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사막
김영희 지음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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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아무도 없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생을 리셋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을 만큼 괴롭고도 외로웠던 그 시절, 제가 선택한 곳은 라틴아메리카의 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떠날 결심을 하고 어떻게 실행에 옮길까만 밤낮으로 생각하다 보니 길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정말 맹목적으로 그곳의 비행기티켓을 잡기 위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 길만이 전부인양 간절히 원했고 저 멀리 공항의 활주로가 사라질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LA공항에서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는 순간,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와 닮은 동양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정말 내 나라를 떠나왔구나...라고요.

그렇게 도착한 이국땅에서 나를 처음 반긴 건 뜨거운 공기와 낯선 사람들의 냄새, 그리고 귓가를 맴맴 돌기만 할 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언어였지요.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어색해하며 허둥대는 동양여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찰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그제서야 엄습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진짜...난 이방인이구나 싶었기 때문에요.

그날 밤 숙소에 짐을 풀고 누군가 썼던 낡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려는데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에서부터 만약 한달도 못 버티고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어떡하나싶은 두려움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떠나왔다,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나는 제법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곳에서 전 예기치 않은 시간여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느리게 사는 법, 미래보다는 현재가 행복하다는 믿음, 당장 100페소의 돈이 없어도 열정적인 음악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 댈 줄 아는 여유를 배웠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쌀집 아저씨라 불리는 김영희 PD도 이런 남미를 선택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역시 명 PD답게 대책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지도 탁월한 선택을 하셨군요!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싶어집니다.

네. 그는 <나는 가수다>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고 어떤 사건과 맞물려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더니 홀연히 떠나기로 마음먹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60일 이라는 시간동안 철저히 혼자가 되어 ‘외로워서 좋았다’는 남미 여행을 감행합니다. 이제 이렇게 돌아와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예쁜 흔적을 사람들에게 내놓고 있네요.
그런데 만약 이 책에서 구구절절 낭만스런 여행기와 엽서에나 나올 석양 노을이 지는 해변가의 이국적인 풍경을 기대한 독자라면 이쯤에서 책을 덮는 게 나을 것입니다. 이 책은 여행에세이틱하지만 독자들에게 남미로의 여행을 권유한다거나 당장 짐을 싸서 현실을 탈출하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하지는 않으니까요. 
 

단지 한 중년의 남성이 모든 걸 뒤로하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날 것 그대로의 풍경 속에 자신을 맡겨두고 그 시간을 소박한 그림과 사진으로 털털하게 채워놓은 것 뿐이니까요.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중년남성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맛보고, 탈세속화 되어 인간본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들을 슬쩍 구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 책에서 황홀한 여행기일랑 기대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하루의 짧은 단상을 건네며 책 속의 빈 여백을 우리에게 채워보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곳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냈던 또 다른 삶의 이야기가 가려져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냥은 아니지요. 이 책과 함께 짧은 휴식 같은 쉼표가 전하는 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로...이거요.

성실히 살 일입니다.
열심히 살 일입니다.
인생 허투루 살 일이 아닙니다.
인생… 지금이 전부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제 행복해지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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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어른, 어린왕자를 만나다 - 아직 어른이 되기 두려운 그대에게 건네는 위로, 그리고 가슴 따뜻한 격려
정희재 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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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이제는 왠지 서글프고 안쓰러운 느낌이 드는 말이다.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못 했는데 누군가 정해놓은 지구별 나이를 따라 떠밀리듯 거친 세상으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부록으로 딸려와 삶의 무게를 더해주고 그렇게 나간 세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에 흥분하는 건 찰나일 뿐,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은 순간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나...진짜 어른이 된 거 맞아?라고.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여전히 어린왕자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작년에 2번, 그리고 올해 다시 2번 어린왕자 책을 펼쳐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생각과 느낌이 조금씩 달라졌고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행간사이의 숨겨진 의미가 새롭게 전달되어 또 다른 메시지를 받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 또 다시 펼쳐든 어린왕자.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의미의 시간들이었다. 마치 오래 전 읽었던 어린왕자 동화를 두고 작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혼자 읽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읽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훨씬 따뜻하고 깊은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왕자 동화를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들고는 자신의 인생 역시 반추해가고 있었다. 각각의 챕터에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여서 또 다른 인생이야기가 소담스럽게 펼쳐진다. 그렇게 작가의 인생 이야기들을 만나고 있자니 아프고 서툴렀던 청춘의 기억들 속에서 지구별 어른이 되어가는 외로웠을 시간들이 나와 참 많이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졌고 마침내 꼭꼭 숨겨졌던 내 안의 어린왕자와 조우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어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척 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어린왕자가 그리웠고 궁금했었던 건 아니었는지. 불안과 좌절을 애써 외면하고 사는 게 다 그런거야라는 뻔한 말로 내팽겨졌을 아픔들을 내 안의 어린왕자는 스스로 치유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막막하고 두려운 현실 앞에서 떨고 있는 순간에도 어느 새 따뜻한 위로의 목소리를 듣곤 했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잘 될꺼야” 같은 작고 여린 목소리를.

아직도 난 어른이 되기에 한참이나 부족하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진짜 어른으로 사는 일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풀어 나가야 할 삶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내 안에 여전히 순수하고 따뜻하게 남겨졌을 어린왕자를. 언제까지고 서툴고 외로운 지구별 어른에게 건네는 위로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그때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지금 지구에 온 어린 왕자를 만나고 있다.
지구에 아침과 밤이 오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어린 우주인을.
어쩌면 어린 왕자도 지구인들에게 연민을 느낀 나머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찾아온 우주인은 아니었을까. 프타아가 자니 킹을 선택했듯 어린 왕자도 생텍쥐페리를 택해 사랑과 진실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지구별에 살면서 겪는 기쁨과 슬픔, 상실의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려고 말이다.>[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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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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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라는 단어는 항상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다. 만약 이 단어 앞에 ‘감동적인’이라는 형용사가 붙었더라면 분위기는 180도 바뀌겠지만 아무런 설명이나 미사여구 없이 단독으로 이 단어가 쓰이면 나는 어느새 상상 가능한 최악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한다. 살인, 강간, 폭행...

이번엔 납치였다. 그것도 10살밖에 안된 연약한 어린아이를 8년간이나 감금했단다. 그런데 실화라고 하니 그냥 지나치려다 책 표지에 눈길이 아니 갈 수가 없다. 어딘지 연약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강인한 눈매로 독자들을 바라보는 표지의 여인이 심상치 않다. 알고 보니 그녀가 이 사건의 피해자인 그 소녀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끔찍했던 기억을 세상에 드러냈다고 한다. 타인의 입이 아닌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서.

여기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닥쳤을 시련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동안 읽고 보았던 몇 편의 영화와 책들을 떠올려보지만 그녀의 심정을 1%라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마음이 든다. 그녀는 10대의 시간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찬란한 인생의 한 시기가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었고, 그 기억은 평생 끔찍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이기에 자유의 몸이 된 지금도 그녀는 자유가 아닐지 모른다.

  8년의 시간. 누군가에게 노예로서 감금된 그 시간을 어떻게 글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 그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 아픔을 표현할 말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럼에도 그녀가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건 또 다른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극적으로 탈출한 그녀에게 사람들은 처음에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대했다. 그러나 상처받은 어린 피해자로만 세상에 보여지기를 바랐던 그들의 예상과 빗나간 것이 화가 난 것인양 사람들은 씩씩하게 제 2의 인생을 견디는 그녀에게 온갖 추측과 억측으로 다시 피해자가 되기를 요구했다. 자신은 탈출했고 그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소녀는 ‘용서’를 선택했다.(감히 용서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면서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참 몹쓸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 시간동안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 범인이었을테고 그랬기 때문에 꼭 살아서 탈출하리라는 꿈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는데, 그리하여 오랜 ‘관계’속에서 연민이라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그녀의 고통을 1%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녀가 범인에게 느꼈을 그 인간적인 감정들은 왠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는 대가는 항상 값이 비싸다는 걸 증명하듯이 세상은 그녀를 다시 가두려 했다. 각종 오해와 편견이라는 형체 없는 창살을 만들어서. 

그러나 그녀는 용감했다. 이제 피해자라는 과거를 버리고 평범한 한 여자로 살기위해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다. 자신의 부모나 가족들에게도 차마 밝히기 힘들었을 고통의 시간을 스스로 내보이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진짜 자유다. 이제는 진정한 자유를 찾았기를 희망하는 나의 깊은 바람이 그녀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감금생활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서서히 더 이상 그것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그것은 나의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내가 경험하고 싶은 인생의 다양한 다른 면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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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위반 - 나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묻는다
박용현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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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자가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제목이다. 위반을 했는데 정당하다라?
하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이 제목을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 없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저자는 한겨레에서 18년간 일하는 현역기자로 책의 내용 또한 그동안 한겨레 21에 써왔던 124편의 칼럼을 선별해 묶어 놓았다. 시사주간지인만큼 시의적절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세상을 논하는데 민주주의에서 인권, 법, 언론, 정치 등 여러 분야에 눈을 돌리고 있어 풍성한 얘깃거리가 가득했다. 특히 저자의 약력을 보니 미국 로스쿨에서 국제 인권법 학위를 따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서인지 법이나 인권에 관련해서 법적인 근거를 대거나 전문적인 예를 드는 부분에서는 법조인의 시각도 두드러짐을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나꼼수 열풍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부도덕하고 각종 비리에 앞장선 정치판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글들이 많다. 이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들은 눈감고 귀막은 상태에서 여전히 ‘마이웨이’중이시니 더 깝깝할 노릇이지만. 특히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는 법조인, 검찰 관계자들은 강자 앞에 납작 엎드리고 약자 앞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 지긋지긋하게 연출하고 있으니 한숨만 절로 나온다. 어디 이뿐인가? 인사청문회에서는 각종 불법의혹이 늘상 논란이 되고 위장전입은 공직자들의 필수조건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위장전입하면 처벌대상이 된다하고 자기는 진심으로 뉘우치니까 된거란다. 뭐 이런 개소리가 다 있나?!

저자는 이런 <나쁜 세상>을 한탄스럽게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야만 좋은 세상이 될 것인지를 나름 자신의 시각과 견해를 통해 밝히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당한 위반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적인 이슈에 대한 토론은 방해받지 않아야 하고, 강력해야 하며, 널리 열려 있어야 한다는 원칙, 그러자면 정부를 향해 격렬하고 신랄하고 때론 불쾌할 정도로 날선 공격이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에 온 나라가 충실해야 한다.” 민주국가의 국민이라면, 폭력적 행위가 아닌 표현의 영역에서, 정부에 얼마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대들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다. 그 표현 내용에 거짓이 포함돼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다. [본문 중]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더 낮은 곳은 외면하고 높은 곳만 바라보며 그곳을 갈망한다. 소외되고 버려진 계층은 더욱 더 격리되고 불법과 부정직한 루트라 할지라도 높은 곳에 다다를수만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버리는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재이기에 저자의 낮은 시선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땀의 대가를 정직하게 보상받을 수 없다는 걸 나 스스로 어느 순간부터 용인하고 있었나보다. 책에서 언급된 나쁜 사회의 일원으로서 너무도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고 말았으니.

이런 책을 읽다보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렇지만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어느 새 다시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생활인으로 돌아와 있다. 아! 이 괴리감을 어찌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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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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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빼빼로 데이. 누군가 나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넸다. 평소였으면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받아서는 주머니에 넣어버렸을 터인데 이날은 날이 날이니만큼 망설임 없이 금빛 포장지를 벗겨 입안에 쏙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오래된 습성대로 뭔가 입속에 남아있는 느낌이 싫어 바로 달짝지근한 초코덩어리를 힘껏 깨물어본다. 그 순간 알싸한 위스키의 맛이 순식간에 입안에 퍼져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제서야 입속에 들어간 이 까만 물체가 인지되기 시작하고 온몸의 감각이 마치 이 놈 하나에 연결된 듯한 순간이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순간에 당하고 마는 그런 위스키초콜릿.

위스키 초콜릿을 베어 물고는 어이없게도 여러 권의 책들이 떠오른다. 장르는 추리소설.

왜냐구? 바로 이런 반전의 맛이 있기 때문이지.

 

사실, 요즘 소설들은-특히 추리소설물- 글의 재미보다는 반전이라는 포인트에만 너무 매달리는 것 같아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가끔 스킬이 부족한 작가를 만날 경우 이야기의 초반부터 뭐가 반전일지, 어떤 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될지 거의 99% 예상 가능하기에 책을 읽는 내내 몰입도 안 되고 실망감으로 가득 차 오히려 반전이 없는 것 보다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한 동안 누군가 스포일러가 어쩌구 반전이 저쩌구 해도 그냥 시큰둥했는데 얼마 전 읽은 이 책에 많은 독자들이 반전의 묘미를 언급했다.

호~ 그래?라는 약간의 기대감으로 읽어 나갔고 별 5개를 빵빵하게 줄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 뒷통수를 한 대 때리는 작가의 펀치는 제대로 맞았다고 인정한다.

 

이러하니 이 책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써 놓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줄거리만 살짝 언급하자면, 경제적 이유로 스트립댄서가 된 나미코는 자신에게 첫 눈에 반한 재벌남 스기히코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른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행운의 여신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이 재벌남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미코의 시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그 유력한 용의자로 자신의 남편 스기히코가 지목된다.

즉,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결과 재산은 물론 경제적 지원마저 끊어버리겠다는 엄청난 폭언을 들은 아들이 순간 자제력을 잃고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무시무시한 패륜범죄가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 사형선고가 내려진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위증마저도 서슴치 않았던 나미코는 새로운 변호사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여기까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팩트이지만 이걸 한꺼풀 벗겨보면 새로운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양파 껍질처럼.

 

쉽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각기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떤 물건이 A라고 정의될지언정 내 프레임에서는 B로 보인다면 그건 언제까지나 B가 되고 나에게는 B가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프레임 밖에서도 여러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도 아니기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맹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점이 이 책의 저자가 정교하게 놓은 트릭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밤을 켜는 아이>라는 그림책을 본 적이 있다. 유난히도 밤을 무서워하는 남자아이는 밤이 되어 불이 꺼지는 걸 너무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둠의 아이가 나타나 밤과 인사를 시켜준다. 그때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어둠의 아이는 “불을 끄면 밤이 켜진다”라는 말을 했고 난 이 부분에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밤이 켜진다는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낸 것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지던지...

 

이렇게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의 작가는 이 한권의 추리소설에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쥐어 짜내는 기묘한 트릭이 난무하지도 않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정교한 사건의 단서가 곳곳에 자리하지는 않았어도 이 책은 분명 추리소설의 묘미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작가가 친절히 안내해준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갔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뜨악하게 되는 경험이 오랜만에 즐거웠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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