 80센트만으도 한끼 든든히 해결?할 수  있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식당, 그리고 더럽고 불결하지만 미국사회의 온갖 가난한 민족을 품어주는 할렘가의 호텔...  이에 그는 미국이 가진 가장 천박하고 원초적인 그룹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라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가 표현한 미국은 그야말로 '밑바닥 사회'로서 이해되는 일면이 있다.  


물론 주인공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옛 지식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을 잊어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춘으로 먹고사는 아프리카계 여인과, 한때의 무고로 빛나는 미래를 잃어버린 옛 친우와의 인연을 쌓아가면서, 그는 어느덧 그를 속박하던 죄의식과 책임감이라는 굴레를 내려놓고 오롯이 이 소중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또 다른 의미의 선택을 한다.   때문에 이러한 주인공의 변화를 마주하면서, 나는 어쩌면 그것이 (당시)미국이 가져다준 기회의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한국사회 그리고 미국 내에서의 한국 공동체의 모습은 '개인' 보다는 모두를 위한 '공동체'의 의식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주인공 스스로 또한 한국인으로서 책임감이라는 큰 짐을 스스로 지우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또 혹사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그대로 미국에서 만난 두 여인으로 인하여 그는 그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며 그는 그 누구보다 열혈히 사랑하고, 아끼고 오롯이 자신과 상대만을 바라보며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을 통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기억에 남는 존재가 된다.    이에 어쩌면 저자는 그러한 '미국적인 삶'을 동경하며 이 이야기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소설속에는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대담하고, 원초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늘날 '개인'을 우선시하는 현대인의 삶과 비교해 그 무엇하나 다르지 않다.    때문에 과거와는 다르게 오늘날에 있어서, 이 책의 내용은 음란하지도 또 민족성을 변질시키는 불손한 책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한국의 사회 또한 변했다.   1982년 그리고 2019년... 그 오랜세월동안 우리들 또한 내려놓고 또 받아들이며 끝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왔다.  때문에 나름 그 변화의 시기를 거쳐온 나에게 있어서도 이 소설은 그 각각 느끼는 바가 다르다.   그야말로 옛 기성세대와 X세대의 중간다리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나는 주인공 스스로를 속박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유를 선택한 변화에 대해서도 모두 이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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