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6
오스카 와일드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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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방 바닥에 누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어대던 세계명작동화 중 특히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동화는 바로 행복한 왕자였다. 온 몸이 금박으로 뒤덮혀 있고 눈과 칼에는 보석이 박혀 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며 행복을 소원했던 행복한 왕자라는 이름의 거대한 동상, 높은 동상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내던 행복한 왕자는 그 자신은 화려한 금과 보석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에서는 끝없이 불행한 이들의 힘겨운 한숨이 들린다는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한숨이 가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한 왕자는 자신의 발에서 하룻밤을 보낸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이 가진것들을 하나씩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칼에 박힌 보석과 자신의 눈, 그리고 다신을 둘러싼 금박들까지.. 그리고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물론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가 읽기에는 다소 많다 싶을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행복한 왕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저 단순히 착한일 하면 죽어서라도 천국에 간다는 식의 단순한 의미를 가진 동화는 아니었지만 그 의미를 모두 알지 못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 당시에도 내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였다. 그리고 그 동화의 작가가 바로 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이다.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 그 안의 불안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이끄는 등장인물은 크게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의 모든 열정을 그의 초상에 투영하여 그의 초상을 그린 화가 바질 홀워드, 그리고 냉정하고 잔인할만큼 세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헨리 경,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초상화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바로 그들이다. 화가인 바질은 자신에게 미적 영감을 주고 자신의 작품에 모든 열정을 쏟아붇게 만드는 도리언의 매력에 빠져 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온전히 순수한 자신의 열정과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리언 그 자체의 모습을 표현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완성되는 그 순간 그를 찾아온 그의 친구가 있다. 모든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을 피상적이고 외면적으로만 파악하고 바로 그것이 진리라는 신념을 가진 귀족 헨리 경이 바로 그이다. 친구인 바질이 그린 도리언의 초상화를 보고 도리언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바질을 통해 도리언을 만나게 되고 도리언은 그만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헨리에게 매력을 느낀다. 아직 어린 소년기의 도리언은 자아를 만들어가는 그 순간 헨리의 사고방식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고 그의 신념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듯 흡수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헨리의 방식으로 보기 시작한 도리언, 바로 여기에서 도리언의 불행이 시작한다.

그림 속에 나타나는 잔인한 흔적, 스스로에게서 도망가는 도리언

도리언에게 도리언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한 헨리에 의해 도리언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은 그가 가진 외모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바질이 도리언을 그린 초상화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자신은 늙어가고, 초상화 속 자신은 그대로 젊은 모습을 유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리언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자신에게서 초상화로 옮겨간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리언은 기도하기 시작한다. 초상화의 자신이 현실의 자신을 대신해서 늙어가고 자신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진다. 도리언은 늙지 않고 초상화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퇴폐와 향락에 물들어 추하게 변하는 도리언의 영혼은 그가 소원한대로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변화할수록 그 대신 늙어가는 도리언의 초상속 도리언은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마주 볼 수 없게 되고 추악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초상화를 오래된 공부방에 가두어놓기에 이른다.


동화처럼 돌아오는 내면과 외면의 자리.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도리언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래서 읽는 과정에서 그 끝을 쉽게 예측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있지는 않다. 어린시절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눈길을 끌었던 그 동화 <행복한 왕자>를 지은 바로 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나는 잠시 스스로의 오점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포를 보았던것 같다. 어떤 두려움도 나 스스로의 잘못을 마주보는 것에 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피하고 싶었던 스스로의 모습이라면 그 공포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가 아닐까?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의 실제를 대신에 변하는 초상화를 마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치명적인 오점이 한두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점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시작이 어쩌면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라는 가장 간단한 진리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그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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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09년 8월
절판


05년 개봉했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영화가 개봉했을때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었다.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차라 모든 영화들이 극장개봉을 하지 않았던 것도 가슴을 졸였던 이유였지만 거기에 더해 거의 모든 영화가 극장개봉을 한다는 서울에서도 상영관이 몇개 되지 않았던터라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어찌어찌해서 아는 지인에게 받은 그 영화의 cd는 진실로 반가웠다. 그저 볼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더글러스 애덤스, 그가 돌아왔다.

그 당시 내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기다렸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 겸 가수 모스뎁이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말이다. 개인적으론 좋아하시만 흥행영화에서는 모습을 잘 볼 수 없었던 모스뎁이었고 그나마도 저예산 영화들에 주로 출연하는 터라 국내에는 개봉조차 하지 않은 영화들에서만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그의 영화,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대하게 했던 영화가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다. 그렇게 단지 모스뎁을 보리라는 의지 하나만으로 만나게 된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나에게 새로운 상상의 영역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어떤 영화보다 기발하고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한 상상력,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산만하지만 결정적인 연결고리들이 존재하는 이야기의 결집력은 단지 그 한편의 영화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이 따로 있으며 그 원작자의 이름이 더글러스 애덤스라는 사실 또한 추가 정보로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더글러스 애덤스의 또 다른 작품이 바로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이다.


산만하기가 말할 수 없을만큼 복잡한 이야기들, 그리고 결정적인 유머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는 초반부터 읽는 사람의 혼을 쏙 빼어놓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절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개별적인 인물들의 짧은 이야기들이 흩뿌려지고(절대 정렬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절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사건들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초반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어떤 메세지를 중심으로 책을 보아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매하고 어지러운 특유의 분위기들을 자신의 상징으로 만든 전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본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하지 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의 제목에 떡 하니 등장하는 더크 젠틀리는 이야기가 1/3이 되어가도록 꼴도 안보이니 이 책의 정체가 심히 의심스럽다 해도 사실 무리가 아니긴 하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영혼의 계략에 빠진 인물들.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는 수 많은 등장 인물들이 존재한다. 우주선이 폭발한 외계인과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믿어버리는 전기수도사, 어느날 갑자기 동생에게 가던길에 죽게 된 고든, 그의 여동생 수잔, 수잔과 연인 관계인 리차드, 리차드의 은사인 리즈교스와 리차드와 동창인 이 책의 주인공 더크 젠틀리 마지막으로 수시로 뜬금없이 등장하는 말-_-;;; 타임머신과 착륙선등 현실과 과거 그리고 SF까지 뒤섞여 더글러스 애덤스 특유의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각자의 개별적인 사연들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위치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초반에는 산발적으로 툭툭 튀어나와 읽는 이를 적잖이 당황시키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인물들 사이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연결고리들이 하나의 사슬처럼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동료를 죽게한 유령의 죄책감이 그들을 시간여행으로 끌어들이면서 과거의 잘못을 회복하고 싶어하는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 아무리 간단하게 설명하려해도 어딘지 모르게 복잡하게 얽혀버리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더글러스 애덤스스럽다고 이야기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To be continued...

책을 읽는 즐거움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어떤 책은 일상의 평화로움을 선사하고 어떤 책들은 폭풍같은 감동을 전달하며 어떤 책들은 유머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은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어떤 영역에 배치해야할지 참 머뭇거리게 만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위치를 딱 찝으라 한다면 유머 쪽에 넣어야 겠지만 이 유머라는 것이 폭소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황당함에서 나오는 실소에 가깝기 때문이랄까? 하지만 이 유머에도 중독성은 있다보다 전작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즐겁게 본 사람들이라면 이미 조금은 적응 되었을 더글러스 애덤스식 황당 블랙 코메디가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에서는 한층 심화되었다고 하면 이 산만함이 조금 이해될 법도 아니 말이다.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는 한 권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어지는 속편으로 <길고 어두운 영혼의 티타임>이라는 작품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황당하고 복잡 어지러운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마무리하려면 아무래도 후속작인 <길고 어두운 영혼의 티타임>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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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구판절판


경기가 좋지 않을 수록 점술에 관련한 사업의 규모가 커진다고 한다.아마도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에는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미래란 언제나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새로운 세상이다. 오늘 보다 내일이 좀 더 밝과 아름답길 바라는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반대의 상황을 바라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이 힘겨울수록 희망찬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걸게 된다. 미래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름이기도 하다.


천 개의 눈이 지켜보는 다리 위해서 그와 그녀가 만나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홀로 밤길을 걸던 숀과 한 여성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그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 값 비싼 옷을 입고 고급 오픈카를 가진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부유한 여인이 다리 위에서 두려움에 몸을 숨기려 죽음을 선택하는 그 순간 그 곳을 지나던 횬. 그녀를 구한 형사 숀이 그녀를 다독이며 듣게 되는 그녀의 개인적인 사연이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의 주요 사건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3주안에, 정확히 자정에 그것도 사자의 아가리에서 죽을 것이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이 보이는 그녀의 사연,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에 관련한 것이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걱정을 담아 꺼낸 한 마디로 시작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의 불행은 어찌보면 싱겁고 어찌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닥칠 가까운 미래의 상황을 암시하는 그녀의 가정부, 그 가정부의 이야기들이 우연처럼 혹은 필연처럼 맞아떨어지기 시작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가정부가 그 정보를 듣는 누군가를 만나기를 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던 미래를 말하는 이의 경고를 무시한채 계속 그를 찾아가던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날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온다. "당신은 3주안에, 정확히 자정에 그것도 사자의 아가리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가지고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 그것이 주는 희망

경제적 부유함과 평안한 가정생활을 유지하며 걱정할 일이 별로 없던 부녀는 그 예언을 시작으로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시시각각 죽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압박을 느낀 그녀의 아버지는 점점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피폐해진 자신의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하는 그녀 역시 그 불행에 전염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압박에 이기지 못해 먼저 죽음을 생각하던 순간에 숀을 만난 것이다.


당신의 미래를 알려고 하지 말라.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가장 절망적인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한 남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옭아매는가를 표현한 섬세함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조도 없는 상황에서 도심의 한 복판에 사자의 아가리라는 다소 황당한 상황이 그것을 맞딱드린 이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을 끌어오는지,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이 그 황당하고 어쩌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인간의 의식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레이드가 놓인 현실적인 상황과 그를 둘러싼 음모, 그리고 우연처럼 벌어지는 한 순회공연단의 사자 도주 사건이 맞물리며 이야기를 더욱 몰아간다. 가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으로 그대로 남겨둔채 말이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가 말하려는 것이 인간에게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 조차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미래란 어쨋든 아직 닥친 현실이 아니며, 그 미래가 꼭 당신의 꿈처럼 화려하고 평화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쨋든 미래를 만드는 것은 현재이며 그러니 미래의 모습을 보려하지 말고 현재를 보면 당신의 미래도 보이지 않을까? 꿈처럼 화려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꿈꾼다면 미래가 아닌 현재를 보라는 것. 그것이 당신의 미래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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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버드의 어리석음 - 세상을 바꾸지 않은 열세 사람 이야기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9년 9월
품절


흔히 하는 말 중에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표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거나 그럴지도 모르는 천재와 세간의 비웃음을 받거나 혹은 아무에게도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채 존재에 대한 흔적도 남지 않을 바보가 어찌해서 종이한장 차이라는 걸까? 천재와 바보는 천양지차라는 표현이 맞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천재와 바보가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천재와 바보는 정말로 종이 한 장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또 그 차이가 불러온 조금의 변화가 얼마간의 간극을 만들어내는지가 천재와 바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는 것 뿐.

13인의 어리석은 자들. 그들의 시작과 끝에 놓인 공통점

<밴버드의 어리석음>은 바로 이 천재와 바보 사이에서 간발의 차이로 바보가 되어버린 13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두 다른 시대의 사람. 모두 다른 일들을 하던 사람. 모두 다른 배경과 다른 목적을 추구했던 사람들인 13인의 이 바보들은 때로는 일생을 불운하게 살아가기도 했고 때로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자신의 인생의 절정에 도달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지식인으로, 때로는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한 인물들이다. 모두다 조금은 다른 인생의 길을 걸었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시작과 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 남다른 인생의 시작에 있어 모두가 다른이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성을 가진 이들이었고 그 창의성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거나 혹은 이끌어내려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또 그렇게 시작한 인생의 끝이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모두가 망각한 존재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 또한 공통점일것이다.


천재가 될 수 있었던 바보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모두 잘못된 사고와 잘못된 결정으로 옳지 못한 인생을 살았던 실패한 인생 혹은 잊혀져야 함이 마땅한 인간이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앞서 거론했듯이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그들의 의지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의지가 아닌 것으로 시작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의 현재에 이르러 많은 존경과 추앙을 받는 것은 그들의 사고와 그들의 업적이 현대의 인류에게 거대하거나 혹은 핵심적인 가치로서 인정받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재와 바보가 갈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있기 보다는 역사가 혹은 인류가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대의 요구에 너무나 충실히 부흥했기 때문에 한때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존 밴버드나 마틴 파쿼 터퍼는 그 시대에는 선택받았으나 시대의 흐름이 그들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기에 잊혀졌고, 이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류를 위한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프랑수와 수드르는 당시의 시대에 선택받지 못했기에 이미 이전의 시대에서 잊혀져 버렸으며, 나름의 성공과 목적을 달성했으나 시대의 체제가 그를 보호하지 못한 탓으로 엉뚱한 이에게 그의 영광을 넘겨주어야 했던 이프레임 불이 잊혀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위대한 이름, 시대와 재능이 어울려야 탄생 가능한 신의 걸작품

누군가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 살아있을 당시 그의 재능과 뛰어난 지성이 빛을 발해 그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다면 더더욱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관점이나 사람들의 요구가 상상 다채롭게 변화하는 탓에 어떤 위인은 살아생전 영광의 빛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인물은 죽어서야 그 이름을 새롭게 알리기도 한다. <밴버드의 어리석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천재였으나 바보로 기억되는, 혹은 기억조차 되지 못하는 다양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음으로써 천재 혹은 위인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끝에 자신의 토양을 마련한 정직한 사람의 재능 위에 사람들의 관심과 시대적 배경의 선택이라는 거름이 있어야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천재나 혹은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재능만을 가지고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지금 우리가 위인이나 천재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롤모델로 삼는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어리석은 13인의 이야기 목록에 14번째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재와 바보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예스와 노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천재를 만드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여기에 시대의 요구와 다양한 요소들이 더해져 선택되어지는 하나의 걸작품이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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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절판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나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대면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꿈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때로는 답을 찾기 어렵고, 답을 찾아낸다고 해도 늘 같은 답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이렇듯 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고민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나"라는 존재.. "나"로 시작되는 의문과 의심들은 그렇기에 한 사람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답을 요구한다. 사람들의 성장이란, 어쩌면 이렇게 끝없이 스스로에게 내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꿔치기 당한 아이들의 전설

<스톨른 차일드>는 신화로 존재하여 이어내려져 온 '바꿔쳐진 아이들'을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 스스로의 성장을,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서 야영지를 마련하고 오랜 시간을 거쳐 다시 인간의 삶을 돌아올 기회를 어렵게 가지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이 되는 바꿔치기 당할 아이들에 대한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파에리로 불리우는 이 아이들은 스스로가 바꿔치기 당해 파에리의 구성원이 되었듯 그들의 구성원을 유지시키며 계속해서 바꿔치기를 통해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온 무리로 존속된다. <스톨른 차일드>는 이 파에리 무리에 새로이 바꿔치기 당해 들어온 헨리 데이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파에리 핸리 데이와 핸리데이가 된 파에리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이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애니 데이가 된 헨리 데이, 헨리 데이가 된 파에리

<스톨른 차일드>의 두 주인공인 헨리 데이와 애니 데이는 하나의 이름을 공유한 두 명의 소년이다. 어린 시절 파에리들에 의해 바꿔치기 당한 헨리 데이는 오랜 시간동안 파에리로서의 삶 속에서 파에리 애니 데이가 되고, 헨리 데이를 바꿔 치기 해 헨리의 자리에 들어간 파에리는 오랜 시간동안 헨리 데이로 살아가며 현실의 헨리 데이가 된다. 그리고 그 헨리 데이 역시 한때는 독일어를 사용하던 음악신동으로서의 인생을 살았던 또 하나의 바꿔치기 당한 아이이다. 두명의 데이는 처음에는 스스로가 놓인 현실에 적응 하기 위해 노력한다. 헨리 데이였던 애니 데이는 헨리 데이로서의 삶을 잊고 애니 데이에 익숙해지며, 파에리였던 아이는 진짜 헨리 데이가 되기 위해 바꿔치기를 하기 전부터 이후까지 끝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인생에 적응이 되었을 무렵 그들에게 하나의 숙제가 놓인다. 기억속에 존재하던 이전의 삶에 대한 것들. 바로 진짜 나에 대한 의문과 고뇌가 그것이다. 애니 데이는 끝없이 부모님의 집을 그리워하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헨리 데이는 파에리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부터 하여 스스로를 찾는 과정을 시작한다.


각자의 삶을 선택하다.

소년으로 성장을 멈춘 애니 데이와 어른이 된 헨리 데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를 찾는 것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작한 여정은 애니 데이에게는 이제는 헨리 데이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장벽과 함께 이미 헨리 데이가 아닌 애니 데이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그 끝을 맺고, 헨리 데이에게는 파에리 이전의 삶을 찾음으로써 그가 애니 데이에게서 뺏은 헨리 데이로서의 삶에 대해 사죄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애니 데이에게는 애니 데이의 곁에 함께 했던 스펙을 그리워 하는 자신의 마음을, 헨리 데이는 파에리 이전의 자신과 함께 헨리 데이로서 살아갈 앞으로의 진짜 삶을 남겨둔 채.


나를 찾는 다는 것.

<스톨른 차일드>의 두명의 데이는 스스로의 과거를 끝없이 원하고 그리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절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한다. 마음 한켠에는 공포를 간직한채.. 이야기를 읽으며 두명의 데이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역시 어른이 되며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의 행복을 끝없이 그리워 하지 않는가. 하지만 또 역시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그 시절을 그리워 하고 그 시절을 되찾으려 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살아가며 찾아야 할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스톨른 차일드>의 두 명의 데이는 아마도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애니 데이가 되어 버린 헨리 데이가 이제야 헨리 데이의 자리를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스스로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파에리였던, 그리고 그 이전의 또 다른 삶을 더 가지고 있었던 헨리 데이가 과거의 자신을 찾는다고 해도, 그가 이제 살아야 할 것은 헨리 데이의 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를 찾아 가는 과정은 결국 지금의 나를 바로 걷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애니 데이의 마지막 여행길의 끝에, 반드시 스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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