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 욕망과 무지로 일그러진 선거의 맨얼굴
리처드 솅크먼 지음, 강순이 옮김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속설과 달리 히틀러는 직접선거에서 독일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총통으로 선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였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히틀러의 나치스가 합법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히틀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국내외에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총리/국회의원이 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드는 인물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일이 허다하다. 어떠한 선택지가 주어져도 차악이나 차선 대신 최악을 선택하는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원래 "민중에 의한 지배" 혹은 "다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로 타락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다수일 경우에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문제다. 이러한 의심을 엘리트주의로 치부하고 민주주의가 장기적으로는 가장 오류가 적은 체제라고 옹호하기는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혹은 자주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의 저자는 유권자들이 1.투표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에 대해 무지하거나, 2.정보를 찾는 일에 소홀하거나, 3.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거나, 4.국가의 장기적 이익 대신 근시안적 사고를 하거나, 5.희망이나 두려움을 이용한 선동에 쉽게 흔들린다고 말한다. 저자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미국 정치의 사건들을 사례로 들고 있지만, 나에게는 무척 친숙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물론 저자는 조지 W. 부시를 선출한 국민들은 어리석고 버락 오바마를 선출한 국민들은 어리석다는, 혹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2008년 오바마 진영의 선거 캠페인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며, 이러한 경향이 특정한 정당이나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책의 원서는 2008년에 출판되었지만, 독자로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작년에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사건이다. 한국의 많은 진보주의자나 페미니스트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낙선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클린턴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론의 전제는 "힐러리 클린턴이 도널드 트럼프보다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는 것이며, 대전제는 "(인종이나 성별 등의)다른 조건이 같다면, 사람들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후보에 투표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전제가 틀렸다면? 이 책의 저자는 조지 W. 부시가 실제보다 더 멍청한 척 이미지메이킹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즉, 미국인 중 다수는 똑똑하고 능력있는 후보가 아니라 '인간미'가 많은 후보에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조지 H.W. 부시 대신에 로널드 레이건이나 빌 클린턴이, 앨 고어나 존 케리 대신에 조지 W. 부시가,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보다 도널드 트럼프가 재미있고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하버드대학 로스쿨 출신의 인텔리인 오바마가 당선된 것은 예외적인 사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바마 역시 유머와 에너지, 인간미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상대 후보였던 맥케인이나 밋 롬니와 비교해도 그렇다.)

미국의 보수화를 분석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나 토머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사악한 공화당의 책략에 미국의 민중들이 속고 있다는 주장을 펴지만, 이 책의 저자는 공화당이 미국 민중의 원하는 바를 적절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저자는 민주당이 쇠퇴한 요인 중 하나가 "그들이 흑인 민권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을 받아들인 것"(236)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한다면, 민주주의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를지지하게 된다. 작년의 미국 대선에서 벌어진 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저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견제가 없던 시절의 국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나 원로원 못지않게 부당하고 압제적이며 악랄하고 잔인했다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지금까지 넘겨본 모든 역사의 페이지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 다수는 끊임없이 또 예외 없이 늘 소수의 권리를 빼앗아왔다.
국민이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부단한 경계와 현명함, 미덕과 견실함을 발휘할 것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계획된 정부의 모든 프로젝트는 속임수고 망상이다. (232)

물론 유권자의 투표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유권자가 항상 옳고 현명하다는 신화 또한 잘못이다. 저자는 교육을 통해 유권자들이 정치적 의식과 지식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전한 민주주의는 유권자에 대한 적절한 불신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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