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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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를 마무리 했다는 만족감! 그러나 나는 그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감에 앞서, 나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의 변화에 대하여 한번쯤 풀어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아주 오래전 학생시절,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나름) 비평한 바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에 나는 어떠한 기준으로 이러한 자기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이에 어쩌면 그 오만함 속에는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 그리고 전문가와 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확고한 지식만이 오롯이 '정답'이라는 옛 사고방식에 기대었던 탓이 크다. 허나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그 역사적 견애는 보다 진보하고 또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이에 현대의 지성에는 '역사는 이야기' 라는 해석을 더해 그 이야기 속에서 진실의 근사값을 발견하는 과정을 이른바 '역사에 접근하고 또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크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저자의 드라마틱하고, 또 인간미가 넘치는 문장 또한 생각해보면 보다 역사를 표현하는 저자의 개성이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옛 로마인 이야기를 지나 이탈리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한 저자 역시도 그 스스로를 갈고 닦아왔기에, 이에 최근의 저서라 할 수 있는 이 프리드리히2세의 이야기는 결국 저마다의 비평과 반성을 보완한 가장 정교한? 내용으로서 다듬어 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게 하기 충분했다.

그 둘이 살아온 13세기의 이탈리아에서 대두되고 있던 신흥 세력은 '기도하는 사람' 이나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였다. 1백 년 뒤에 찾아오는 르네상스 초기 시민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상권 377쪽

각설하고 저자가 스스로 '반드시 써보고 싶다'라고 말한 인물, 그리고 저자가 정의한 바에 의하면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를 열어 근.현대의 사회에서 또한 당연시 되는 '정교분리'를 실행하려 한 인물로서, 군주 프리드리히2세의 생예와 업적 등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엿보는데 있어서, 특히 그의 인물과 사상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형성)과정 또한 중요하지만, 결국 그가 무엇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려 하였는가? 그리고 어린시절 고아가 되어, 로마 카톨릭의 후원과 보호를 받은 연약한 (세력)시절을 벗어던지고, 또한 그저 시칠리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그의 정당한 통치권을 확립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닌 '이단'과 '파면'이라는 강압을 견디면서까지 진행하려 한 그 개혁의 의지와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이에 이 책은 분명 의미있는 해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것이다.

실제로 과거 카노사의 굴욕을 기점으로 굳어진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은 유럽사 뿐만이 아닌, 세계사에 있어서도 수 많은 흔적을 남긴다. 이에 예를 들어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에서 표현되는 수도사들의 생활,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의 생활상 뿐 만이 아닌 그 정신적인 억압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옛 그리스 로마의 지식을 넘어, 인간으로서 당연한 해학적 감정까지 봉인하려 한 된 '종교의 힘'(또는 역활)은 분명 오늘날 추구하고자 하는 바와 큰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중세 유럽을 뒤흔든 교황과 황제의 항쟁은 '카노사의 굴욕'에서 시작해 -중략- '정교분리'가 당연히 여겨지는 현대에 이르는데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야 했다.

하권 213쪽

이에 '해방'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원하는 것을 쟁취 한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비록 인물 프리드리히2세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이 황제로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였다 하여도,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독점하고 또 억압하고 있었던 것을 분리시키고 또 독립시킴으로서 만들어낸 결과는 이후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는 씨앗이 되었다. 특히 천상을 떠나 지상의 지배를 위한 법을 공표하고, 대학을 지었으며 스스로가 이성과 실용의 유용함을 이해하였기에, 학문과 과학의 영역에도 관대했다는 사실은 분명 나에게 있어서도 큰 공감을 가질 수 있었던 업적둘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이기에, 이후 중세의 끝을 장식하려는 저자가 그 새로운 시작점으로서 프리드리히2세를 선택하여 한 것은 분명 정확한 것이였다 생각된다. 물론 이 인물이 이후 계몽주의로 진행되는 역사의 진보에 있어 얼마만큼의 역활을 했는가에 대하여는 (역사학자들) 저마다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역활 가운데서 저자가 '선구자'라 주장한 부분에 있어서 크게 긍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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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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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를 마무리 했다는 만족감! 그러나 나는 그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감에 앞서, 나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의 변화에 대하여 한번쯤 풀어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아주 오래전 학생시절,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나름) 비평한 바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에 나는 어떠한 기준으로 이러한 자기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이에 어쩌면 그 오만함 속에는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 그리고 전문가와 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확고한 지식만이 오롯이 '정답'이라는 옛 사고방식에 기대었던 탓이 크다. 허나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그 역사적 견애는 보다 진보하고 또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이에 현대의 지성에는 '역사는 이야기' 라는 해석을 더해 그 이야기 속에서 진실의 근사값을 발견하는 과정을 이른바 '역사에 접근하고 또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크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저자의 드라마틱하고, 또 인간미가 넘치는 문장 또한 생각해보면 보다 역사를 표현하는 저자의 개성이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옛 로마인 이야기를 지나 이탈리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한 저자 역시도 그 스스로를 갈고 닦아왔기에, 이에 최근의 저서라 할 수 있는 이 프리드리히2세의 이야기는 결국 저마다의 비평과 반성을 보완한 가장 정교한? 내용으로서 다듬어 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게 하기 충분했다.

그 둘이 살아온 13세기의 이탈리아에서 대두되고 있던 신흥 세력은 '기도하는 사람' 이나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였다. 1백 년 뒤에 찾아오는 르네상스 초기 시민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상권 377쪽

각설하고 저자가 스스로 '반드시 써보고 싶다'라고 말한 인물, 그리고 저자가 정의한 바에 의하면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를 열어 근.현대의 사회에서 또한 당연시 되는 '정교분리'를 실행하려 한 인물로서, 군주 프리드리히2세의 생예와 업적 등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엿보는데 있어서, 특히 그의 인물과 사상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형성)과정 또한 중요하지만, 결국 그가 무엇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려 하였는가? 그리고 어린시절 고아가 되어, 로마 카톨릭의 후원과 보호를 받은 연약한 (세력)시절을 벗어던지고, 또한 그저 시칠리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그의 정당한 통치권을 확립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닌 '이단'과 '파면'이라는 강압을 견디면서까지 진행하려 한 그 개혁의 의지와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이에 이 책은 분명 의미있는 해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것이다.

실제로 과거 카노사의 굴욕을 기점으로 굳어진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은 유럽사 뿐만이 아닌, 세계사에 있어서도 수 많은 흔적을 남긴다. 이에 예를 들어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에서 표현되는 수도사들의 생활,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의 생활상 뿐 만이 아닌 그 정신적인 억압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옛 그리스 로마의 지식을 넘어, 인간으로서 당연한 해학적 감정까지 봉인하려 한 된 '종교의 힘'(또는 역활)은 분명 오늘날 추구하고자 하는 바와 큰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중세 유럽을 뒤흔든 교황과 황제의 항쟁은 '카노사의 굴욕'에서 시작해 -중략- '정교분리'가 당연히 여겨지는 현대에 이르는데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야 했다.

하권 213쪽

이에 '해방'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원하는 것을 쟁취 한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비록 인물 프리드리히2세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이 황제로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였다 하여도,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독점하고 또 억압하고 있었던 것을 분리시키고 또 독립시킴으로서 만들어낸 결과는 이후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는 씨앗이 되었다. 특히 천상을 떠나 지상의 지배를 위한 법을 공표하고, 대학을 지었으며 스스로가 이성과 실용의 유용함을 이해하였기에, 학문과 과학의 영역에도 관대했다는 사실은 분명 나에게 있어서도 큰 공감을 가질 수 있었던 업적둘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이기에, 이후 중세의 끝을 장식하려는 저자가 그 새로운 시작점으로서 프리드리히2세를 선택하여 한 것은 분명 정확한 것이였다 생각된다. 물론 이 인물이 이후 계몽주의로 진행되는 역사의 진보에 있어 얼마만큼의 역활을 했는가에 대하여는 (역사학자들) 저마다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역활 가운데서 저자가 '선구자'라 주장한 부분에 있어서 크게 긍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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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이지 세계사 365 - 세상의 모든 지식이 내 것이 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심용환 지음 / 빅피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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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 그리고 보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 많은 방법을 동원해 저마다의 지식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하고 또 그것으로서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 이처럼 현대 사회에는 과거TV 프로그램을 넘어서, 보다 다양한 매체들을 동원하여, (나름) 전문지식을 뽐내고 또 그로 인하여 유명새를 얻는 학자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스타강사라 불리우는 존재들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과거 수 많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현재 대중을 휘어잡는 지식인의 그룹은 생각보다 그 회전율?이 빠르며, 이에 이 책의 저자 또한 최근 미디어를 통해 유명새를 타고 또 성장하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나 개인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주장이다. 나는 나름대로 존경하는 역사가(지식인과 그 지식의 성격)가 따로 있다.-

지금까지 세계사는 유럽인들에 의해 쓰여 왔고, 여전히 쓰이고 있다 -중략- 우리를 중심으로 놓고 우리의 필요와 관심을 기준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에필로그 393쪽

그도 그럴것이 이러한 미디어 속의 지식인들은 크게 대중들을 위한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그 무엇보다 '평균적인 지식'등을 다룬다. 실제로 이 책의 수 많은 지식들은 세계사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문명과 예술사에 이르는 폭넓은 지식을 다루고는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을 들어가다 보면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거나, 수정이 요구되는 역사의 흐름을 표현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최근)인정되여 정립되어진 사전적 의미의 지식이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보다 강하게 받았다.

물론 이 책의 주제가 보다 넓은 의미의 지식을 다루고, 또 그에 따른 지식의 토대를 만들어가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어느 서적이나,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관 그리고 어느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개성적인 면면을 살피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결국 이 책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지식인이자 스타로서 발돋음 하기 위한 나름의 준비이자, 저자 자신의 면면을 드러내는 소개장으로서 그 이상의 가치는 보여지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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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냥꾼 - 역사가 돈이 되는 세계를 찾아서
네이선 라브.루크 바 지음, 김병화 옮김 / 에포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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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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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즐겨보던 '진품 명품'과 함께 최근 유튜브 등에서 '닉 로스'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진 프로 '전당포 사나이들'(히스토리 채널)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오래된 물건이 가지는 가치가 얼마만큼 커질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 오늘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옛 사람들의 생활상과 기술 등이 어느정도까지 다다랐는가에 대한 실체(물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면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라 할 만하다.

다만 흔히 대중 속 인식 하의 골동품이라 하면 도자기와 서적 그리고 무기나 (보석)장신구와 같은 수 많은 보물들을 떠올리며, 더욱이 이를 다루거나 수집하는 세계 역시도 감정사와 전문가 (또는 역사학자)들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물론 그러한 인식이 전혀 틀리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가 수집하고자 하는 물건의 실체, 그리고 그 끝없는 탐구와 관심이 큰 돈을 벌어다주는 직업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마주하다 보면, 결국 세상이 (어느 것을) 가치있다 여기게 되는 과정에는 단순히 그 물건이 지니는 가치를 넘어, 더 높은 프리미엄을 더해주는 다른 방식(또는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편지의 수신자는 에드워드 클라크이고 서명자는 존 헬리-어친슨이였다. 그 이름들은 내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중략- "1801년 9월 이집트라는 글자를 봐 이건 분명히 로제타석이야. 내가 장담하건대 이건 로제타석을 확보하라는 지시야"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옳았다.

113쪽

희귀 문서와 역사 유물을 다루는 세계 최고의 거래회사 라브 컬렉션의 대표

표지

실제로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옛 편지와 공문서 등을 구입(또는 수집) 하고 또 이를 되팔아 이익을 얻는 사업을 하고 있다. 물론 이에 누군가의 유품이자, 수집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들... 예를 들어 저자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역사의 매력에 미치게 된 이유와 함께, 나름 자신들이 팔고자 하는 물건이 '대박'을 터뜨려주기를 바라는 일반인들의 바램, 더욱이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발견된 역사상 둘도 없는 보물이 가져다 준 교훈과 이익에 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는 역사가 기억하는 가장 극적이고 유명한 한 순간을 증명하는 '종이쪼가리 한 장'이 수백 수천달러에 거래되는 '별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그 역사에 대하여 그만큼의 관심과 욕심을 부릴줄 아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세삼 깨닫게 해주는 일면이 있다 생각한다.

때로는 종이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뒤집어보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큰 보상을 받는다.

199쪽나폴레옹의 사망에 대한 보고서

그렇기에 이미 저자가 몸담은 세계에는 나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전당포 사나이와 같이 개인과 기업, 그리고 개인과 개인의 거래를 넘어 공식적인 마켓과 경매에 이르는 방대한 시장 속에서, 저자들은 저마다의 보물과 성과를 건져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때문에 단순히 전문지식이나 학위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지위는 그 과정을 거치는데 있어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주장한다. 이에 저자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다가선 역사와 그 과정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단순히 이미 정립된 사실과 단편적인 역사의 결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역사가 지닌 이야기를 끝까지 마주하고자 하는 끈질긴 노력이 더해짐으로서 비로서 역사의 발굴가이자 상인으로서 성공한 자신이 있다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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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일본 소설을 만나러 가다 -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현대 일본 문학의 흐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사이토 미나코 지음, 김정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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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넓은 의미로서 (저마다)'자국 문학의 변천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처음 그것에 대해 든 생각은 그저 단순한 문장과 스토리 등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보다 당시 사회의 단면을 살펴보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였다.

실제로 위와 같이 이 책의 저자 또한 오랜 장르로서 사랑받아 온 소설을 중심으로 창의성과 재능으로 사랑받아 온 문호들과 그 대표적인 작품의 주제,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시 독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만들어낸 일종의 공감대(또는 사회적 인식)등을 통하여 소위 과거 시대가 낳은 소설과 그 변화과정 주제로 많은 지식을 펼치고 있기에, 이에 '나' 또한 단순히 일본 내의 사회 뿐 만이 아니라, 이웃국가로서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만들어간 인식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나름 밀접하고도 흥미로운 공감대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한편 문학사적으로 보면 1960년대는 메이지 20년대 부터 지속된 일본의 근대문학이 커다란 동요를 겪은 시기였습니다. -중략- 문학은 결코 취미도, 오락도, 심심풀이도 아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중략- 문제의식과 결부된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11~12쪽 순문학을 둘러싼 패전 후의 논쟁

각설하고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수 많은 독자들은 문학의 입문과 선택 가운데서 이른바 '계보'와 '의미'를 따지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아니... 정리하자면 문학을 마주함에 있어서 현대의 독자들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며, 점차 자신의 문학세계를 다듬어 나아가는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내는 문학과 유행과 상식... 이른바 대세가 만들어낸 베스트셀러들은 과거나 오늘날이나 출판과 문학의 견인차 노릇을 하며,다른 작가들을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과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에 이 책 속에서도 저마다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소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당시의 일본 국내의 모습과 함께, 그들의 역사와 인식 가운데 통용되는 독특한 정서... 이른바 일본국내의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에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이를 (대표하거나) 인식하는 독특한 코드들이 부여됨으로 인하여 만들어지게 된 현상, 그리고 그것이 보다 자유롭게 투영되었던 문학의 세계를 통해 저마다의 개성으로 표현(또는 완성)되어 가는 것은 정말로 흥미롭게 여겨볼 가치가 있는 것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실 세계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눈물과 감동'을 원하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흘러들어갔고,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닌 '영원의 제로'를 골랐습니다. 독자의 질이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은 본말전도일 것입니다. 가혹한 시대에 가혹한 소설따위는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86쪽 순문학의 DNA는 극복할 수 있는가

때문에 문학은 오래전부터 사회의 메모지로서 그리고 대자보로서 저마다의 역활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역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의 문학이 점차 정형화 되어가고 있었으며, 또 스스로의 엘리트주의에 빠져 대중과의 거리를 벌려왔다고 경고한다. 이는 과거와는 달리 현대의 일본문학이 가지는 역활이 변화하고 있음을 진단하며 보다 미래지향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실제로 이 책이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에 기댄다.

1960년대... "그 후의 역사는 왜 서술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일본 문학의 순문학은 이미 그 이전의 시대에 완성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랜 시간 속에서 문학은 그저 조용히 계승되어진 재미없는 (예술)세계였다는 말인가? 과연 그렇다면 독특한 세계를 무기로 한 판타지에서 여느 영상매체의 각본으로도 활용되는 소설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대의 인간성과 그 감성을 자극했던 많은 문장과 이야기들은 어떠한 위치에 놓여져야 할까?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현상을 탐구하고, 바로 오늘을 포인트 삼는 유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블랙기업'과 '이세계'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학사는 그 어떠한 주장과 전망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에 (책의 내용에 따르자면)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순문학의 전진(학문적 정립)은 분명 크게 더디기만 하다. 그러나 분명 현대의 문학은 그 흐름을 주도하고, 더욱이 과거와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을 떠나 크게 주목받은 '너의 이름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날씨의 아이' 등이 가지는 가치가 그저 옛 지브리의 뒤를 잇는 애니메이션(또는 작품)으로서의 상징 뿐이었나? 아니... 그것에서 더 나아가 가지각색의 취향과 자유가 버무려진 현대 사회에서 결국 독자와 관객 모두가 그것에 주목하고 또 그와 비슷한 수 많은 감성에 젖어 들어가게 된 것은 분명 현대에서 보여지는 문학의 톡특한 모습 그리고 현대 문학이 나름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문학의 사전적 정의, 또는 절대적인 정답을 목표로 한다면, 이 책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한 책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사라져버린 가장 대표적인 직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래학자다. 각설하고 이제 과거와는 달리 현대의 문학의 그 유연함과 다양함을 애써 외면한 체 그 어떠한 정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다만 단 한가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다양함 속에서 피어난 어떠한 공감대 또는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이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며, 이에 이후 사람들이 이를 기억하며 이를 해당 '시대의 대표적인 모습(개성 또는 역사 )'이였다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과연 그렇다면 이후 미래의 후손들은 2020년대를 어떠한 시대라 불리울까? 현실도피? 대 질병? 혐오의 시대? 혹여 내가 생각치 못한 보다 긍정적인 키워드가 떠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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