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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로드 - 라이더들을 설레게 하는 80일간의 일본 기행
차백성 지음 / 엘빅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바로 얼마 전까지 내 생각의 중심에 자전거 여행 = 청춘, 젊음이라는 공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여행하면 내가 제일 먼저 고려하는 건 어떻게 하면 덜 고생스럽고 또 얼마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지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나의 통념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여행을 하는 라이더임이 분명했다. 50대의 적지 않은 나이, 편안함은커녕 오로지 자전거 한 대로 떠나는 여행, 게다가 이번 일본여행은 5만엔으로 15일을 버티는 짠돌이 여행이라니 책을 읽기도 전에 고생문이 너무도 훤~히 보였다.
이런 안타까움이 드는 한편, 아~ 나도 저런 로망을 즐길때가 있었는데...라는 20대 초년 팔팔했던 청춘의 날들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지금은 자전거를 타는 일이 아예 없지만 대학교 1학년 첫 여름은 자전거와 함께 한 날들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베프인 친구 한 명과 나는 멋지게 첫 여행계획을 세웠고 목적지는 무려 ‘제주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수학여행으로 다녀본 경주나 설악산말고는 공식적인 여행경험이 전무했건만 첫 목적지가 제주도였으니...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똥배짱이 나왔나 싶을 정도다. (가끔은 그때의 무모했던 ‘내’가 그립기도 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제주도를 첫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둘째치고 더 위험한 발상(?)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다는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멋진 계획을 뒷받침할 충분한 준비를 한 것도 없었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에 자전거를 애용하는 나도 아니었지만 자전거 페달 돌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일로 느껴진 날들이었다.
게다가 숙소 근처에서 돈을 주고 빌려 탄 낡은 자전거는 중간에 버리고 차라리 걷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는데 작고 딱딱한 안장 때문에 그 고통이 더했다.
그렇게 쉬고 걷고, 끌고 하면서 하루 종일 해안가를 돌았던 그때의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짜 제주도를 여행했다는 느낌은 그때가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후 몇 번 더 제주도를 방문했지만 차를 타고 정해진 곳으로 갔다가 전망 좋은 호텔에서 여유롭게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 다였기에 편하기는 하나 특별한 느낌은 가질 수가 없다.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씻겨주던 바닷가의 비린 바람, 길을 잘못 들어 사람 많은 시장터에서 갇혀버린 시간, 허기진 배를 잡고 들어간 식당에서 맛난 밥을 먹는 사이 주인 아저씨가 바람 빠진 내 자전거 바퀴를 고쳐주던 일... 그 특별한 시간과 느낌이 새삼 그립기는 하지만 이 나이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없던 용기가 불쑥 샘솟는다.
조만간 그때 여행을 동행했던 베프에게 이런 생각을 전한다면 그녀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전문적인(?) 라이더가 분명해 보인다. 아메리카 로드라는 전작이 이를 잘 설명해주지만. 이번 여행은 일본이었다. 나도 한 2년 전부터 일본에 관심이 생겨서 딱 한 번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나야 동경 100배 즐기기류의 책을 끼고 우리나라 명동과 별 다를 게 없는 여흥만 즐기다 왔지만 말이다. 요즘은 많은 여행서들이 다양한 테마를 중심으로 엮어지지만 그동안 내가 보았던 테마들은 주로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대세였기에 확실히 이 책은 느낌이 틀렸다. 일본 속에 남아있는 우리 역사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그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과거를 오가며 묵직하고도 특별한 여행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조선도예의 씨를 멋지게 뿌려 준 심수관 선생일가에 방문한 일은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웠기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그곳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안내원의 말에 가슴 한 켠이 뜨끔해져 옴을 느낀다. 이국땅에 끌려가 노역을 하다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인들을 위해 세워진 위령탑은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한다.
이렇게 그가 지나온 이번 여행길은 거쳐 간 곳들 하나 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고 그저 웃고 즐기며 거쳐가기엔 아픈 상처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여행기는 특별한 건가 보다. 도쿄의 멋진 야경이나 눈과 귀가 즐거운 디즈니랜드의 흥겨움, 일본 특유의 맛깔난 음식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여행길을 조심스레 안내받은 기분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여행을 한 번이라도 해 볼 수 있다면 편안하고 안락한 10번의 럭셔리 여행기회와 바꿔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