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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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의 부친이자 중국문학 연구자였던 김광주(1910-1973)는 <정협지>, <비호> 등을 저술하며 한국 무협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와병 중이던 김광주는 아들인 김훈에게 소설을 구술하면 김훈이 그 내용을 받아적어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부친이 들려주는 무협소설 주인공들의 용맹무쌍한 모험담과 나날이 노쇠해져 가는 아버지의 현실 사이의 간극이 김훈이 처음 마주한 문학이 아니었을까?  


<공터에서>에 나오는 주인공 마차세의 아버지 마동수는 "1930년대의 상해에서 반식민 반제국의 선전 활동에 종사했고 임정의 외곽 조직에서 공연 단체를 조직해서 민족자결의 문예운동을 전개"(51, 52)했다고 한다. 태어난 해가 1910년이라는 사실도 김광주와 소설 속 마동수의 공통점이다. 주인공 마차세가 군생활 중 휴가를 나와 상을 치른 것 또한 저자 본인의 에피소드로 잘 알려져 있다. 즉, 이 소설은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은 아버지 마동수와 장남 마장세, 차남 마차세다. 여기에 어머니 이동순과 마차세의 부인 박상희, 마차세의 딸 마누니 등이 나온다. 마동수는 일제시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왔고, 한국전쟁이 있고 난 얼마 후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동순은 흥남철수 때 미군의 군함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내려와, 빨래일을 하다가 마동수와 결혼했다. 장남 마장세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제대 후, 괌과 팔라우에서 사업을 전개하였고, 차남 마차세는 강원도 GOP에서 군생활 중 1979년 아버지의 초상을 치르고 얼마 안 있어 대학 친구 박상희와 결혼하여 생활전선에서 악전고투하게 된다.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한국전쟁 와중의 흥남철수, 베트남전쟁, 괌에서의 사업, 강원도 GOP에서의 군생활까지 파란만장한 마동수 3부자의 일대기는 시간적, 공간적 스케일로 보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이 될 법도 한데, 350여페이지의 책 한 권으로 쓰여졌다.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이라든지 흥남철수, 베트남전쟁이나 해외 사업 같은 부분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암살>과 <국제시장>을 엮어놓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영화 <암살>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나 <국제시장>의 신파적 감동은 김훈의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 후기에서 저자가 털어놓듯이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353)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마장세와 마차세 형제에게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아버지 마동수의 존재다. 박상희는 마동수의 생전 사진을 보고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가엾어서 눈물겨웠습니다"(262)라고 고백한다. 부계의 혈통을 따라 흐르는 핏줄이야말로 소설에서 마장세와 마차세를 괴롭히는 원흉이 된다. 마장세는 이를 두고 "덫"(255)이라고, 마차세는 "늪"(269)이라고 표현한다. 마장세가 한국에 오지 않고, 들르더라도 가족을 만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핏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형님은 한국이 싫은 건가, 가족이 싫은 건가"
"둘 다 무서운 거야. 아버지도 그랬어. 물려받은 거지. 난 형을 이해할 수 있어." (309)

마장세는 혈연으로부터 도망다녔지만, 결국 팔라우에서의 사업 도중 저지른 범죄로 체포되어 남산경찰서에 구금된다. 남산경찰서는 일제시대 마동수가 경찰에 체포된 형을 보러 갔던 곳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아버지의 인생과 아들들의 인생은 다시 고리를 이루며 순환하고 반복된다. 일제시대부터 민주화 이후까지 되풀이되는 폭력의 정체를 소설은 암시하고 있다. 마동수는 1979년에, 이동순은 1987년에 사망했다고 그려진다. 마동수의 모델인 김광주는 1973년에 사망했으니 소설에서의 연도 변경은 의미가 있는 듯 싶다. 박정희와 같은 해 사망했다고 소설의 화자가 말하고 있으니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것 같다.

책의 표지에는 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일가의 성씨가 마(馬)씨인 상징성 때문이다. 저자가 쓴 <내 젊은 날의 숲>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데려온 말이 등장한다. 그 말의 이름은 "좆 내논"이다. 이 소설에서 말은 '만주(=대륙)'의 상징인 동시에, 남성성의 상징인 것이다. <공터에서>에도 말이 등장하는데, 마차세의 딸 누니가 놀이공원에서 타는 조랑말이다. 말은 늙고 초라했다.

누니를 태운 말이 멀어져 갔다. 말 엉덩이 사이에 새카만 생식기가 쪼그라져 있었다. 말은 수말이었다.
마차세는 자신이 마씨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 휴가 나와서 아버지의 밑을 살필 때, 아버지의 생식기는 쪼그라져 있었다. (322)

마씨라는 성씨를 통해 말은 아버지와 연결된다. 소설 내에서 마장세와 마차세 형제가 느끼는 비애와 우수는 잃어버린 남성성에 대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마장세의 부인은 팔라우에서 현지인과 눈이 맞아 감옥에 갇힌 마장세를 버린다. 마차세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오토바이를 타며, 부인이 버는 돈이 없으면 생계를 세우지 못한다. 결국 잃어버린 남성성은 소설 안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마동수, 마장세, 마차세는 한심하고 갑갑한 삶을 살게 된다. 읽으면서 그런 부분이 짠해진다. 



P.S. 이 소설이 발매되고 나서 인터넷 일각에서 물의를 빚었다. 문제가 된 것은 다음 문장이다.

이도순은 보따리에서 기저귀를 꺼냈다. 딸아이의 작은 성기가 추위에 오므라져 있었는데 그 안쪽은 따스해 보였다. 거기가 따뜻하므로 거기가 가장 추울 것이었다. (95)

흥남 부두에서 이도순이 딸의 기저귀를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독자의 성적 흥분을 야기하기 위해 쓰인 묘사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딸아이의 작은 성기"라는 표현은 별 생각없이 지나친 부분이라,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물론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니 이 부분을 읽고 불편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성기라는 말만 나와도 변태적이라고 느낀다면 생물 교과서에 나온 인체 사진을 보고도 호들갑을 떠는 중학생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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