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DNA에서 양자 컴퓨터까지 미래 정보학의 최전선 카이스트 명강 1
정하웅.김동섭.이해웅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논문 네트워크란 무엇일까. 참고문헌에 인용되는 논문 중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이 있다. 이런 식으로 스타 네트워크, 섹스 네트워크도 만들어 볼 수 있다. 스타 중에 슈퍼스타가 있고 가장 많이 연애 한 카사노바도 있다. 경제에서도 교통에서도 이러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실생활에 이용할 수도 있을까.

 

 

사람들은 열이 나거나 몸에 이상이 나타나면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닌지 검색을 한다. 독감에 걸렸다면 ‘기침’, ‘고열’ 등 독감과 관련된 증상이나 치료 방법을 검색해 볼 것이다. 구글 서버는 각 검색어가 어느 ip주소에서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걸 분석해서 지역을 찾을 수 있다. 그 지역을 폐쇄해서 더 이상 독감이 전염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통 네트워크를 알면 교통 체증을 해결할 수 있을까. 막히는 구역에 도로를 하나 더 내면 교통 체증이 풀어질까. 10대의 차가 사이좋게 5대씩 나눠서 가면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에서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한 사람이 윗길로 간다고 하자. 그럼 뒤따르던 사람이 왜 저 길로 가지, 뭔가 좋은 게 있나 하고 그 차를 따라간다. 그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이쯤 되면 계산이고 뭐고 없이 무조건 따라가게 된다. 이게 무질서의 대가이다.

 

 

그러나 이런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복잡계 네트워크에는 하나의 허브(중심)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네트워크를 이해하면 미래 사회를 예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에 유전자 네트워크를 밝혀내면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실험과 시도들이 꼭 인간에게 유익한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과학과 의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안락사 시킬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의 질적 측면에서 구원한다고 하지만 질적이지 않은 삶은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이 생겨서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유는 우생학의 논리를 따르는데 인간에게 적용시킨 우생학이란 개념은 그리스어로 '좋은 종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1920년에는 인류유전 우생학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히틀러(Adolf Hitler)의 인종이론과 결합하여 나치스(Nazis) 시대에 크게 확대되었다. 일반적으로 나치스 우생학이라는 표현은 형식적인 의미의 단종 정책과 계통적 살해인 반(反) 유대 주의적 정책의 양면을 포함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제 3자의 정자가 매매되는 상업적 정자은행이 출현하였고, 노벨상 수상자의 정자와 우수한 지능의 여성의 유전 인자를 인공 수정시키는 등 평등주의적 이념을 거스르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학과 기술, 정보에 우리의 모든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는 이 책의 화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고 비판적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서양미술사,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경계에서

 

 

‘종전 후 세계 미술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술의 탈정치화’다. ‘예술이 공개적인 사회적 표현을 삼가고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현대 예술은 현대 개인의 자유의 문제로 국한 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모더니즘 운동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좌익’이었다. 어쩌면 무정부주의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자유가 졸지에 자본주의적 ‘자유’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원근법을 거부하면서 환상을 걷어내려 했고 뒤샹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제 현대 미술은 미적 가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아예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미술이 일종의 사물이 되어 존재할 때 그것은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는 연극에 가까워’진다.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포스트모던한 예술들이 등장한다.

 

 

포스트모던한 팝아트는 모던의 서사를 무너뜨리면서 기의를 거부하고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등의 예술적 혁신을 꾀했다. 잭슨 폴록은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는 종류의 그림’을 그렸고, 혼돈과 부조화, 비조직화, 기법의 부재 등을 실험했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 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요체는 추상이 아니라 행위였고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과정이고 행동’이었다. 회화의 본질이 이처럼 ‘행위’에 있다면 이제 더 이상 그려진 그림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포스트모던은 ‘형태에 대한 공격, 물질성에 대한 관심, 즉흥적 화법 등을 통해 모더니즘의 기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모던의 기획에 대한 환멸, 문명의 위선에 대한 반발은 결국 문명 이전, 형태 이전에 대한 취향’으로 이어졌다.

 

 

모던에 대한 저항은 높은 것과 낮은 것, 안과 밖에 대한 구분법을 무너뜨리고 순수 사물로 나갔다. 물질에 대한 숭배, 죽음으로 돌아가자는 바타유의 유물론 등이 이들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아무것도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장소를 창조하고 공간을 창조했다. 뉴먼은 검은 바탕에 하나의 획을 그으면서 이곳과 저곳이라는 사건의 체험을 그렸다. 말레비치에게 모든 형태를 하나의 정사각형이고 모든 색채는 흑백의 무채색이다. 이제 예술의 대상, 제재는 사라진다. 그는 무게, 속도, 운동의 방향을 중시하면서 존재론적 해방을 모색했다.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숭고를 찾았는데 숭고는 미와 달리 무한성을 지닌다. 유한한 형태와 윤곽이라는 아름다움에 갇힌 미와 달리 숭고는 무한하고 어쩌면 공포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이 숭고의 체험이 우리를 미에서 해방시키고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 왕정의 시대

 

 

 

로마사 연구를 집대성한 근·현대 학자의 대표작으론 두 가지가 꼽힌다. 이번에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몸젠의 '로마사'와 영국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이 쓴 '로마제국쇠망사'가 그것이다.

 

 

 

독일 역사학의 대가인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은 1854년부터 세 권으로 나눠 '로마사'를 펴내 19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몸젠의 '로마사'는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몸젠은 로마 역사가 곧 이탈리아의 역사라고 보고 분석을 시도한다. 몸젠에 따르면, 인간 삶의 물적 토대에 해당하는 모든 부문에서 희랍 민족과 이탈리아 민족은 동일한 언어 및 풍습의 기원을 갖는다.

 

 

가족은 로마 국가의 토대였다. 이러한 가부장적 토대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권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로마에서 시민과 원로원은 로마 국가의 또 다른 구성요소였다.

 

 

몸젠은 또 로마가 피호민 중심의 상민 공동체 형성, 세르비우스 개혁을 통한 군대 정비, 그리고 그에 따른 토지 개혁으로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고 본다. 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피호민은 초기에는 오직 보호자의 중재로만 법적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후기에 국가가 더욱 강력해지면서 피호민은 보호자의 중재 없이 유일한 보호자인 왕에게 손해에 대한 공정한 재판과 배상을 요청했다. 왕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좀 더 긴밀한 복종의 의무를 가진 이들 피호민의 확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왕권 강화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군역을 시민이 아닌 토지 소유자들에게 무관하게 부과하는 군대 개혁을 실시했다. 인적 부담에서 물적 부담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토지 소유에 대한 세심한 감독을 진행했다. 군대 정비에 따라 공시적 토지 거래 및 토지조사에 관한 법률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로마는 더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로마의 권력과 영토 확장을 전해줄 역사적 전거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몸젠은 로마가 거대 제국을 이룩하는 데에서 중앙 집중 체제를 주변 국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덕을 보았다고 말한다. 로마는 그러한 중앙 집중 체제의 확립을 통해 라티움 연맹의 거점 도시였던 알바롱가를 복속시키고 라티움 연맹의 패권국으로 올라선다. 라티움 연맹이 로마에 의해 통일됨에 따라 영토는 동서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커진 로마를 다스리는 데 현실의 로마를 숭고하고 이상적인 차원에서 반영하는 데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투게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분업화하고 전문화했다. 나는 신발 밑창만 만드는 사람이어서 신발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누가 그것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노동의 즐거움을 도대체가 맛볼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분업화되고 쪼개지고 나눠졌다. 자신의 노동조차 통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고립되어 개인채로만 살아간다. 이제 내가 죽어도 관 들어 줄 친구도 없다. 짐멜은 현대인이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주관적인 상황으로 이주해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자기개발에 힘쓰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친구와 같이 푸는 게 아니라 책가방을 가운데 세워놓고 혼자만 푼다. 1등을 해야 하고 성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거노인으로 쓸쓸히 죽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그전에 지독한 외로움이나 우울증으로 자살 한다.

 

 

 

 

민주주의는 모두를 평등하게 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빈부 격차를 느낄 뿐이다. 겉으로만 평등한 체제는 연대와 결속만을 파괴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협력하고 더불어 살기 보다는 경쟁하고 짓밟으며 살아간다. 마르셀 모스는 원주민 사회에서 ‘선물 주기’로 인해 만들어진 강력한 연대를 경쟁적 자본주의의 허약한 사회체와 대비시킨 바 있다. 그는 대가 없이 헌혈한 사람들과 돈을 받고 피를 뽑은 사람들을 비교했다. 기부자는 건강한 신체 상태로 참여하면서 피를 선물로 주는 반면 대가를 받은 자들은 돈에만 관심있을 뿐 자신의 피가 건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19세기에 공공 생활은 언어적인 것에서 시각적인 만남으로 이동했다.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다. 18세기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문을 두드리고 그 집이나 농장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관광 안내서를 들고 둘러볼 뿐이다. 자신들이 여행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꺼려했다. 대화없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에서 협력이라는 게 가능할까. 대화는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피비린내 나는 경쟁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에 없는 예절도 알고 의례도 안다. 인간은 예술도 하며 책도 보고 사랑도 한다. 사랑은 흔히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초월한다고 여겨진다. 이게 바로 사랑의 급진성이다. 사랑에는 위계도 차이도 없다. 상징 질서가 만들어 놓은 법도 관습도 모두 뛰어넘어버린다. 회사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보자. 사장이니 말단 사원이니 할 것 없이 모두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위계가 있는가. 이런 공백의 순간이 새로운 인간형, 주체성을 가져오게 한다. 이 공백은 체제 외부에 있지 않다.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이 공백의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의 찬양이 불평등에 관한 불안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의 아이들은 서로를 더 잘 믿으며 더 잘 협력한다고 한다. 반면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한 강박적 투쟁(자기개발 따위)에 타인은 낄 자리가 없다. 타인은 기껏해야 도구,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타인은 ‘적’인 것이다. 이 확고부동한 좌파, 저자 리처드 세넷은 함께 더불어 협력하는 사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시종일관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게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게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분업화하고 전문화했다. 나는 신발 밑창만 만드는 사람이어서 신발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누가 그것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노동의 즐거움을 도대체가 맛볼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분업화되고 쪼개지고 나눠졌다. 자신의 노동조차 통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고립되어 개인채로만 살아간다. 이제 내가 죽어도 관 들어 줄 친구도 없다. 짐멜은 현대인이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주관적인 상황으로 이주해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자기개발에 힘쓰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친구와 같이 푸는 게 아니라 책가방을 가운데 세워놓고 혼자만 푼다. 1등을 해야 하고 성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거노인으로 쓸쓸히 죽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그전에 지독한 외로움이나 우울증으로 자살 한다.

 

 

 

 

민주주의는 모두를 평등하게 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빈부 격차를 느낄 뿐이다. 겉으로만 평등한 체제는 연대와 결속만을 파괴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협력하고 더불어 살기 보다는 경쟁하고 짓밟으며 살아간다. 마르셀 모스는 원주민 사회에서 ‘선물 주기’로 인해 만들어진 강력한 연대를 경쟁적 자본주의의 허약한 사회체와 대비시킨 바 있다. 그는 대가 없이 헌혈한 사람들과 돈을 받고 피를 뽑은 사람들을 비교했다. 기부자는 건강한 신체 상태로 참여하면서 피를 선물로 주는 반면 대가를 받은 자들은 돈에만 관심있을 뿐 자신의 피가 건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19세기에 공공 생활은 언어적인 것에서 시각적인 만남으로 이동했다.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다. 18세기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문을 두드리고 그 집이나 농장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관광 안내서를 들고 둘러볼 뿐이다. 자신들이 여행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꺼려했다. 대화없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에서 협력이라는 게 가능할까. 대화는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피비린내 나는 경쟁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에 없는 예절도 알고 의례도 안다. 인간은 예술도 하며 책도 보고 사랑도 한다. 사랑은 흔히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초월한다고 여겨진다. 이게 바로 사랑의 급진성이다. 사랑에는 위계도 차이도 없다. 상징 질서가 만들어 놓은 법도 관습도 모두 뛰어넘어버린다. 회사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보자. 사장이니 말단 사원이니 할 것 없이 모두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위계가 있는가. 이런 공백의 순간이 새로운 인간형, 주체성을 가져오게 한다. 이 공백은 체제 외부에 있지 않다.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이 공백의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의 찬양이 불평등에 관한 불안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의 아이들은 서로를 더 잘 믿으며 더 잘 협력한다고 한다. 반면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한 강박적 투쟁(자기개발 따위)에 타인은 낄 자리가 없다. 타인은 기껏해야 도구,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타인은 ‘적’인 것이다. 이 확고부동한 좌파, 저자 리처드 세넷은 함께 더불어 협력하는 사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시종일관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