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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누군가 나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넸다. 평소였으면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받아서는 주머니에 넣어버렸을 터인데 이날은 날이 날이니만큼 망설임 없이 금빛 포장지를 벗겨 입안에 쏙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오래된 습성대로 뭔가 입속에 남아있는 느낌이 싫어 바로 달짝지근한 초코덩어리를 힘껏 깨물어본다. 그 순간 알싸한 위스키의 맛이 순식간에 입안에 퍼져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제서야 입속에 들어간 이 까만 물체가 인지되기 시작하고 온몸의 감각이 마치 이 놈 하나에 연결된 듯한 순간이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순간에 당하고 마는 그런 위스키초콜릿.
위스키 초콜릿을 베어 물고는 어이없게도 여러 권의 책들이 떠오른다. 장르는 추리소설.
왜냐구? 바로 이런 반전의 맛이 있기 때문이지.
사실, 요즘 소설들은-특히 추리소설물- 글의 재미보다는 반전이라는 포인트에만 너무 매달리는 것 같아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가끔 스킬이 부족한 작가를 만날 경우 이야기의 초반부터 뭐가 반전일지, 어떤 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될지 거의 99% 예상 가능하기에 책을 읽는 내내 몰입도 안 되고 실망감으로 가득 차 오히려 반전이 없는 것 보다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한 동안 누군가 스포일러가 어쩌구 반전이 저쩌구 해도 그냥 시큰둥했는데 얼마 전 읽은 이 책에 많은 독자들이 반전의 묘미를 언급했다.
호~ 그래?라는 약간의 기대감으로 읽어 나갔고 별 5개를 빵빵하게 줄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 뒷통수를 한 대 때리는 작가의 펀치는 제대로 맞았다고 인정한다.
이러하니 이 책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써 놓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줄거리만 살짝 언급하자면, 경제적 이유로 스트립댄서가 된 나미코는 자신에게 첫 눈에 반한 재벌남 스기히코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른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행운의 여신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이 재벌남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미코의 시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그 유력한 용의자로 자신의 남편 스기히코가 지목된다.
즉,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결과 재산은 물론 경제적 지원마저 끊어버리겠다는 엄청난 폭언을 들은 아들이 순간 자제력을 잃고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무시무시한 패륜범죄가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 사형선고가 내려진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위증마저도 서슴치 않았던 나미코는 새로운 변호사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여기까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팩트이지만 이걸 한꺼풀 벗겨보면 새로운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양파 껍질처럼.
쉽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각기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떤 물건이 A라고 정의될지언정 내 프레임에서는 B로 보인다면 그건 언제까지나 B가 되고 나에게는 B가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프레임 밖에서도 여러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도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맹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점이 이 책의 저자가 정교하게 놓은 트릭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밤을 켜는 아이>라는 그림책을 본 적이 있다. 유난히도 밤을 무서워하는 남자아이는 밤이 되어 불이 꺼지는 걸 너무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둠의 아이가 나타나 밤과 인사를 시켜준다. 그때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어둠의 아이는 “불을 끄면 밤이 켜진다”라는 말을 했고 난 이 부분에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밤이 켜진다는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낸 것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지던지...
이렇게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작가는 이 한권의 추리소설에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 짜내는 기묘한 트릭이 난무하지도 않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정교한 사건의 단서가 곳곳에 자리하지는 않았어도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의 묘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작가가 친절히 안내해준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갔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뜨악하게 되는 경험이 오랜만에 즐거웠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