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사냥꾼 주니어김영사 청소년문학 6
이하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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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청소년 소설은 '그저 그렇다' '뻔하다' '신선함이 떨어진다' 라는 혹평을 듣기 쉽다. 

그도 그럴것이 청소년이라는 자아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서적은, 주로 저자의 창의력보다는 사

회가 필요로 하는 교훈과 같은 요소를 중요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독

자들은 '청소년 문학' 을 마치 소설의 탈을 쓴 도덕책으로 밖에 느끼지 못한다.

 

물론 이 책도 이야기보다는 '청소년 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쓰여진 청소년 문학이다.   그

러나 저자가 문학인이자, 시인이라는 배경 덕분에, 이 책은 가칭 교과서를 벗어난 나름대로의

신선함이 돋보이는데,  저자는 특히 '폭력' 이라는 사회문제를 그림자 괴물로 등장시켜, 마치

판타지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 책 속의 주인공인 무영은 그림자 괴물을 본다.   그리고 그 괴물에게 공격당하고 괴롭힘을

받는다.    그러나 그 검은 촉수와 같은 괴물은 바로 인간을 숙주로 삼은 '욕망'과 '분노'와 같

은 감정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무영과 용수 그리고 혜영은 학생이 학생을 괴롭히는 왕따와 

폭력, 학생의 성적과 반의 평균을 '승진'을 위한 실적으로 평가하고 관리하는 선생들의 편견과

욕심,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이 '사람' 에게 느끼는 분노의 의식이 검은 괴물이 되어,

그 사람을 좀먹는 것을 본다.   

 

소설 속에서, 괴물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양식으로 삼아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

주인공' 무영에게도 해당이 된다.    실제로 무영은 과거 괴롭힘을 당하고, 친구를 '폭력'으로

잃은 과거를 가진 소년으로서,소설 속 누구보다 상처입은자로 그려지는데, 때문에 괴물은 무

영 속에 새로운 유영을 만들어, 그를 지배하고, 또 복수를 종용한다.      무영을 괴롭히는 폭

력,  일진, 그리고 주먹으로 가장 소중한 친구의 목숨을 앗아간 '깡패' "그것들은 이 세상에

필요없는 '악'이다." "물리쳐라" "네가 정화해라"   그렇게 '새로운 유영'은 무영을 어두

운 그림자 속에서, 깡패들과 폭력배들을 습격하는 '도시전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반장이자 무영을 좋아하는 혜영과, 무영의 친구를 자청한 용수는 그 흑화된 유명을 사

랑으로 보듬고, 그에게 복수보다 용서를 구하는 인간으로 돌아가라 주문한다.   자신의 상처,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큰 약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이다.     ​그들의 이러한 (교

과서 적인)정의와 설득은 결국 무영을 무영답게 돌려좋았다.   그리고 무영은 과거의 아픔을

벗어나 삼총사와 함께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용기와 눈높이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은 '폭력' 보다는 '화합' 을 '복수' 보다는 '용서'를 주장하는 착한 서적의 본분

을 다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이미 머리가 굳어진 나이때라서 그런지? 는 몰라도 저자의

이러한 응원이 그다지 '해답'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집단 괴롭힘과 왕따와 같은 청소년

의 문제는 '용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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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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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14년 세월호 사건... 이렇듯 한.일은 다수의 인명이 희생된 최악의 인

재(人災)를 경험했다.    물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사고의 규모에 놀라고, 희생자들의 수에

놀라고, 정부의 안전 불감증에 분노하기도 하였으며,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없어야 한다" 하

는 자기반성의 시간도 가졌으리라 본다.    
 
실제로 언론과 사람들은 그 사고를 접하며, 충격적 이라 즐겨 표현했다.   게다가 그 충격은 사

회와, 경제까지 침투하여, 도무지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정작 대중들과 언론들이 그 사고를 마주하며, 진정으로 '충격'을 받았는가?"

하는 일종의 의문을 품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사고'를 마주하며, 가장 근본적인 부분... 즉

사람의 죽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애써 눈을 돌리고 있다 라는 자기주장을 펴는데, 그

의 말에 따르면, 우리들은 사고를 마주하며, 희생자라는 단어와 숫자만을 마주할 뿐이며, 그야

말로 대중들은 추모하고, 반성하고, 자중하는 사회분위기에 휩쓸린 존재일 뿐, 진정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가족, 구조에 참여한 사람들과 같은 '현장의 사람들'에 한정되

어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의 현상에 대하여,  저자 뿐 만이 아니라, 나조차도 그러한 의문만을 품을 뿐,

그다지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죽음'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이

소설속에서 표현한 '죽음' 즉 청년 니시야마가 표현하는 후쿠시마의 참상의 이야기만 해도 물

에 불은 시체, 거센 물살에 회손되고 너덜해진 시체, 물고기에게 살점과 장기를 띁어먹혀 회

손된 시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끔찍하고, 생각하기 싫은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희

생자들과, 그와 연결된 가족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단순한 시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였던 존재들이였다.      때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현실'을 마주하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

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하는 해

답 없는 문제를 말이다.
 
동일본 대지진 으로 인해서 2~3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다.   게다가 쓰나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잔인함으로, 해당되는 모든 생명을 빼앗았다.     때문에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은

세상의 정의, 죽음의 이유,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끼며, 허무함과,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쓰

나미에 휩쓸린 아이들, 여성, 청년, 노인... 과연 그들의 인생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가?" "그

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야말로 이것은 개죽음이 아닌가?  아니... 억울한 죽음이 아니

던가?"   이제 일본. 한국의 사회는 이러한 슬픔과, 억울함과, 의문이 혼합된 뫼비우스의 감옥

에 갇혀 버렸다.   
 
때문에 저자는 민족과 나라를 무력감에 빠뜨린 그 '감옥'의 존재를 부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담은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속에서 "죽음은 분명이 당사자에

게 있어선 끝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無)의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과 인연을 이어

온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과거와 오늘을 살았던 인간 으로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라는 자기주장을 펴며, 실제로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나

름대로의 해답이 되어주었다.      이제 한국도 세월호를 바라보며, 과거의 일본인과 같은 무력

감을 느낀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보며, 이러한 저자의 해답이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있어

서, (과거와 같이) 나름대로의 해답과 위로를 전달하는 역활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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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면 풍경 -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유민호 지음 / 살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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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가 '일본은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품었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물론 객관적

으로 생각하면, 나의 생활에 있어서, 일본의 존재는 상당히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친구와의 가십거리부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자기

주장'에서의 일본을 그야말로 '왜놈'으로 폄하하는 모순된 모습을 쉽게 보여주고 있는데, 물론

이는 나의 믿음과 상식 보다는 '한국에 만연한 일본 비하'의 문화에 굴복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한국의 대중들에게 퍼져있는 '

왜놈'들의 이미지.   그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반성 할 줄 모르고, 이지메 문화

를 만들어 내고, 오만하고, 폭력적인 존재... 심지어 요즘에는 과거 일본을 지배했던 '군국주의'

를 부활시키려는 '악의 축'에 열광하는 어리석은 집단이라는 꼬리표까지 얻었다.    그러나 과

연 그들이 이처럼 '막장'을 달리는 민족일까?    과연 그들이 오늘날의 뉴스에서 보여지듯이 소

수의 '권력자'들이 주장하는 '군국주의'에 열광하고,또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물론 일본이 잘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인들 대부

분이 자신이 보고 인정하고 싶어
하는 단편적인 사실들만 보고, 또 그 시선을 바탕으

로 일본을 평가하는 옹졸하고 잘못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
" 라는 주장을 편다.      그의 주

장에 따르면, 오늘날의 언론은 국민이 보고 싶어하는 '일본의 잘못' 만을을 부각 시키고, 또 이

에 길들여진 국민은, 일본의 대단함을 극찬하는 사람에게는 '친일파' 라는 딱지를 붙여 경멸하

고 따돌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치' '언론' '문화' '국민' 모두가

혐일의 감정을 조장하고, 또 그를 인정하는 흐름을 주도하고,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문화에서 바라본 일본이 '참된 일본'의 모습 일 수 있겠는가?    실제로 세

상에 드러난 일본이란 (예전에는) 세계2위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나라이자, 만화. 애니메이션

과 같은 미디어를 바탕으로 타국에 성공적인 親日문화를 심은 流 열풍의 선구자이기도 하고,

또 단결된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과거의 전통과 문화를 고집스럽게 이어가고 있는 장인의 나라

라는 명성을 쌓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고집스렵게도 한국인들은 애써 그들의 성과를 무시

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아니... 나의 생각으론 '한국' '일본' '중국' 모두가 상대의 장

점보다 단점을 보는 옹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것 같다.)
 
실제로 오늘날의 극동아시아의 정세는 '서로에 대한 폄하' 를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악' 이 있으면 '선'이 존재하듯... (평화를 원한다면) 각 나라의 사람들은 원초적인 타

민족 혐오주의에서 벗어나,  "남들도 그들끼리의 민족을 형성하면서, 민족의 장점을 발전시키

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면도 있다" 라는 점을 서로 인정하고 칭찬해야 마땅하다.
 
괜히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는 손자의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편양된 지식은 결국

편견을 낳고, 사실보다는 환상
을 낳는 부작용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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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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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또 욕해도 결국에는 그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 이렇게 한

반도에 살았던 '민족'들은 그가 속해 있는 '국가'의 틀을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결정을 멈

추지 않았다.      과거의 침탈, 위기는 물론이고, 현대의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이 보여주듯 고

위 공직자 들이 싸지른 뒷감당까지 자청해서 해결해준 그 '애국심'의 원동력, 그야말로 애국과

구국이라는 단어는 그 속의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로 단결하게 하는 마법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무조건 적인 애정(애국)'이 '아주 잘못되었다' 라고 정의 할 수

는 없다.    실제 과거 일제침략기가 보여주듯이 '나라가 없는 민족'의 미래는 그야말로 오늘날

의 '무 국적자'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차별과 희생을 강요당해도

나 자신 스스로도 지킬 수 없다는 면에선, 고대의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로 추락한다고 말 할 수

도 있겠다.     때문에 민족들은 자신들의 '울타리'를 굳게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 울타리

가 결국 '나 자신이 납득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다면' 과연 개인은 그 울타리를 스스

로 버릴 각오를 해야할까?  아니면 미우나 고우나 참고 사는 인내를 발휘 하여야 할까?   이처

럼 적어도 이 책의 저자는 위와 같은 문제를 두고 많은 갈등과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실제의 역사 속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개인의 믿음과, 국가에 대한 실망을 이유로 '나라를

등지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망명자들은 타국에서 안정된 삶

은 물론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는데,  물론 오늘날의 사람들도 때

때로  '국제화'의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나라를 등지고, '정치의 신념'을 이

유로 나라를 등지지만,  소설의 무대가 된 시대와, 오늘날의 이민은 '난민'과는 다르게 합법적

으로 다른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야말로 그들은 타국에 있어, 오늘날의 북한 탈북자와 같은 존재...즉 '환영받지 못하는 탈출

자' 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 '자신이 스스로 살아갈 나라를 고른다는 것'  이는 그만큼의 복

잡한 절차와 시험을 통과할 자질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 '개선문'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등장 인물들은 그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고, 또 역사의 부조리를 온몸 그대로 실감

해야 했다는 점에서, 매우 불운한 운명을 살았다.    과연 그들이 스스로 불운한 삶을 선택한 이

유는 무엇인가?  이제 슬슬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자. 
 
역사적으로 과거 독일제국의 시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신념)'나치즘'을 선택했고 또 그에

열광했다.   이에 나치는 자신의 나라(독일)을 일종의 경찰국가로 만들었고, 결국 '비상조치'를

이유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축소하고야 말았는데,   때문에 '소수자'(많은 유대인들과 나치

즘에 동조하지 않는 국민) 들이 나라를 등지고 국외로 탈출했다.     프랑스, 스위스, 영국, 오스

트리아... 그야말로 독일에 국경을 둔 모든나라가 '탈출'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타국은

몰려드는 '이민자'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고,  또 그러한 분위기는 결국 주인공 라비크 에게도

적용되어, '의사 라비크' 라는 존재를 '불법이민자 라비크' 로 격하시키는 가장 큰 요소가 된다.  
 
그 누구가 나라를 버리고 싶겠는가?  '의사 라비크' 그는 독일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치즘과,

위정자의 공포정치는 결국 개인(라비크)와 조국(독일)과의 끈을 무자비 하게 잘라냈다.    아무

리 고급호텔과 술집을 전전해도, 결국 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불법 이민

자일 뿐이며,  그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사랑' '목적' '목표' 또한 그의 삶에 그 어떤 활력을 불

어 넣어주지 못한다.      때문에 프랑스 에서의 라비크는 삶의 목표가 없다.     아니 더 정확하

게 말하면 과거 (비밀경찰)게슈타포가 앗아간 '미래' 를 저주하며, 개인적으로 죄 없이 그를 고

문한 '나치주의자' 하케에 대한 증오와 복수의 마음가짐 뿐이다.
 
이처럼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라비크'와 비슷하거나, 더욱 끔찍한 삶을 살았다.   아무리 시대

의 요구였다고 하지만, 독일은 독재를 허용했고, 또 그 속에서 일어나는 소수자들의 핍박을 묵

인했다.     때문에 자유와 권리를 찾아서 피난을 떠한 사람들은 독일에서의 모든 지위를 포기

하는 용기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로 압송된다는 공포를 이겨내고 나라를 떠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 용기의 대가는 무엇인가?   독일은 결국 전쟁을 통한 확장주의를 천명했고

, 주인공 라비크가 머무는 프랑스와 같은 이웃나라를 침공해 그 땅에 나치즘을 심었다    '나치

즘을 피해 도망쳤지만, 결국 그에 흡수되고 만 역사의 아이러니..  에 실제로 독일인 이면

서, 독일인임을 포기했던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은 더욱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

가?'  하는 모순 속에서 고통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독일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라비크'의 삶... 이 소설은 그야말로 시대의 이념과 불운의

운명 속에서, 오로지 역사의 폭풍에 휘말리고 희생된 연악한 개인에 바치는 진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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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 - Golden Time
이주희 지음 / 매직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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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바라고 또 믿어 온 것은 무엇일까?      사랑, 명예, 공명... 물론 이처럼

각각의 가치관 마다 다양한 삶의 목표가 존재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원초적인 가치관을 들여다

보면, 착하고 바르게 살면 복이 오고, 악하고 또 이익을 위해 남을 짖밟으며 살면, 언젠가 그 업

을 받는다는 '권선징악' 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 삶과

인생"  이처럼 한국인은 전통적인 '성선설' 과 '도덕론'에 근거한 인간의 가치관을 숭상해온 민

족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전통적으로 믿고 의지해온 그러한 믿음을 그야말로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어린 청소년이 살인을저지르고, 사소한 이유로 남을 폭행하고, 삶이 무가치 하다는 이

유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해하는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  그리고, 욕정을 풀기 위해서 약자

를 제물로 삼거나,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먹이로 삼는 '약육강식'현 사회적 분위기의

존제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세상이 그만큼 변질되고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오늘날의 정부는 하나의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세상을 바로잡는다

는 명목으로, '특별법'을 만들어 사람을 통제하려고 한다.    물론 그러한 입법활동이 아주 효과

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그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땜빵식 응급

처치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여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

필요한 의료행위는 '응급처치'가 아니라, 심도있는 진단과 꾸준한 치료의 존재이다.
 
      
그러나 지금의 공직자들은 단기간의 질책과 책임론을 벗어나기 위해서, 보다 빠른 '응급처치'를

신봉한다.     그러나 세월호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보면, 도리어 그러한 지푸라기식(그때만 확

불타오르다 금방 식어버리는) 관심과 지원은 그들에게 오히려 상처와 아픔만을 던져주는 것

같다.     특히 세월호 같은 사건은 이익을 위해서, 고객의 안전을 등한시한 '회사' 그리고 경제

대국을 위해서라는 대의를 위해서, 국민의 권리를 축소시킨 '정부' 가 합작해 만들어낸 사상 최

악의 인재(人災) 이다.      그러나 그들이 피해를 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과연 어떠한 사죄

를 하였는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목격한 사람들... 특히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

아갈 젊은이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과연 어떠할까?   실제로 이제 젊은이들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고, 정부는 국민들을 위해서 일하는 장소라는 교과서적인 상식을 비웃는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은 결국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은 그

러한 불신을 그대로 증명하는 내용을 지니는 내용과 더불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오늘날을 어

떠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단편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예로 이 소설의 주인

공(주희)은 어릴적에는 '성추행'을 청소년기에는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지만 결국 살아났다는 

불행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결국 그는 꾸준한 재활운동과 더불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

하여 주는 '재영' 을 만났고, 또 병원에서 꾸준히 그를 응원해 주는 다양한 친구들과, 어른들의

응원에 힙입어 사회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데, 주희의 그 용기에 대한 하늘의 보답은 한탄스럽

게도 그가 탄 '그네호' (세월호)의 침몰과, 사랑하는 재영의 죽음이다.
 
주희는 눈에띄는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침몰하는 선박속에서) 죽어가는 재영을 살려달라 울부

짖는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해경' '정부' '회사' 들은 모두 그 사건에 대한 적극적

인 책임을 회피했다.    세월호 피해가족들의 절규에  "우리는 실질적 권한이 없다." 고 답변한

해경, 훗날의 책임론이 두려우니 '구조하는 시늉이라도 하라' 지시한 고위 공직자, 심지어 세월

호 희생자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과 사죄를 하겠다며 고개를 연신 숙이던 회사는 결국 그들의

장례비용조차 깎으려 했다.      이렇게 소설속의 주희는 그러한 현실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그리고 다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무엇하나 기대 할 것도 요구 할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

진다.    
 
무력감... 그리고 실망... 주희는 결국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는

짧은 수필을 남긴체 더이상의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렇게 미묘하고 텁텁

한? 여운을 남기며, 그 최종적인 이야기를 마치고야 만 것이다.

 
'세상은 책임과 의무도 필요하지만, 희망과 낙천주의또 필요하다'   그러나 침울하게 침체된 한

국의 사회는 책임과 의무는 있지만, 희망과 낙천주의는 전무하다.    과연 오늘날의 세상은 그

속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정의를 보장할까?   혹시 이대로 '무사안일''복불복' '무책임'과 같은

단어가 상식이 되는 세상이 도래하지는 않을까?    (만에 하나 그리된다면, 나는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다른 차원으로 떠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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